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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노동인구 외면한 민주주의는 허구”

by eunic 2005. 4. 4.

△ 1997년 구제금융위기 이후 신빈곤층이 급증했다. 노동시장에서조차 배제당한 이들은 거리로 나앉았다. 일을 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고, 일을 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는 노숙자들이 대표적이다. 사진은 서울시내 도로가에 술을 먹고 잠든 한 노숙자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고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회에 고함

누구나 빈곤층이 될 수 있는 한국 발전모델
대기업 노조중심 노동운동 파행 거듭
‘위기의 노동’ 등 두편의 책 통해
복지없는 불평등해소 실험 실패 결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이하 아연·소장 최장집)가 양쪽 비상 점멸등을 켰다. 한쪽은 민주주의의 위기, 또다른 한쪽은 사회경제적 위기를 경고한다.

소속 연구자들이 함께 펴낸 <위기의 노동>(도서출판 후마니타스>은 그 비상 점멸등이 한데 모이는 곳이 노동 문제라고 말한다.

“사회 모든 구조물의 기반을 이루는 힘인 노동인구의 절대다수가 정치적·사회적으로 대표되지 못하고, 빈곤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을 때, 그 사회의 시장경제는 비인간적 억압기구에 불과하며, 그 사회의 민주주의 역시 허구”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어 신용불량자·여성·파견노동자·외국인노동자 등 노동시장에서조차 배제당한 ‘신빈곤층’의 실상을 짚어간다.

이들이 한국사회에 경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최장집 교수가 지난 연말 발표한 몇몇 논문과 올 초 <한겨레> 신년인터뷰 등을 통해 ‘사회경제적 기반 붕괴에 따른 민주주의 위기’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최 교수의 연구소장 임기는 오는 8월이면 일단 끝난다.

소속 연구자들 몇몇도 이를 계기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결국 이번에 나온 책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최장집 사단’이 한국사회와 노무현 정부에게 던지는 경고신호의 결정판인 셈이다.

비상 점멸등은 두 곳을 향해 깜빡인다. 노무현 정부와 노동운동계다.

우선 노동운동은 “국민 다수인 경제약자를 제대로 대변·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기업 조직노동 중심의 이익집단운동으로 변질”(이병훈)되고 있다.

폭력충돌 등으로 대의원 대회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오늘은 그 대표적 징후다. 반면 현 정부는 “집권 엘리트- 경제관료- 삼성그룹 간의 결합”을 통해 “시장효율성이라는 유일 가치를 교조적으로 관철”(최장집)시키고 있다.

사실상 한 묶음으로 동시 기획·출간된 <한국노동자의 임금실태와 임금정책>(도서출판 후마니타스)은 그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연 연구교수인 김유선 박사는 59개의 그래프와 27개의 표를 동원해 지금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총정리했다.

실질임금수준은 제자리이고 가계적자는 늘어났다. 성별·학력별·산업별·직종별 임금격차가 급속히 확대됐다. 법정 최저임금도 못받는 노동자도 더 늘었다. 한국 노동자의 임금소득 불평등 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악이다.

이제 <위기의 노동>은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해 ‘사망 선고’를 내린다.

“사회복지정책 없이도 경제성장과 고용증대만으로 기본적 복지를 제공하고 불평등을 완화했던 한국의 예외적 실험은 이제 실패로 끝났다”(김순영)는 것이다.

그 결과 “실업자나 무능력자 등 특정 계층만이 아니라 누구나 빈곤층이 될 수 있는 ‘빈곤의 일상화’”까지 발생했다.

이들은 다시 한번 정치의 복원을 말한다. “자본 세계화의 희생자가 될 위험에 처한 이들이 … 의지할 수 있는 힘은 여전히 국민국가의 정치권력이며 경제에 대한 의식적·정치적 개입”(유철규)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와 노동운동계는 그래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이성적 개입”(문광훈)을 위해 거듭 나야 한다. 어떤 면에서 지금의 위기는 “재벌중심의 발전모델을 해체하고 노동의 사회적 편입(복지개혁)과 정치적 편입(민주화)을 위한 하나의 호기”(고세훈)일 수도 있다. 결국 “민주주의 발전사란 노동의 정치화의 심화과정”이라고 이들은 거듭 강조한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