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이정우의 키워드로 읽는 우리시대
잊을땐 반복되는 과거사의 [기억]
모든 사물들은 각각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지렁이는 땅속을 들어갈 수 있지만 하늘을 날 수는 없다. 물고기는 바다 속을 자유롭게 헤엄치지만 뭍에 올라오면 맥을 추지 못한다. 사물들, 특히 동물들 각각에게는 나름의 독특한 능력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존재도 일정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인간의 능력은 놀라운 구석이 있어서 일정하게 닫혀 있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들로 계속 열려 간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하겠다. 기계들을 발명하는 능력을 비롯해 사물들을 인식하는 능력, 윤리적·미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 … 등 다양한 능력들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특징짓는다. 인간의 이런 능력들은 대개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신’이라는 것을, 또는 영혼·마음·의식 … 등 무엇으로 부르든 정신에 상당하는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가능하다. 인간의 이런 정신적 능력을 철학에서는 ‘인성(人性)’이라고 부른다. 영국 경험론자들(존 로크, 데이비드 흄 등)의 저작들이나 칸트의 3대 비판서(<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헤겔의 <정신현상학> 같은 책들이 ‘인성’을 다룬 전형적인 저작들이다. 불교나 성리학(性理學) 역시 인성론을 집요하게 파헤친 담론들이다.
기억은 인간의 정체성 형성
오늘날 인성을 논할 때 사용하는 개념들은 예부터 내려온 개념들도 있으나 대개 서구 근대 철학에서 유래하는 개념들을 불교 및 성리학의 용어들을 활용해 번역한 개념들이다. 감각·지각·상상·기억·감정·판단·오성·이성 … 등이 대표적인 개념들이다. 이런 개념들에 관한 논의들이 ‘인성론(人性論)’을 구성하거니와, 이렇게 인성을 논할 때 결코 뺄 수 없는 핵심 개념들 중 하나가 기억이다. 기억이라는 개념은 인간이라는 존재, 나아가 생명이라는 존재를 해명할 때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개념이며, 따라서 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개념이다.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같은 저작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기억이라는 존재는 시간과 밀접한 연관을 띤다. 시간은 늘 생성과 소멸을 가져온다. 우주는 시간에 따라 끝없이 변해간다. 현대 물리학이 가르쳐 주었듯이, 견고해 보이는 사물들의 내부에서도 무수한 입자들의 복잡한 생성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 생명체들은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늙어 감을 겪고 죽는다. 성장과 노화도 미시 수준에서 보면 세포들의 생성과 소멸이므로, 이 우주에서는 단 한 순간도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경우란 상상할 수 없다.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 진리는, 적어도 진리들 중 하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시간의 작용을 전혀 다른 무엇으로 바꾸어버린다.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지 않을까?
시간이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가져온다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지속되는 것, 반복되는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찰나의 생성만이 존재하는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기억의 작용이 존재하기에 지속과 반복이 존재한다. 기억의 작용은 생명을 낳았다. 생명을 통해 갖가지의 존재들(각종 개체들, 색깔·모양 같은 성질들, 무수한 사건들 …)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이 우주에서 지속되거나 반복된다. 이런 지속과 반복이 아니라면 세계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채송화가 채송화를 낳고, 철수가 자신을 쏙 빼닮은 자식을 낳지 않는다면, 세계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사랑·미움·배반·만남·싸움·질시, 태어남과 죽음 … 등의 사건들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세계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기억은 정신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전혀 다른 차원을 획득하게 되는데, 그것은 단지 기억의 ‘용량’이 커진다거나, 정보를 저장하고 활용할 수 있다거나(예컨대 우리는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에 저장해 놓았다가 꺼내 쓰곤 한다), 기억 내용들을 편집까지 할 수 있다거나(예컨대 우리는 마음속의 기억 내용들에 ‘상상’을 가한다) 하는 것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기억을 활용함으로써 각종의 창작 행위를 하는 것(예컨대 기억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조차도 아니다. 정신 수준에서의 기억이 가져온 심대한 결과는 한 인간의 주체성, 정체성, 내면을 가능케 한 것이며, 사실상 이런 차원들이 전제되어야 방금 열거한 기능들도 가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차이 불인정땐 ‘집착증’
기억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가능케 한다. 한 인간이 겪은 사건들은 기억의 형태로 쌓이며, 그렇게 쌓인 독특한 사건-계열들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한 인간의 고유한 내면을 형성한다. 한 인간의 동일성과 정체성은 다르다. 동일성은 형식적 구조이며 죽어버린 논리적 똑같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체성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시간 속에서 변해가면서도 시간이 가져오는 차이들을 보듬으면서 ‘자기’라는 것을 만들어갈 때 성립한다. 정체성은 시간의 와류(渦流)에 떠밀려가면서도 기억과 반복을 통해 자기를 만들어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서 성립한다.
