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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실연

by eunic 2005. 3. 3.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실연



프랑수아 트뤼포의 <쥴 앤 짐>을 프랑스 문화원에서 처음 봤을 때 내 나이 스물이었다. 그때 나는 그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별로 이해하기 힘든 영화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쥴과 짐, 두 남성이 카트린이라는 한 여성을 사랑하고 함께 동거하기도 하며, 한때는 짐이 카트린과 살았다가 카트린이 싫증을 내면 다시 쥴과 함께 살고, 그런 도저한 자유주의를 이해하는 게 참으로 힘들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에서 쥴인가, 짐인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카트린이 싫증을 내자 파리에 있는 다른 남자에게 전화를 해서 "이쪽으로 와줘. 카트린이 싫증을 내고 있어. 카트린과 함께 살아줘. 그럼 옆에서 나도 카트린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세상에, 저렇게 멍청한 남자가 있단 말인가. 영화를 보고 나서 한 선배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툭 한마디 던졌다. "너 당분간 연애하기 힘들겠다."


그러니 내가 20대 초반에 변변히 연애 한번 못 해본 건 당연하다. 언제나 늘 바보처럼 여자를 사귀고 헤어졌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짊어진 것처럼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며 아무것도 아닌 일을 붙잡고 공상하기를 즐겼으며 그게 인생을 열심히 사는 방법인 줄 알았다. 그런 와중에 연애에 대한 갈망이 없었던 것은 영화를 보고 떠들고 음악 듣고 책이나 몇 줄 읽으며 사는 것으로도 바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 "사랑은 끌려가는 게 아니라 끌어오는 거예요" 등의 문구를 가슴에 새기면서 이뤄질 관계는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그게 지금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운명처럼 뭔가 직감이 오는 관계가 있을 것이다,라는 이상한 배짱을 갖고 버텼다. 사실은 그만큼 내가 절실히 연애를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사랑한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나는 그를 사랑했다기보다는 그저 늘씬한 그의 몸이 떠올랐을 뿐이었으며 서둘러 그런 감정을 지웠다. 바보가 따로 없었다, 그때는.


복학하고 나서 몇 번의 시시껄렁한 연애를 하고 난 후에도 난 여전히 연애에 초보였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이 돼서야 초조감이 일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고 즐기는 건 바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소설 <사무라이들>에서 쓴 표현, '시간을 감각하며 사는 삶'에 사랑만큼 들어맞는 것은 없다. 우리는 대부분의 일상을 그저 대충대충 습관대로 살아간다. 밥을 먹어도 대충 끼니를 때우는 것이며 일을 해도 대충 주어진 과제를 때우는 것이다. 그럼 사랑도? 그건 아니다. 시간을 감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에 사랑만큼 좋은 경험은 없다. 한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그 사람의 마음과 몸으로 세상을 감각한다는 것을 느낄 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난 미친 듯이 연애에 빠져들었다. 마음을 바꿔먹자 갑자기 한때 주변관계가 정신이 없어졌다.


나중에 뒤늦게 극장 개봉한 <쥴 앤 짐>을 봤을 때 모든 것이 또렷해지는 것이었다. 내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사랑 따위의 것에 관심이 없는 척했던 내가 이제는 그 감정을 이해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인습에 따라 정해진 절차를 밟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결혼은 해서 뭐해, 연애나 하며 살지 뭐, 호기를 부렸던 것이다. <쥴 앤 짐>의 한 장면에서 쥴과 짐, 카트린이 함께 연극을 보고 나오는데 쥴과 짐이 그 연극 속의 여주인공에 관해 떠든다. 자유연애를 실천한 여주인공의 사랑을 사회가 받아줄 수 있느냐, 없느냐 따위의 문제로 두 남자가 설전을 하고 있을 때 카트린이 냉랭하게 두 남자를 쏘아보며 말한다. "여기 두 바보가 걷고 있군요." 그리고는 느닷없이 강으로 뛰어든다. 두 남자가 허둥대며 카트린을 구해주는 장면을 보고 나는 그녀의 모습에 반했다.


