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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철학자 이정우 [타자]

by eunic 2005. 4. 18.

“내가 네가 되마” [타자] 와 악수를

정규직이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비정규직을 걱정하는 척하는 것만큼
혐오스러운 것도 없다
교수들은 강사들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차이를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그 차이가 존속되어야만 자신의 동일성도 있기 때문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동일성을 바꾸어나가려 할 때에만
윤리적 행위가 성립하는 것이다

“옛날 어떤 새가 날아와 노(魯) 나라의 교외에 머물렀다. 왕은 매우 기뻐서 소, 돼지, 양을 갖추어 대접하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하여 새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러나 새는 오히려 걱정하고 슬퍼하여 눈이 어지러워져 전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이것은 <장자>의 ‘달생’(達生)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왕은 새에게 친절하게 배려했다.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음악을 연주해 새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새는 슬퍼하면서 고통을 겪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차이 인정 때 서로의 관계 보여

왕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새에게 대접했다. 즉 새를 자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동일시=동일화(identification)’라는 말은 여러 맥락에서 사용되지만, 지금 이 경우는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한 경우이다. ‘타’(他)라는 말은 ‘자’(自)라는 말과 쌍을 이룬다. 자기가 ‘아닌’ 존재, 나와 ‘다른’ 존재가 타자이다. 물론 기준이 꼭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철수는 영희의 타자이고, 곤충은 새의 타자이다. ‘자와 타’란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나아가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필수적으로 사유하게 되는 항이다. 왕은 자기가 아닌 새를 자기와 동일시한 것이다.

왕은 타자를 타자로서 대접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동일시해 자기에게 좋은 것을 대접함으로써 결국 타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여기에서 ‘차이’가 중요하게 대두한다. 사물들 사이의 차이를 정확히 응시하는 것, 차이를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왕과 새는 다르다. 따라서 왕과 새의 차이, 둘 사이의 간극을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차이를 정확히 하는 것은 그 뒷문으로 다시 동일시=동일화를 숨겨서 들여오게 된다. 이 때의 동일시=동일화는 자기동일시=자기동일화이다. 왕과 새 사이의 차이가 정확히 규정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왕의 동일성과 새의 동일성이 정확히 규정된다는 것이다. 즉 두 사물 사이의 차이를 고정시킨다는 것은 역으로 두 사물 각각의 동일성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럴 때 두 존재 또는 그 이상의 여러 존재는 자기의 동일성에 고착화되어 자기의 자리를 확고히 지키게 되며, 그 결과 우리의 삶에는 어떤 진정한 변화도 창조도 불가능하게 된다. 이 경우에 확고한 동일성들을 지키는 존재들 사이의 차이들도 고착화되며, ‘차이’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 자체가 일종의 실체, 일종의 동일성을 갖춘 사물이 되어버린다. 서울과 부산이 확고한 자기동일성을 갖추고서 고착화되면 그 사이의 차이 역시 고착화된다. 바로 이런 식의 관계들이 모든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로서 고착화될 때, 차이 자체가 동일성의 체계의 한 요소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차이는 기존의 고착화된 동일성을 어떤 형태로든 움직일 때 비로소 진짜 차이의 역할을 한다. 때문에 차이는 두 동일성 사이에서 고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존재들의 내부에서, 각 존재 자체 내에서 시발(始發)되어야 하며 각 존재들 자체를 타자화해 나갈 때에 진정한 차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왕의 동일성과 새의 동일성이 고착화되고, 그 사이의 차이, 역설적으로 동일성으로서의 차이가 고착화될 때, 거기에는 각자의 동일성과 그 사이의 고착화된 차이만이 거듭 확인된다. 차이가 정말 차이로서 작동하려면 왕의 내부에서, 그리고 새의 내부에서 차이가 시동(始動)되어야 한다. 요컨대 스스로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의 견고한 성을 깨고 ‘타’로 움직여갈 때에만 변화도 창조도 가능하다.

동일시의 논리는 일본의 한국 지배에서도 한 몫을 톡톡히 했다. 다나카 치가쿠가 말한 ‘핫코우이치’(八紘一宇) 같은 논리가 대표적이다. 모든 것이 결국 궁극적인 하나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역설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역설함으로써 타자를 자기에게 통합해서 동일화해버리는 논리, 이 논리가 곧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논리적 핵심이다.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이 논리에 희생물로서 바쳐졌던가.

‘교수가 강사 걱정’ 때로는 위선

타자를 동일화한다는 것은 곧 내부화한다는 것과도 통한다. 자신의 바깥을 있는 그대로의 ‘바깥’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내부로 끌어들여 내부화하는 것. 그럼으로써 타자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것. 타자를 배려한다고 생각하는 것.

타자성, 외부성은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타자성은 낯섦이다. 그 낯섦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낯섦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낯섦의 공간은 관계가, 사이가 고착화되지 않은 카오스의 공간이다. 그 카오스의 공간에서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 낯섦의 공간을 통과해야 비로소 어떤 구체적 관계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 낯섦을 자기의 관점에서 미리 재단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물과 사물 사이의 폭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타자되려는 노력 땐 ‘윤리적 존재’

윤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타자를 배려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물론 타자의 배려는 중요하며, 타자에 대한 폭력이나 무관심보다는 윤리적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윤리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내가 타자가 “되려는” 노력을 함축한다. 내가 다른 존재가 되려는, 내 몸 자체가, 내 행위와 기분, 감정 모두가 타자가 되려는 노력이 없이는 진정한 윤리는 불가능하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자기의 동일성에는 흠 하나 내지 않으면서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위선적인 것도 없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타자-되기의 잘못된 모델이다. 철수가 철수이기를 그치고 갑자기 영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윤리적으로 좋은 것도 아니다. 이런 모델 자체가 철수의 동일성과 영희의 동일성을 전제하고, 그 동일성이 서로 뒤바뀐다는 생각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되기는 만화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상상에 불과하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자기’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양보하려 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이 타자가 되기 위해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타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직장을 버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며, 그렇게 하라고 종용한다면 그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윤리, 강요적 윤리일 것이다. 이런 강요적 윤리는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되려는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 한 어떤 진정한 윤리도 불가능하다. 정규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면서 비정규직 종사자들을 걱정하는 척하는 것만큼 혐오스러운 것도 없다. 대학 교수들은 시간강사들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그들과 자신들의 차이를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그 차이가 존속되어야만, 즉 그 차이가 실체화되고 고착화되어야만 자신의 동일성도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이 이야기하는 윤리나 도덕은 위선 그 자체인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동일성을 바꾸어나가려 할 때에만 윤리적 행위가 성립하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윤리의 근원은 남을 걱정하거나 남을 배려하거나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윤리의 근원인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타자화하려는 노력이 윤리의 근본이다. 그 극한적 형태는 자신이 가장 비참한 타자가 되는 것, 스스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행위에서 나타난다(그렇다고 “내려가는” 것만이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가치에 대해 일방향적인 생각을 전제하고 있기에 말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행위는 윤리의 가장 극한적인 형태이며, 우리가 붓다나 공자 등보다 예수에게서 더 궁극적인 형태의 윤리를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극한적인 행위를 통해 감동적인 삶을 보여준 인물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부른다. 이 점에서 ‘성인’은 윤리의 극한을 보여준 인물이라고 하겠다. 우리 모두가 결코 성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인의 예를 따라 타자화되려는 노력들이 존재할 때, 거기에 윤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soyow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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