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받는 영화들
"지워버린 역사 아름다운 부활"
매체명 한겨레
작성일 1999-05-21
기고자 안정숙
영화제가 중반을 넘어선 칸이 황금종려를 둘러싼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다.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다시 찾아온 팀 로빈스의 (요람은 흔들린다)가 첫 상영된 18일, 축제본부의 중심극장 뤼미에르는 박수와 환호에 뒤덮였다.
훗날 매카시 열풍으로 소생하게 될 미국 하원 반미활동위원회가 청문회를 시작할 즈음, 테네시강 유역개발의 희망찬 구호와 노동자들의 구호가 맞부딪칠 때, 작곡가 블리츠슈타인은 그 노동자들의 연대와 각성을 담은 '노동뮤지컬' (요람은 흔들린다)를 작곡한다.
뮤지컬은 극장 TFI 대표가 청문회에 불려나가고 당국이 공연 바로 첫날 극장을 폐쇄하면서 무대를 잃는다.
이 뮤지컬의 연출자는 다름 아닌 오슨 웰스. 팀 로빈스는 "생전에 이 작품을 영화화하고 싶어하던 오슨 웰스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과 표현의 자유가 말살되던 그 야만의 시대를 정치적으로 정확하게, 미학적 완결성을 갖춰 재현해냈다.
셰익스피어 시대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를 사회주의 작가 쯤으로 잘못 알고 프래너건을 다그치는 반미활동위원회 다이스 위원장의 추궁으로 웃음을 끌어내던 영화는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전설적인 록펠러센터 벽화를 레닌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깨부수는 장면에선 비극이 된다.
그러나 로빈스의 가장 큰 힘은 무대를 잃은 예술가들이 빈 극장을 찾아가 돌발적으로 벌이는 즉흥공연에서 발휘된다.
"미국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영화의 굉장한 결말이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로빈스의 말대로 예술사가 지워버린 예술가들은 영화를 통해 아름답게 부활했다.
시간은 팀 로빈스에게 축복이었다. (밥 로버츠)에서 (데드맨 워킹), (요람은 흔들린다)까지 그가 보여준 것은 진보와 성장이었다.
시간과 한편에 선 인물들을 찾는 것은 올 칸의 특별한 재미 가운데 하나다. 현지 언론이 지난주말 "영화제 최초의 스타가 등장했다"고 반긴 페드로 알모도바르도 대표적 인물이다. 알모도바르의 13번째 영화 (어머니의 모든 것)에는 아버지의 부재, 강한 여성, 동성애와 뒤틀린 가족관계 같은 알모도바르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여전히 뒤얽혔지만 '스페인의 악동'은 이제 책임있는 어른이 됐다.
혼자 아들을 키워온 30대 후반의 장기이식 주선 전문가 마누엘라는 열일곱살 생일을 맞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다. 어머니와 생일기념으로 연극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보고나온 에스테반이 여주인공 블랑쉬 역의 배우 위마의 사인을 받으려다 뒤에서 온 차에 치인 것이다.
마누엘라는 18년 전 에스테반을 뱃속에 안고 떠나온 고국 칠레로 아들의 근원을 찾아 떠난다. 그것은 에스테반의 아버지, 아마추어극단 배우로 함께 일하던 남편의 성전환이란 옛 충격이 잠긴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선 아들의 죽음을 부른 위마가 공연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모든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베티 데이비스의 (이브의 모든 것)에서 제목을 따왔다. 그러나 알모도바르가 추구한 것은 갈등과 음모가 아니다. 에스테반의 비밀은 위마와 마누엘라를 하나로 묶고, 지금은 롤라라는 여자가 된 옛 남편의 상처는 뜻하지 않게 롤라의 아이를 가진 예비수녀 로사를 돌보며 치유된다. 영화는 마침내 자신과 주변인물들을 구원하는 마누엘라의 관용이 감동적인 멜로드라마다.
아톰 에고얀은 경쟁부문작 (펠리시아의 여행)에서 (에로티카)의 심리분석법을 여유있게, 원숙하게 구사했다. 마이클 윈터보텀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원더랜드) 못지않은 세기말의 대도시 미로를 뚫고 가족애와 자아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을 연상시키는 만화경 속에 담아냈다.
러시아 감독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몰로흐)는 연인 에바 브라운의 시선으로 그린 히틀러 이야기. 소쿠로프는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질감 살리기"를 이번 작품에서도 주요 과제로 삼았다. 필터로 날카로운 윤곽선을 모두 지워낸 화면은 장면마다 한 폭의 그림들 같다. 또 독일 실내극과 현대 희비극을 연상시키는 대사와 개성적 인물묘사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에바라는 지근거리 인물을 투과시킴으로써 영화는 히틀러에게서 역사성을 지워내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한편 레오스 카락스가 8년 만에 발표한 (폴라 X)는 사춘기 감성과잉으로, 진시황의 중원통일 전야를 그린 첸카이거의 (황제와 암살자)는 3000만~3500만달러라는 제작비를 들인 스펙터클에 도리어 짓눌려 빛을 잃었다. 첸카이거의 진 왕실은 중국보다 일본의 가부키와 구로사와의 사극을 연상시킨다.
칸/안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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