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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생명=사랑+정의+평화 < 2 >

by eunic 2005. 4. 7.

생명=사랑+정의+평화

시편 85, 1-13 마태오 4, 1-11


조헌정 목사 향린교회

[목사로서의 나의 고민]
그날 남자 봉사자들은 모두 20여명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식당이나 빨래하는 장소에 가 있었고 환자들과 직접 대하는 일을 하는 분들은 7,8명쯤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나이 드신 백인분이 매우 쾌활하여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독일에서 목사로서 은퇴하신 분이었는데, 이곳에서 4년째 봉사하는 분이셨습니다.

여기서의 모든 봉사는 자기 돈으로 합니다. 모든 숙식은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다만 이곳에서 봉사하면 하루 먹을 것만 환자들과 함께 먹는 정도의 혜택밖에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이 목사님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목사는 본래 할일이 이런 일이어야 하는데, 자기 목회를 돌아보면 평생 한 일라는 것이 교회 건물 고치는 것이었다.’고 농담조로 얘기를 하더군요.

그 다음 얘기는 없었지만 너도 혹시 그런 건물 보수나 하는 목사되지 말고 여기 와서 함께 일하자는 말 같았습니다. 그래 그와 헤어져 죽음의 집을 나오면서 향린 교회 와서 한 일이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여러 일들을 하였지만, 아마 제가 지금 바로 목회를 그만둔다면 몇 년 후에 교인들이 저를 기억하기를 ‘아! 그 수염 기른 조목사 미국에서 와서 교회 이곳저곳 고치는 일을 많이 했지. 성전 내부도 모양을 바꾸고 4층도 고치고. 화장실 수도 전기 다 고쳤지.’ 물론 제가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관리부원들이 하였고 돈은 여러분들의 헌금으로 하였지 제가 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제가 목사로 있을 때 일어난 일이기에 그렇게 얘기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사람을 키우고 사람을 훈련하여 하느님 나라 제자 삼으라는 본래의 사명은 어디가고 교회 건물 보수하고 유지하는 목사. 앞으로 우리나라도 이 독일 목사 마냥 건물 보수하는 일로 목회하는 목사가 많아질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 새로 짓는 게 유행이지만, 한 3,40십년 지나 건물들이 낡게 되면 지금의 향린교회마냥 건물 보수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올 겨울에도 영락없이 하수도도 터지고 수도관도 터졌습니다. 새로 짓지 않는 한 계속 보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전 이 독일목사님의 얘기가 제 귓전을 맴돕니다. 건물이나 보수하는 이 목회를 계속 붙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당장 툭툭 털고 콜코타로 가서 그 목사님과 함께 일할 것인가를 고민해 봅니다.

처음 저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이 마더 테레사가 운영하는 이곳이 왜 이리 시설이 열악한지 몰랐습니다.

분명 세계의 부호들이 너도나도 자선금을 보낼터인데 왜 비좁은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봉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봉사를 마치면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사실 테레사 수녀님은 크고 아름다운 건물 깨끗한 병실에 최신식 의학 기구로 갖추어진 병동을 지어주겠다는 부호들의 그런 제의를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사랑의 접촉은 없어지고 조직만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모든 외부도움을 거절하고 있고 심지어는 세탁기 사용도 거부하면서 봉사자들을 통해 굳이 손빨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테레사수녀는 말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들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고통 없이 일한다면 우리 활동은 사회사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6천명의 한센병 환자들과 장애인들이 함께 사는 비바 얌테라는 인도의 공동체 입구에는 이런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I sought my soul, but I couldn't see my soul. I sought my God, but my God eluded me. I sought my brother, I can see all three. 나는 나의 영혼을 찾았지만, 볼 수는 없었다. 나는 나의 하느님을 찾았지만 하느님은 나를 피하셨다. 그러나 내가 나의 형제를 찾았을 때 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찾을 수 있었다.

[정의와 평화는 하나인가? 둘인가?]
문명으로부터 단절되어 살고 있는 고산의 말카트 부족과 함께 하였던 둘째 날 우리 향린 젊은 친구들과 모닥불을 펴놓고 그때까지 보고 깨달았던 여행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차례차례 얘기를 하였는데, 우소연교우는 조금 있다 하겠다고 자기 얘기를 미루었습니다. 대체로 나온 얘기들은 여기 부족들을 포함하여 인도인들은 매우 가난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평화가 있다.
우소연교우 차례가 되었는데, 갑자기 저를 향해 목사님은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 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세계 역사를 한마디로 줄여서 말하라고 하면, 개인과 집단의 갈등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고, 사상적으로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얘기한다. 이는 물론 서구학자들의 견해이지만, 종교사적으로 보면 또 다르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유일신관과 다신관의 대결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서에서 하느님 나라의 실체는 정의와 평화라는 단어로 말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별 생각 없이 정의와 평화는 함께 묶을 수 있는 한 단어로 생각했다.
그런데 인도 여행을 하면서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선 인도는 정의의 입장에서 보면 극심한 빈부의 차이가 있다. 부자 5%가 인도 부의 95%를 갖고 있는 매우 잘못된 나라이고 힌두교의 카스트제도가 있어 남녀의 차별뿐만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그 사람의 신분이 결정이 되고 동시에 그 미래가 결정이 되는 매우 부정의한 사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동시에 이 사회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정의에 관점에서 보면 아주 문제가 많은 나라이지만 그런데 평화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아주 적은 나라이다”

[‘나마스떼’의 영성]
반대로 미국을 보면 미국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고소사건도 많다. 그러나 평화롭지는 못하다. 미국은 질서가 있지만 그 안에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차가운 무질서가 존재한다. 인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무질서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싸움이 없다. 미국인들도 겉으로는 평화로운 것 같지만 인도인들이 갖는 평화와는 근본이 다르다. 저는 이것의 차이가 종교에 있다고 봅니다.