기억이 인간에게 이토록 소중한 것임에도 현대 철학자들(예컨대 푸코, 들뢰즈 등)은 기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반(反)기억(counter-memory)’을 이야기한다. 왜일까? 좀더 쉬운 이해를 위해 오토모 가쓰히로가 총감독한 애니메이션 <메모리스>(1997)를 생각해 보자.
3부로 구성된 이 애니메이션은 제목 그대로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각각 과거의 기억, 현재의 기억, 미래의 기억을 다룬다.
과거의 기억을 다룬 첫 번째 편은 우주를 항해하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떤 갠 날>(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 나오는 아리아임)을 듣고서 그곳을 찾아가는 우주항해사들이 겪는 환상적인 일을 그리고 있다.
두 번째 편은 어떤 임무를 부여받은 한 평범한 회사원이 중간에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에도 불구하고 덮어놓고 끝까지 임무를 완성하는 과정을 코믹 터치로 그리고 있다.
세 번째 편은 한 마을이 전쟁이 일어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항시적인 ‘전시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첫 번째 편은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서 그 그림자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한 오페라 가수의 집념을 담고 있는 마그네틱 기억장치를 그린 것으로서,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해 그것이 집념과 강박관념으로 화했을 때 나타나는 광기어린 환상들을 그린 것이다.
두 번째 편은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곧이곧대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한 사람의 코믹한 모습을 통해서 상황들이 가져오는 차이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뇌에 각인되어 있는 어떤 기억만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희비극적인 가를 그리고 있다.
세 번째 편은 ‘미래의 기억’이라는 독창적인 생각을 담고 있으며,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으로서의 기억이 사람들을 온통 그 예상=기억에 휩싸여 살아가도록 만들고 있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여기에서 그런 예상=기억을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거대한 권력이다). 기계문명과 사회풍자를 잘 결합시키곤 하는 오토모 가쓰히로의 재능이 번득이는 편이다.
한국사 청산해야할 기억 엄존
현대의 어떤 철학자들이 기억을 비판하는 것은 이 애니메이션이 잘 그리고 있듯이 기억이라는 것이 늘 강박관념과 동일성의 지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 차이의 도래, 상황의 변화 등을 수용하면서 살아가기보다 과거의 또는 현재, 미래의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 그런 삶이 가져오는 강박관념과 집착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동일성을 비판하고 차이의 철학을 전개한 인물들이 제시하는 기억 비판인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동일성에 대한 집착 못지않게 기억의 가벼운 망각 역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기억에는 개인의 기억만이 아니라 집단의 기억도 존재하며, 집단의 기억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역사에는 늘 부조리한 기억들, 비극적인 기억들, 피에 맺힌 기억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기억들을 망각한다면, 역사 속에서 부조리한, 비극적인, 참혹한 사건들은 다시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한국의 역사는 그런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현대만 이야기한다 해도 일제 시대의 정신대나 마루타에서부터 친일 인사들의 행적들, 남북의 비극적인 대립, 자유당 정권 시절의 비극들, 군사 정권들에서 벌어진 그 숱한 부조리·고문·학살 …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어두운, 피에 맺힌 사건들이 한국사의 기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 대학총장이 “2007년이면 대한민국이 다시 좋아진다”는 노골적인 선전을 라디오에 배포하고, ‘원로들’이라는 이들이 쇼까지 해 가면서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묵은 견고한 기득권을 지키려고 발악하는 이 시대에 역사의 비극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다시 겹겹이 쌓인 부조리와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기억들, 반드시 청산해야 하는 기억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정우 철학아케데미 공동대표 soyow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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