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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꽃과 나비의 시간 /김지수

by eunic 2005. 4. 18.

꽃과 나비의 시간
보그 피처 에디터/ 김지수

과연 열정이 없다면 인간은 좀 더 선량해질 수 있을까?
불륜의 열기를 '습관' 혹은 단순한 열정으로 담담하게 묘사해온 두 작가의 '꽃과 나비'로서의 여자의 정념, 전경린의 <나비>와 아니 에르노의 <탐닉>.

남자는 '가슴이라는 날개'가 없고 여자는 '페니스라는 뿌리'가 없다.
그래서 그와 그녀는 생애 한순간에 서로의 꽃과 나비가 되고 서로의 주위에서 끝없이
부유하고 탐닉한다.
전경린의 <나비>와 아니 에르노의 <탐닉>은 때로는 인생에서 이름없는 꽃이 되어 기다리고, 때로는 나비가 되어 비상하고 여행하는, '여자'라는 꽃과 나비의 자웅동체를 그리고 있다.
'여성과 세월, 성과 육체의 문제'를 다룬 산문집 <나비>는 전경린의 전작인 <내 인생에 단 하루뿐인 특별한 날> <열정의 습관> 등 기존 작품들에서 그녀가 응축해온 '정념의 장면'들을 화가 이보름의 '선정적인 ' 수묵화와 함께 묶어놓았다.
그리고 안주바람꽃, 구름체꽃…천지간에 나와 이토록 척박한 이름을 갖게 된 들꽃들은 도대체 얼마나 혹독한 사랑을 치뤘기에 기거이 감수하고 지나는 것일까'라는 전경린의 카오스의 독백은 마치 나비의 날개짓처럼 태평양 건너 그녀가 평소 흠모해 마지않는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생애에 폭풍같은 정념의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야한 책은 본 적이 없어"라고 결혼의 권태기에 빠진 한 친구가 아니 에르노의 전작 <단순한 열정>을 권했을 때, 나는 대체 오십이 다 된 프랑스 작가의 논픽션 '불륜일기'가 어떻게 그런 감정을 자아내는지 궁금했다.
그런 바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시든 꽃 같은 첫문장' 때문이었다.
파리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근무하는 S는 당시 35세, 아니 에르노는 48세였다.
그녀는 하루종일 유부남인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그와 섹스를 하고 다시 전화를 기다린다. 그녀에게 일기는 전화를 기다리는 방법이고 쾌락을 배가하는 방법이었다.
그건 전경린 식의 자의식에 찬 욕망과는 다르다.
'달팽이가 각자의 집을 곁에 둔채 손바닥을 겹치듯 꼭 포개진다. 그리고 나면 각자의 집을 끌고 또 제 갈길을 떠난다. '나비처럼 생을 부유하는' 전경린에게 불륜이란 달팽이의 짝짓기 같은 것.
하지만 '남자 없이는 버려진 아이'가 되고마는 에르노는 생의 피로한 구차한 소요를 다 먹어치우고 피어난 처절한 꽃잎. <단순한 열정>의 모티브를 모아 엮은 이 확장된 일기의 제목이 <탐닉>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라.
그리고 어느날 문득, 레닌그라드에서 그와 함께 밤을 보낸 호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그 시간동안, 그 열정의 실체를 증언하는 유일한 흔적은 내가 알고 있는 몇마디의 러시아 말이었다'라는 단순한 깨달음과 함께.
아, 바야흐로 꽃을 던지고 싶다.
'한 남자가 몸을 요구하자 꽃과 잠자리와 파리새끼까지, 이 세상 모두가 하라고 아우성친다. 둘이서 원하는 가장 좋은 것을 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자신의 문장을 부연하듯 전경린은 "세상의 수백개 교훈보다 생에서 내 욕망만이 선명한 진리였다"라고 말한다.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면 '미생물의 세계로, 2억만년전 원초의 세계로 투항하는 것, 69자세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라고.
아니 에르노의 <탐닉>은 그 열정이 불에 데일듯 뜨겁고 불안하되 그 문장은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맨얼굴처럼 일상적이다.
그녀의 단어는 한 남자를 기다렸던 한때의 절절한 '시간'이고 따라서 가장 뛰어난 수사는 그것이 '일기'라는 형식 그 자체.
전경린의 <나비>는 그 모든 참혹한 꽃잎이 드리운 열정의 바다(지금가지 출간한 소설 8권)를 건넌 나비의 세월이 마치 야수파의 그림처럼 현란하게 점층되어 있다.
그녀의 통찰처럼, 어떤 점에서 열정이 없을수록 삶은 더 선량해진다.
그렇다면 사랑없이 못사는 사람과 사랑없이 사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
붙박이 꽃과 비상하는 나비의 시간을 지나온 두 작가의 에로틱한 열정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