카트린은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 안에서 애정을 습관처럼 주고받는 그런 무의미한 생활을 참을 수 없어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늘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런 관계의 자장 안에 있어야만 만족하는 여성이다. 인습의 틀을 떠나 가장 진실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하는 여성이다. 그런 여성의 이미지는 에릭 로메르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에도 나온다. 독실한 가톨릭 교도인 장 루이가 크리스마스 저녁에 우연히 좌파 행세를 하는 교수 친구를 만나 그의 여자친구인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얘기인데, 나는 그 영화 속의 모드라는 여성에게 반했다. 장 루이는 교회에서 만난, 독실한 신자처럼 보이는 젊은 처녀에게 반했지만 별로 관계의 진전을 보지 못한 처지다. 소심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정신이 억눌려 있어서 사랑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드는 그에 비하면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다. 크리스마스 식탁에서 온갖 잘난 체하는 대화들이 오고 간 후 장 루이의 교수 친구가 먼저 자리를 뜨는데 그는 사실 여자친구인 모드를 장 루이에게 떠넘기려는 속셈이었다. 모드도 장 루이에게 호감이 없지 않지만, 이 친구 장 루이는 그저 미적거리기만 한다. 마침내 날이 밝을 무렵 장 루이가 모종의 어떤 행동을 취하지만 모드는 거절한다. 진정으로 원하면 그때 행동하라고.


장 루이는 사모했던 처녀와 가정을 꾸리고 먼 훗날 우연히 해변가에서 다시 모드를 만나는데 그때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된다. 순결한 처녀인 줄 알았던 그의 아내와 진보적인 줄 알았던 그의 교수 친구 모두 비겁하게 불장난을 즐긴 위선자였다. 그에 비하면 겉으로 가장 난잡해 보였던 모드야말로 자기 감정에 솔직했던, 정신과 육체의 욕구에 솔직했던 진정한 자유주의자였다. 모드처럼 실제 삶에서 자유로운 몸과 마음의 모험을 추구하는 이도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사실 그게 힘들다. 그건 너무 번거롭고 때로는 고통스러우며 무엇보다도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유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그건 참으로 멋있는 말이긴 하지만, 아무나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은 아니다. 나는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해본 후에 그게 마음먹은 것처럼 그렇게 쉬운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별을 먼저 요구한 쪽이나 받아들이는 쪽이나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한번 맺은 인연은 쉽게 끝나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마음과 육체를 통해서 봤던 세상의 이미지는 좀처럼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 지쳤다고 느꼈을 때, 그래, 언젠가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누웠을 때 느끼던 그녀의 몸 냄새, 바깥의 소음, 세상이 꽉 차 있는 것 같은 편안함으로 방 안의 사물이 정돈해 있는 듯한 안정감, 그런 것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그 모든 감정이 하찮은 것이며 그저 자기 위로나 욕망의 교묘한 변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장 슬픈 것은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시 그리워질 때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추억은 머릿속에만 남고 현실에는 아무 자취도 남아 있지 않으며 오직 헛되이 돌이키는 일만이 남아 있다.


얼마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덜컥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이 두려워졌다. 지나간 뒤에라야 슬픔이 남는 것일까. 장지에서도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내게 며칠이 지나서야 슬픔이 몰려왔다. 중학교에 다닐 때 학교 뒤편 담벼락을 돌면 외할머니 댁이 있었다. 그곳에서 곧잘 점심을 먹었다. 외할머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는, 외할아버지의 식성을 따라 푹 끓이지 않은, 아직 날김치의 촉감이 남아 있는 그런 맛이었다. 나는 별로 그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외할머니는 늘 더 먹어라, 더 먹어라 말씀하셨다. 외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지만 늘 손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열성이셨다. 외할머니의 우리에 대한 애정은 핏줄에 기초한 애정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이어서 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의 부재감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길고 긴 이별>에는 여주인공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은 잠시 동안 죽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여러 차례 잠시 동안 죽었지만 진정한 이별이 무엇인지 몰랐다. 영화 <쥴 앤 짐>의 카트린이 멋있는 여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영화 말미에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의 실체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냥 깃털처럼 자유롭게 떠도는 삶의 탈주가 아니라 정말로 충만한 관계를 맺고 싶은 열정의 표식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시늉만 했다. 사이비 자유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진정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들과의 소중한 관계를 등한시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심을 나누며 늘 채워져 있는, 나중에도 후회하지 않을 관계다. 그러니 훗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실연을 겪더라도 후회가 없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가족, 연인, 친구 모두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