인도에는 3억5천만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별의별 신이 다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신의 사회이고 범신의 사회입니다. 제가 인도를 가기 전에는 문명적으로 뒤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손가락으로 밥을 먹으면 미개인이고 숟가락이나 포크를 사용하면 문명인이라고 말하는 일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습니다. 뒤처리를 할 때, 물과 손가락을 사용하면 미개인이고 화장지를 사용하면 문명인이라고 하는 얘기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고등종교이고 다신의 사회는 저등종교라고 배웠지만 지금은 그런 정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인사는 두 손을 합장하고 서로를 향해‘나마스떼’라 합니다. 불가에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할 때의 ‘나무’와 같은 어원입니다. 이 인사말은 ‘당신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당신 안에 있는 신을 인정하고 거기에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도사람들은 많은 경우 이마에 점이 있거나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이는 신의 자녀란 표시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이는 곧 그 사람이 믿는 신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감히 무시하거나 욕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곧 그가 믿는 신을 무시하거나 욕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면 신의 노여움을 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에서 다신적인 사회는 상대방을 신적 존재로 까지 높여보는 서구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운전이 얼마나 험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서울의 택시 운전수는 이들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그래서 사고도 많이 납니다. 저희도 택시를 타고가면서 접촉사고가 두 번 있었는데, 운전사끼리 서로 한번 쳐다보고는 그냥 갑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다신이 지배하는 사회. 분명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정의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말이 안 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평화를 유지합니다.


반대로 미국은 개인의 권리 보호 정의의 관점에서는 세계에서 으뜸입니다. 그런데 범죄 살인사건이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인종간의 갈등 흑백의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믿는 부시대통령은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나서 이라크를 침략합니다. 그래서 자기 군인도 천명이 넘게 죽고 이라크 국민은 수 만 명이 죽고 부상자까지 합하면 수십만의 엄청난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이러한 살상과 침략을 가능케 한 것이 기독교가 가르쳐준 정의라는 개념입니다.

지금 우리 남한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재벌은 재벌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선생은 선생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상인은 상인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서울은 서울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모두가 다 자기 권리를 확보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수가 틀리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확성기를 들이대며 거리로 나와 데모를 합니다.

제가 이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가장 앞선 미국도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고 정의를 계속 주장하다보면 결국은 상대방을 죽이는 이라크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의 없는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그런데 평화를 배제한 정의는 과연 무슨 정의인가 하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고민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야훼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사회는 그 하느님 나라의 실체가 주로 정의 쪽에 맞추어져 있고 그래서 정의의 이름으로 지난 2천년동안 끊임없는 분쟁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는 것입니다. 유일신은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외에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신을 믿는 인도나 다른 지역들은 거기에 저급한 신앙의 모습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대방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신들이 존재하니까 자기와 다른 상대방을 그냥 다르다는 다양성의 차원에서 인정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자기와 같은 존재로까지, 나아가서 상대방을 신으로까지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평화가 존재합니다. 전 그래서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과연 다른 신은 모두 가짜 신으로 여겨 제국주의적 선교개념을 갖고 이들을 교화시키는 일에 나서야하는 것인가?

바라나시에서 인도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강가에서 한국의 어느 보수교회에서 온 젊은이 7,8명이 그 강을 바라보면서 복음송을 힘차게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한국교인들은 자기네 교회 앞에 이 인도인들이 와서 목탁을 두들기며 자기들의 노래를 부를 때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도대체가 남의 나라를 방문한 손님으로 예의상으로도 말도 되지 않을뿐더러 신앙적으로도 잘못된 것임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이게 바로 오늘날까지 지난 2천년동안 기독교가 저질러온 잘못이 아닌가? 유럽 제국주의 사회가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모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까?

정치경제적 목적이 있지만, 그 배후에는 기독교적 유일신/절대신관에 기초한 제국주의적인 선교관과 직선적/진보적 역사관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밤낮없이 열심히 경쟁적으로 사는 것은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하루 천원을 벌어 먹고사는 인도사람과 하루 십만 원을 벌어먹고 사는 우리 남한 사람을 비교하여 행복지수를 알아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행복이라는 것이 얼굴의 미소로 평가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인도사람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의 성공한 한 사업가가 휴가차 전라도의 외딴 섬을 찾아갔습니다. 며칠을 쉬면서 밖을 보니까 한 어부가 새벽에 잠깐 나가 고기를 잡고는 오후 내내 그늘 밑에서 잠만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업가가 이 어부에게 다가갔습니다. ‘아니 왜 고기를 안 잡고 잠만 자는 것입니까? ‘오늘 먹을 것은 다 해결했습니다.’‘아니 이 시간에 계속 고기를 잡아서 남은 것들은 시장에 팔면 좋지 않습니까?’어부가 물었습니다.‘뭐가 좋습니까?’‘아 고기를 갔다 팔면 돈을 벌수 있고 돈을 많이 벌면 큰 집에서 살고 그리고 더 많은 배를 구입하여 사람을 부리면 직접 고기를 잡지 않아도 되어 아주 편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같이 이렇게 휴가를 내어서 이런 곳에 와서 쉴 수가 있는 것입니다.’‘전 지금 매일같이 그렇게 쉬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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