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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잠, 늙은 꽃

by eunic 2010. 12. 14.

[시인의마을] 잠 / 김행숙

눈을 감았다는 것

발가락이 꼬물거리며 허공으로 피어오른다는 것

발바닥이 무게를 잊었다는 것

감은 눈처럼

발은 다른 기억을 가지기 시작한다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

그곳에 속하는

-시집 <타인의 의미>(민음사)에서

[시인의마을] 늙은 꽃 / 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시집 <다산의 처녀>(민음사)에서

[시인의마을] 첫사랑 / 고증식

너무 멀리 와버린 일이

한두 가지랴만

십오 년 넘게 살던

삼문동 주공아파트가 그렇다네

열서너 평 임대에

우리 네 식구 오글거리던,

화장실 문 앞에

세 끼 밥상 차려지고

어쩌다 쟁그랑쟁그랑 싸워도

자고 일어나면

바로 코앞에서 얼굴 맞대던,

이젠 쉬 돌아갈 수도 없는

거기, 마음의 집

-시집 <하루만 더>(애지)에서

고 증 식

1959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

1994년 <한민족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환한 저녁> <단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