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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몬스터''의 분노가 전이된다

by eunic 2005. 3. 31.
'몬스터'의 분노가 전이된다
[일다 2004-06-21 04:41]

“삶이 웃긴 게. 살아보면 생각한 것과 달라.”

리(샤를리즈 테론 분)는 그렇게 말한다. 그녀는 마릴린 먼로처럼 누군가 그녀를 발견해주고 알아주고 사랑해주길 바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남자가 그래 주길 바랬다. 어쩌면 많은 여자들이 꾸는 그런 핑크 빛 꿈을 꾸며 그녀는 그렇게 자랐다. 그러나 남자들은 그녀를 강간하고 폭행하고 조롱했다. 어줍잖은 외모인데다 가난한 그녀를 사랑할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녀는 13살에 ‘창녀’가 됐다. 아버지가 죽고 동생들을 먹여 살리려고 ‘창녀’가 된 그녀가 부끄럽다며 동생들은 눈 속에 그녀를 집어 던졌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그녀는 시궁창 같은 삶 속에서 자살을 꿈꾸다 생각했다. 그러다 남자의 ‘그것’을 빨고 번 5달러는 쓰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5달러로 싸구려 맥주 한잔 하러 들어간 바에서 셀비(크리스티나 린치 분)를 만났다.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너무 예쁘다”고 말한 여자. 그녀 최초의 사랑. 그녀는 살기로 결심한다. 마지막 ‘꿈’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에게 그 ‘사랑’이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것을 이해할까. 그저 그녀는 행복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 현실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자신을 농락하고 모멸하고 싶어 안달이 난, 집에서는 자상한 아버지라도 그 짓을 할 때는 ‘아빠’라고 불러주길 원하는 남자들에게 돈을 얻는 일 뿐이었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사랑하는 셀비를 굶게 하지 않고, 당당하게 웃고, 파티를 즐기고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그 남자들의 돈을 구걸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그것을 원하니까, 그 길밖에 보여주지 않으니까. 공중을 화려하게 휙휙 돌며 아찔하도록 전율을 퍼부을 것 같은 환상적인 놀이기구, ‘몬스터’. 그것은 막상 타고 보면 사방으로 튀는 오바이트를 감내해야 하는 현실일 뿐이다. 적어도 리에게는 그랬다.

리는 마지막 탈출구이자 행복인 셀비와 도망을 꿈꾼다. 그런 그녀를 잡아 세우고 묶고 때리며 엄청난 폭력을 가하는 남자를, 그 마지막 탈출구로 향하는 그녀를 기를 쓰고 막으려는 남자를 리는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꿈은 왜 그토록 쉽고, 허무하게 무너져야 하는가. 그녀는 왜 늘 모든 사람에게 냉대 받고 폭력을 감수하고,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몸을 팔고 학대 받고 용인될 수 없는 존재인가. 그녀는 ‘악한 존재’인가. 그녀는 말한다. “나는 선한 사람이야,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 살인은 안 된다고 말하는 셀비에게 말한다. “누가 그래?”

리가 만난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막연히 안고 있는 ‘믿음’에 어긋나는 사람들이었다. 셀비는 “네가 만난 그 사람들만 그렇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녀가 만난 사람은


그랬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는 지극히 호의적이고 따뜻하지만, 누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악랄하고 추악하며 ‘죽여 없애버릴 만 한 것’이었다. 리에게 사람들은 그랬다. 그것이 리의 현실이고,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세상이 어쨌다’ 식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논리로 비춰져도 별 수 없다. 누가 보기에도 세상이란 정말이지 기득권이 정해놓은 질서 아래 개인을 민망한 존재로 몰아 넣고, 그들만의 규율로 통제하며 돌려먹기에 바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들의 삶은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있다. ‘힘들어도 착한 짓을 해야 한다’며 ‘창녀’들을 욕하고 당할 만 하다고 정당화하며, ‘남자를 만나 행복한 안정을 꿈꿔야 한다’고 동성애자들에게 강변하고 설득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니던가.

