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서라도 자유를 얻는다면‥
베를린 대상작 ‘미치고 싶을때’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그랑프리인 황금곰상을 받은 <미치고 싶을 때>는 음악극처럼 소단락 사이사이에 터키 전통악단이 나와서 노래와 연주를 한다. 거의 끝부분에서 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잃은 이들/ 모두가 나처럼 이성을 잃을까?/ 내 슬픔 끝없이, 무한히도 깊어 나의 적들 눈멀게 하소서….” ‘나’는 알고 있다. 적들을 이길 수 없다. 방법은 내가 미치는 것 뿐.
인습에서 벗어나려 계약결혼
터키계 독일인 감독이 터키계 독일인 배우와 함께 만든 이 영화 속의 ‘적’은 터키 사회의 전근대적 인습이다. 여자의 정절을 강제하고 결혼 전에 여자가 독립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부정을 저지른 여자는 가문의 수치로 여겨 가족들이 먼저 응징한다. 시벨(시벨 케길리)은 함부르크에 사는 스무살의 터키계 독일 여자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터키계 남자와 결혼하는 길밖에 없다. 40대 초반의 차히트(비롤 위넬)와 위장결혼을 한다. 결혼식을 올리고 한 집에 살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고 살다가 일정 기간 지나 이혼한다는 데 합의했다. 아내와 사별한 차히트는 약과 술에 쩔어 사는 폐인같은 인물. 펑크록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그는 눈이 선하고 속에 감춰놓은 격정이 있는 듯하다.
자유를 꿈꾸는 ‘유러피언 드림’
그뒤부터 영화는 멜로의 틀을 따라가지만 거기서 분명해지는 건 ‘적’, 즉 인습의 위력이다. 결혼 뒤에도 차히트는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시벨도 이따금씩 나이트클럽이나 파티장에서 만난 남자와 하룻밤 정사를 나눈다. 그러는 동안 둘 사이에 호감과 질투가 섞이면서 묘한 감정이 싹튼다. 영화는 이 과정의 중계에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건 대다수가 안다. 첫 눈에 반해 의지로 쫓아간 사랑보다, 뒤늦게 경험이 증명하는 사랑이 더 질기다. 그 사랑이 익기 시작할 때 시벨과 한번 섹스를 나눴던 남자와 차히트 사이에 시비가 붙고 차히트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틈이 벌어지자 놓칠 새라 잊고 있었던 적이 쫓아온다. 차히트의 살인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시벨의 부정이 알려지고, 시벨의 가족은 시벨을 죽이려한다. 차히트는 감옥에 가고, 시벨은 “기다릴게”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을 피해 이스탄불로 간다.
문제는 터키계인 시벨이 유럽문화의 세례를 받았다는 데에 있다. 그 정도의 자유분방함은 유럽 여자였다면 하등 문제될 게 없다. <미치고 싶을 때>는 슬픈 사랑 이야기에 더해 속된 표현으로 ‘선진국 물을 먹은 후진국 여자’의 끔찍한 고생담이다. 시벨이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졌다면 얘기가 다를 수 있었다. 그는 정신적 자유를 보장하는 ‘유러피안 드림’을 꿈꿨다. 시벨은 이스탄불로 와서 호텔을 경영하는 선배 여자를 찾아간다. 인습에 거스르는 일을 피한 채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가던 그 선배는 시벨에게 같은 길을 권한다. 시벨은 거부한다. 약을 찾아 유흥가를 헤맨다. 체제의 눈에는 정말 미치는 것보다 “미치고 싶다”고 외치는 게 더 위험하다. 시벨은 피투성이가 돼 길바닥에 버려진다.
한국의 자화상같은 ‘터키 뒷골목’
시벨도 차히트도 결국 미치지 못한다. 고생 끝에 멀쩡하게 살아 남았지만, 둘의 모습은 그래서 더 처연하다. 모처럼 만나는 수작이다. 감독 파티 아킨이 31살이라는 게 놀랍다. 때론 웃기고, 때론 처참하고, 때론 격렬하게 휘몰아치면서 영화는 다른 두 시대를 동시에 사는 이들의 비극성을 가슴으로 전달한다. 그게 남 얘기 같지가 않다. 터키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이스탄불 뒷 골목의 풍경이 한국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12일 개봉.
임범 기자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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