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남자에게
한국 남자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유
BY : 김정운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 | 2010.11.25
살다 보면 그런 인간 꼭 있다. 도무지 남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한 이야기 하고 또 해도 매번 같은 자리다. 도대체 어쩌면 이럴까 싶은 마음에 답답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특히 나 같은 교수들이 그렇다. 평생 남을 가르치기만 할 뿐, 남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내 가족의 불만도 마찬가지다. 매번 자기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양 백 마리를 끌고 가는 것보다 교수 세 명 설득해서 데리고 가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이야기도 한다.
의사소통 장애는 교수의 직업병이다. 교수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지고, 남의 말귀는 못 알아듣는다. 이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은 단순하다. 의미 공유가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때, 내가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가 같다고 누가 보장해주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암묵적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부관계가 삐걱대는 이유는 서로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 혹은 섹슈얼리티가 사랑의 의미에서 빠져나가는 중년 부부에게 의사소통 장애는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결혼 23년차인 내게 사랑은 ‘아침식사’다. 아침식사를 집에서 못 얻어먹으면 더는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내 아내에게 사랑은 ‘배려’다.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구체적 관심과 배려가 사랑의 기준이다. ‘아침식사’와 ‘배려’의 의미론적 구조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매번 힘들다.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공유되는 것일까?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통해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지적·논리적 의미의 공유를 가능케 하는 것은 동일한 정서적 경험이다. 엄마의 품안에서 아기는 엄마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한다. 아기가 놀라면 엄마는 같이 놀라고, 아기가 기뻐하면 엄마는 함께 기뻐한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한다는 이 정서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의미 공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연인들이 놀이공원에서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고,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위적으로라도 과장된 정서공유의 경험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함께 구성하려는 것이다.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일수록 이런 정서공유의 경험이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젊어서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애를 한 부부의 이혼율이 높은 것이다. 결혼이 일상이 되면, 그 번잡한 일상에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 경험이 밋밋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변한다.
정서공유의 경험이 가능하려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야 한다. 말귀 못 알아듣는 한국 남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경험에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도대체 뭘 느끼는지 알아야 타인과 정서를 경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 증상을 정신병리학에서는 ‘감정인지불능’(Alexithymie)이라고 한다. 이 증상이 심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결정적인 문제는 판단력 상실이다. 인지능력은 멀쩡하지만 보통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아주 황당한 결정을 하게 된다. 돌아보면 주위에 너무 많다.
멀쩡한 집 놔두고, 토마토케첩만 가득한 달걀토스트를 들고 서 있는, 그 싸한 길거리 기분부터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손님에 대한 아무 ‘배려’ 없이, 펄펄 끓는 물을 부어 만든 싸구려 원두커피에 혓바닥을 델 때의 그 분노가 처절해질 때쯤, 아내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형용사가 다양해져야 남의 말귀를 잘 알아듣게 된다.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라곤 기껏해야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 몇 개가 전부인 그 상태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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