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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김승희의 '여성 이야기'

by eunic 2005. 3. 21.

김승희의 '여성 이야기'

세 여자, 혹은 봄날 오후 세 시 반
꽃 피는 봄의 첫날, 가을의 끝을 논하다


[조선일보]

오후 세 시 반. 점심을 먹기엔 늦은 시간이고 저녁을 먹기엔 아직 이른 그런 시간.
그 슬픈 어정쩡한 시간 속에 여자 셋이 봄 햇빛을 받으며 식당 마당에 놓인 식탁에 앉아 있다.
여자들은 사십대 초반, 오십대 초반,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런 초로(?)의 여자들이다.
멋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지성미가 있다. 그녀들은 나이를 격(隔)하여 친구이다.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들이 개방적인 마음을 지녔다는 증거다.
여자들 주위에는 산수유 꽃나무와 목련 꽃나무, 무리 지어 꽃 피어난 진달래꽃, 한 울타리로 올라가며 피어나는 개나리꽃 뭉텅이들이 있는데 그런 봄꽃들의 만발한 개화가 그녀들을 어딘가 어둡게 보이도록 한다.

안톤 슈낙이 지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에세이 속에 '오후 세 시에 점심을 먹는 사람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라는 구절이 있었던가?
오후 세 시에 점심을 먹는 사람이란 아마도 주방장이나 설거지에 바빴던 주방 아줌마, 음식 접시를 들고 테이블 사이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사람들이다.
배고픈 손님들이 다 물러갔으니 이제 주방 사람들이 식탁으로 나와 앉아 손님 자리를 차지하고 밥을 먹는다.
봄이니 마당 식탁으로 나와 잠시 꽃나무 아래서 호사를 해본다.
오후 세 시의 식탁이란 그렇게 음지와 양지가 서로 바뀌는 그런 시간이다.
그 마당 가설 식탁에는 그리하여 세 여자와 식당 사람들, 그렇게 두 팀이 밥을 먹고 있다.

자신만만, 첨단, 커리어 우먼 등의 단어가 어울리게 보이지만 사실 사업이 점점 기울어 근심이 많은 사십대 초반의 여자가 어느새 꽃이 다 저버린 산수유 꽃나무를 보며 말한다.
"요즘에 부쩍 도시에도 산수유 꽃나무가 많아진 느낌 안 드세요? 옛날엔 산수유 꽃이라고 하면 직접 보지는 못하고 시에서나 들어본 것 같은데". 요즈음은 산수유 차가 그렇게 인기래요. 강장제, 활력제로 좋다고. 제가 산수유 차 좀 가져왔어요. 한 봉지씩 나누어 드리려고."
사십대 초반의 여자가 그렇게 말하자 오십대 후반의 여자가 미소를 짓고 말한다.

"꽃이나 열매를 약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래. 젊을 때는 꽃을 꽃으로만 보지 않았어? 풀도 풀로만 보고. 그런데 나이 들면 꽃도 그렇고 풀도 약초로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거지. 이제 ■■씨도 확실히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가 봐요."

세 여자들은 나이를 초월하여 사귄다고 하면서도 다들 경어를 사용한다. 오십대 초반의 여자는 '약'이라는 말을 듣고 문득 홀로 생각한다.
그녀는 지난해 그야말로 청천 벽력을 맞은 여자다. 건강하던 남편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중이어서 그녀는 언제 어디서도 앰뷸런스 소리가 귓가에 가득 들려온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결혼한 이후 하도 살기가 어려워서 '사랑' 이란 것을 따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산다는 것, 그것이 항상 긴급 명제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편이 쓰러지고 나서야 그녀는 '당신이 없으면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당신이 없으면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것을 결혼 25년 동안 어떻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올 수가 있었던가 말이다.
진실이란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일상 속에서 상실되는 것인가?
사십대 초반의 여자와 오십대 후반의 여자는 모두 오십대 초반 여자의 남편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세 여자들은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그렇게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이다.
오십대 후반의 여자는 밥을 먹으며 생각한다.
몇 년 전 남편이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밥알이 꼭 소금 알갱이 같다고 느낀다.
그녀 남편은 한동안 하복부에 인공 항문을 매달고 있었다.
그런 종류의 쇠락, 해체, 무너짐이 너무나 싫어서 그녀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사람의 육체를 소금 인형이나 설탕 인형처럼 만들어서 죽어가는 고통 없이 물에 녹아 그냥 사라지게 만드시지 않고 왜 그토록 생생한 붕괴의 아픔을 주신 거냐고.
아이들은 모두 외국에 나가 살고 있고 그녀는 혼자 살고 있다. 담담하게 자기 고독과 맞서며 호스피스 봉사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두 여자는 어떤 숭고미를 느낀다.
그녀들은 무언가 말을 많이 나눈 것 같지는 않다.
내면을 많이 고백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봄꽃의 만개 옆에서 슬프도록 늦은 점심식사를 먹고 황황히 각자의 혹독한 일상 속으로 헤어지는 그녀들에겐 분명 무언가가 있다.
고통으로 눈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다하여 손을 잡아주는 어떤 힘. 고통의 횡포에 맞서 작은 위로를 건네는 캄캄한 영원 속의 한 방울 작은 스냅 사진.

(김승희 시인, 소설가 - 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