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품관

당신은 고양이과, 개과?

by eunic 2005. 3. 2.

"오빤 너무 고양이야" 지난주에 여자친구가 내게 내뱉듯 던진 말이다.

여자친구에게 이런말을 듣는 남자는 두가지 중의 하나이다. 정말 고양이처럼 데면데면하게 굴었던가, 아니면 슬슬 여자에게 차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는 상황이든가. 나야 물론 앞의 경우이다.

사람을 양분하는 여러가지 기준 중에 개과(科), 인간과, 고양이과 인간 예를 그녀에게 설명해 준 것은 나였다.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순전히 경험칙에 가까운 그 분류법에 따르면, 나는 100% 고양이이고, 그녀는 80% 가량 강아지였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만큼의 격차.

내가 고양이를 기르기로 마음 먹기 전까지 난 내 성격이 어느 동물과 비슷한가 하는 문제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10년전 동경 유학 시절에 우연히 접한 어느 TV 다큐멘터리 고양이를 기르기로 결심하는 한 단초가 되었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고양이의 천국이다.)

여기, 혼자 사는 사람이 둘 있다. 한 사람은 강아지를 기르고, 또 한 사람은 고양이를 기른다. 집안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두 주인이 출근을 한다. 화면을 양분해 놓고 시작된 관찰 기록 속 두 동물은 정말 너무도 다른 습성을 보여주었다.

고양이은 주인이 나가는걸 쳐다보지도 않더니, 종일 나름대로 완벽한 스케줄에 맞춰 자고, 놀고, 먹기만 한다. 미리 예약된 비디오가 켜지고 화면 속에 주인이 나타나서 이름을 부르지만 힐끗 쳐다볼뿐. 그렇게 심드렁하던 녀석이 TV 앞으로 후다닥 달려온건, 화면 속의 주인이 녀석이 즐겨먹는 생선 통조림을 꺼내든 순간이었다. 만화 속 '가필드'의 캐릭터는 그다지 과장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양이 쪽 몰래 카메라가 이렇게 버라이어티했다면, 강아지 쪽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출근하는 주인을 쫓아 현관을 서성대던 강아지는 문이 잠기고 혼자 남게되자, 혹시나 주인이 다시 올까 현관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내리 세시간을 처량하게 앉아있는 것이었다.

이 비교 다큐멘터리의 결론은 강렬했다.

혼자 사는 사람이 강아지를 기르는 것은 죄라는 것!

10년 넘게 혼자 살고 있는 내가 고양이를 선택한 것은, 그러니까 고양이가 좋아서라기보단 강아지에게 몹쓸짓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표현하는게 옳다.

지금 나는 '그웬' 이라는 이름의 여섯살짜리 암컷 페르시안과 살고 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 경우는 그웬을 '키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늘 '같이 산다' 고 생각한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편하다.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르던 나도,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 주인이 '이리 와 봐' 하는데 콧방귀도 안뀌던 고양이들의 거만함과 도도함에 화를 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고양이란 동물은 절대로 남에게 키워지는 동물이 아니다.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그웬에게 있어 난, '울음소리와 털 색깔이 조금 이상한, 밤이면 들어와서 맛있는걸 꺼내놓고 아침이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착한, 내집에 와서 이것저것 자꾸 만지고 흐트러뜨리는, 덩치 큰 침입자 고양이' 인 것이다. 물론 사람인 나로써는 그걸 인정하는데에 다소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고양이들에게 '나비야, 이리 와봐' 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녀석들에겐 이상한 울음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 집의 방문자들에게 설명해줄수 있게 되었다.

결국은 관계설정이 문제 된다.

그웬에게 난 밥 주는 고양이겠지만, 나에게 그웬은 늘 같은 표정으로 내 푸념을 들어주는 말없는 여자 친구인 것이다. (실제로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의 95%가 고양이에게 말로 고민을 털어놓는다고 한다.) 고양이와 사람 사이에 종 (種)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런 대타협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고양이와 동거는 그 순간부터 고통이 된다. 특히 봄, 가을 발정기의 암코양이라면 왠만한 인간(?) 여자친구의 징징거림을 뛰어넘는 강도의 인내와 포용력이 요구된다. 그웬의 경우는 이 부분에서 대타협의 한계를 좀 심하게 넘는다. 그녀는 나를 철저하게 수코양이로 여기는 듯 했다. 발정기의 그웬은 슬쩍 쓰다듬기만 해도 밤새 나를 갈구하는 울음을 냈다. 철학적으로야 종을 뛰어넘는 사랑이 가능했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정열이 사그러들기를 기다릴 수 밖에.

다시 인간끼리의 연애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말한 이 습성들을 생경히 여기는 강아지과의 여성이라면, 역시 강아지과의 남성과 결혼하는게 좋겠다.

혹 스스로 고양이과가 틀림 없다고 믿는 분이라도 한번쯤은 강아지 남성과 사귀어 보길 권한다.

가장 주의 깊게 시작해야 할 관계는 양쪽 모두 고양이과인 커플이다.

사랑만 한다면 문제 없겠지만, 결혼이라면 좀 이야기가 다르다.

둘 중 한쪽은 상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3시간쯤 현관문 앞에서 자리를 지킬줄 알아야 하는게 결혼이니까.

최근에는 강아지과인 내 여자친구도 종을 뛰어넘는 이 연애질에 동참했다. 그웬을 질투하기 시작 한 것이다. "오빤 그웬이 좋아, 내가 좋아?" 이봐 강아지 소녀! 우리 고양이 들은 상대에게 그런 걸 묻지 않는다구. 어서 이리와! 철학적으로는 물론, 생물학적으로도 잔뜩 사랑해줄테니!

김일중 (방송작가)
출처: 9월달 보그


나는 개과에 속하는 인간, 고양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명품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퍼온글] 공포  (0) 2005.03.02
B형들을 위한 시  (0) 2005.03.02
김승희의 ''사랑에 빠지다''  (0) 2005.03.02
배꼽을 위한 연가5 / 김승희  (0) 2005.03.02
안팔리는 애들에게 고함, <팻 걸>  (0) 2005.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