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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그러타니까 백과사전

by eunic 2005. 3. 3.

그러타니까 백과사전

'그'

소름처럼 화들짝 심장과 영혼에 동시에 돋아난 사람.
은둔한 게이샤처럼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소슬하게 맺혀있던 사람.
너라는 기름을 싣고 평생 힘차게 달려보겠다고 말해주던 사람.
눈에 콩깍지를 씌어준 후 잠시 후 자발적으로 그 콩깍지를 거두어 간 사람.
버선코처럼 뾰족한 팔꿈치를 가진 사람.
라꾸라꾸 침대처럼 의식 속에서 접혔다 퍼졌다 하며 사라지지 않는 사람.
'아무도 그립지 않아...'라고 혼잣말을 할 때 돌연히 떠오르는 사람.
내 불편한 흉곽들만 들추어내며 깐죽거리던 사람.
그래도 죽도록 밉진 않았던 사람.
허밍으로 '번개의 잠'을 들려주던 사람.
폐활량이 유난히 깊어 키스에 집착하던 사람.
'쥐라연합'에서 만난 파시스트.
도발적인 스피닝을 멈추지 않던 판타스틱 턴테이블리스트.
투박한 내 영혼의 과녁에 명중한 화살. 한꺼번에 망가져서 탐이나던, 연두새가 사과를 내밀던, 그게 독사과라고 크게 한번 깨물 수 있도록 내게 용기를 주던, 아직 안 취했을 가능성이 없는, 주술적인 관습을 갖게 만들던 해장국 속에 치유의 양념을 넣어주던, 어디에도 귀의하지 않겠다던 욕망을 불식시키던, 최후를 알아버린 청량한 몸을 가진, 안절부절 못하던 푸른 맥박, 무릎을 베고 누운 평화 붉은 뺨, 붉은 손바닥, 청춘을 허비한 혐의....
그를 잊노라는 건 모두 다 약삭빠른 거짓말, 처음부터 끝까지 간교한 진실... 하나 혹은 여럿.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사람, 혹은 이미 나타난 사람

정유희
출처 <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