삶은 생각한 것과는 다르다. 사람들은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사랑’이면 모든 게 해결되고 그 다음의 기회가 온다고, 자신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안될 게 없다고,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깨끗하게 살아보겠다”는 리에게 “학력도 경력도 없으며 컴퓨터도 못하는 회사에 지원한 것은 몸매로 먹고 살려는 의도”라고 모욕하고 어떤 기회도 주지 않고 외면하며, 리를 사랑하는 셀비에게 “창녀는 흑인처럼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현실은 경찰도 바지를 내리며 리에게 당연한 ‘서비스’를 강요하고, 교회에서 여자와 키스했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내쫓는다. 그들은 아름다운 섬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파티를 즐기고, 삶을 긍정하고 싶었지만 세상이 그들에게 내민 것은 저주와 경멸뿐이다. 그들의 ‘사랑’은 공포고 저주일 뿐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온 날 밤, 리는 독백한다. ‘삶은, 생각한 것과는 다르다’고. 그리고 셀비와 섹스를 한다. 상처투성이인 몸을 한 장의 수건으로 감싸고 셀비 앞에 선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이 영화가 괴로운 점은 여기에 있다. 그녀가 사랑한다는 것. 인정 받지 못하는 존재가 너무나 간절하게 삶을 원하고 사랑을 직시한다는 것. 그리고 현실에서 그들의 사랑은 추악하기 짝이 없는 죄악이라는 것.

살인을 하고 섹스를 하는 그녀들 위로 진부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던 ‘Crimson And Clover’가 흐른다. ‘그녀를 잘 알진 못하지만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내게 다가오면 보여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정말 황홀한 기분이에요. 모든 걸 다 해보고 싶어요. 정말 행복한 느낌이에요.’ 그 마지막 행복.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구름 뒤에는 햇빛이 있고, 운명은 산도 움직일 수 있다. 사랑은 언제나 최후의 길이며,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생명이 있으면 희망이 있다.” 동의하는가.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때마다 냉소 어린 웃음이 비어 나오진


않는지. 결국 술에 취해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셀비에게 전화를 걸 동전 몇 푼을 구하다 잡힌 리는 죄수복을 입고 화면을 향해 정면으로 돌아본다. 우리를 응시한다. 그리고 말한다. “말은 좋지.”

이 영화 <몬스터>에서 여배우 셰를리즈 테론이 ‘미녀’에서 ‘추녀’로 완벽한 변신을 꾀했다는 식의 놀라움을 역설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그 엿 같은 현실, ‘생각과는 다른’ 멀미 나는 삶을 직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말: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다 읽게 된 조선일보의 쓰레기 같은 평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세상이 그들의 ‘사랑’을 읽는 방식이 딱 이따위기 때문이고,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제목은 이렇다. '몬스터의 희망- 정말 아쉬울 땐 등돌리는….’

“셀비를 ‘희망’의 의인화로 가정하면, 이 작품을 삶과 희망의 우울한 관계에 대한 우화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애초 바에서 먼저 접근한 것은 셀비였지요. 지극히 의존적인 셀비는 함께 살게 되면서부터 칭얼대며 매춘을 해서라도 빨리 돈 벌어올 것을 아일린에게 종용했지요. (중략) 그런 희망과 함께 살기 위해서 아일린은 다른 모든 걸 포기하고 점점 더 비극의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극중 ‘희망’은 재판 과정에서 아일린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며 검지 손가락을 들어 아일린을 가리켜 배신함으로써 결국 삶의 의미 자체를 박탈합니다.” (조선일보 6월 20일)

‘셀비’에게 모든 덤탱이를 씌우며 그 ‘희망’은 ‘재앙’의 근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일린(리)을 치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강간하던 ‘그들’의 얼굴을 하고는,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한 ‘셀비’에게 ‘정말 아쉬울 때는 등 돌리는 재앙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혹은 ‘바랄 것을 바래라’는 근엄한 훈계처럼 들리기도 한다. 마지막 “안녕, 내 사랑”이라고 읊조리는 두 여성의 비극은, 이 세상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왜곡되는 그들의 사랑과 현실은, 그들에게 그저 ‘배신’이자 동성애의 말로일 뿐이었다.

이 영화는 실화다. 영화를 보면 리의 분노가 온몸으로 전이돼온다. 영화를 보고 ‘못생기고 버림받은 여자들은 레즈비언이 되기 마련’이라거나, 강간과 ‘창녀 짓’의 전력이 그를 레즈비언이 되게 했다는 식의 ‘사회학적 고찰’을 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도 그러하다.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정말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은’ 기분이 든다. <몬스터>는 리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저열한 현실의 단면을 너무나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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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문이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