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마을] 잠 / 김행숙
눈을 감았다는 것
발가락이 꼬물거리며 허공으로 피어오른다는 것
발바닥이 무게를 잊었다는 것
감은 눈처럼
발은 다른 기억을 가지기 시작한다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
그곳에 속하는
-시집 <타인의 의미>(민음사)에서
[시인의마을] 늙은 꽃 / 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시집 <다산의 처녀>(민음사)에서
[시인의마을] 첫사랑 / 고증식
너무 멀리 와버린 일이
한두 가지랴만
십오 년 넘게 살던
삼문동 주공아파트가 그렇다네
열서너 평 임대에
우리 네 식구 오글거리던,
화장실 문 앞에
세 끼 밥상 차려지고
어쩌다 쟁그랑쟁그랑 싸워도
자고 일어나면
바로 코앞에서 얼굴 맞대던,
이젠 쉬 돌아갈 수도 없는
거기, 마음의 집
-시집 <하루만 더>(애지)에서
고 증 식
1959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
1994년 <한민족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환한 저녁> <단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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