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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함민복의 가난은 왜 짠가?

by eunic 2005. 3. 2.

내가 좋아하는 기자는 한겨레의 권태선 부국장, 권복기 기자, 경향신문의 김택근 부국장, 그리고 '바자'의 김경숙 기자이다.
김경숙 기자의 함민복 시인에 관한 글을 읽고 당장에 함민복 시인의 소금은 왜 짠가 ?라는 산문집을 사고 함민복이라는 사람을 너무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번에 올라온 싸이 인터뷰 기사에서도 김경숙 기자는 싸이와의 입씨름을 벌여 승자가 누구인줄은 모르겠으나 유쾌함을 선사했고 좋아하던 싸이를 여전히괜찮게 생각하는데 일조했다.
패션지에서 그녀는 화려한 화보를제압할 정도로 멋진 글을 선보인다. 내가 알게된 한 사람도 바자를 보면 김경숙 기사 먼저 본다고 한다. 그리고 이글은 김경숙 기자만큼 독특하고도 사랑스러운 함민복이라는 사람이 있어 가장 좋아하는 기사다.

함민복의 가난은 왜 짠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시인을 만났는데 너무 웃었다. 그에겐 사람을 울다가 웃게 만들고, 그러다가 발목을 잡아끄는, ‘뻘’ 같은 신기한 힘이 있었다.

ⓒBazaar 피쳐에디터/김경숙(바자) Photographed by JEON JAEHO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국밥이 한 그릇인데/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박리다 싶다가도/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긍정적인 밥 >


이 시를 처음 읽었던 어느 볼 붉던 봄날, 나는 울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 울었다 하더라도 너무 기뻐서, 너무 따뜻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 눈물나는 시를 쓴,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 시인에게 ‘굵은 소금’ 세 됫박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에 새로 나온 그의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를 세 권 사서 후배 기자들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다음날, 한 후배가 벌컥 화를 냈다. “이 시인은 도대체 왜 이렇게 가난한 거죠? 도대체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가난한 거냐구요? 너무 화가 나서 읽다가 말았어요.” 순간, 나는 소금 주머니를 진흙탕 속에 빠뜨린 것처럼 마음이 상했다. 처음엔 후배의 섣부른 속단을 미워했고, 나중엔 나도 잠시 그럴 뻔한 일이 있었음을 상기했다.
아마도 <눈물은 왜 짠가>의 최대 고비는 33쪽이 아닌가 싶다. 돈 몇백만원이 없어서 ‘죽은버섯이 풍년’인 어머니를 고향 마을 경로당 방으로 이사시킨 후 시인은 속으로 이렇게 뇌까린다. “나란 놈은 대체 뭐하고 사는 걸까. 못난, 못난, 이 못난, 개 같은….” 내 속에서도 뭔가 참을 수 없는 것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겨우 2∼3장을 넘긴 뒤 나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의 자학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이웃 담비네 집 버섯장 안에서 느타리버섯들을 향해 혼잣말을 하는 천진한 사내가 있었다. “너희들도 알지? 이 집에 이제 학생이 세 명이야. 신담비, 신초롱, 신소라. 열심히 커∼어. … 열심히 크라고 했는데 너희들이 대답 없는 것으로 보아, 잘 새겨들은 것으로 알고 나 간∼다. 나는 하얀 맨살 부끄럽다고 갓으로 얼굴 가린 버섯들을 등 뒤로 하고 버섯장을 나선다.” 그 순간 책장을 넘기는 내 손끝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심지어 그 다음 장에서는 제비들이 집을 짓기 위해서 강화도 오지에 혼자 사는 자기 삶을 염탐만 하고는 그냥 날아가버렸다고 시인은 투덜거렸다. 아, 이를 어쩌나. 여기까지 읽자, 그의 가난이 기쁘고 고맙게 여겨지는걸…. 그의 가난한 삶과 그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순한 글들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특혜를 받으며 잘 먹고 잘 사는 나 같은 인간이 달랑 돈 몇천원에 자본주의 가장 바깥에 있는 자의 순결한 정신을 수혈받으니 고마울 수밖에.

강화도 서쪽 바닷가, 버려진 거나 다름없는 폐가에서 집주인의 방임 아래 은근슬쩍 얹혀 살고 있다는 함민복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다행히도 교회 옆, 큰 고욤나무 아래 게딱지처럼 엎드려 있다는 그의 집은 경운기 끌고 가던 동네 농부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칠이 벗겨진 초록색 양철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인은 마실 온 동네 청년과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며 무슨 얘기인가를 살갑게 나누고 있었다. 도회지에서 온 불청객을 위해 동네 청년은 서둘러 떠나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자세의 시인은 취재팀을 구들장 꺼진 작은 방으로 안내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방 안을 둘러봤다. “민복이네 집에 소시지랑 라면 사들고 놀러갔더니 민복이는 어디 놀러나가고 없고, 대신 민복이가 그 누추한 방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시를 써서 걸어 놓았기에 들여다봤더니 시가 기가 막히더라’는 술자리에서 들었던 어느 작가의 말을 떠올렸다. 아쉽게도 그 기막힌 풍경은 볼 수 없었고, 대신 바람 스며드는 벽에 동네 아이들이 그리고 간 그림들이 허술하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숙녀 앞에 자신의 가난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것이 여전히 민망스러운지 마흔 넘은 시인은 내 눈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이렇게 말했다. “원래는 저기 안채에서 주로 지내는데 지난겨울에 보일러가 터졌어요. 그래서 5∼6개월 동안 이 방에서 불만 때고 살았어요.” 그런 그에게 ‘불 때는 거 어렵고 불편하지 않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오. 재미있어요. 마님 앞에서 힘 자랑하는 변강쇠를 상상하면서 장작을 패는 것도 재미있고, 장작의 나이테나 아궁이를 들여다보는 일도 재미있어요. 저 장작의 단면을 보세요. 나이테가 늘어지는 부분이 있고 촘촘한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데 도끼로 그 늘어진 부분을 쳐야 나무가 쉽게 쪼개지거든요. 촘촘한 부분은 아무리 힘을 써도 안 돼요. 그런데 그게 혁명이랑 똑같은 거잖아요. 쉽고 편안하게 늘어져 사는 삶을 쳐내야 혁명이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함민복 시인을 좋아하고 아끼는 문인들이 그의 농가에 놀러오면 그는 문학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제비나 망둥어 따위의 얘기만 늘어놓는다더니 정말 그랬다.
“낚시꾼들은 대개 망둥어 보고 멍청하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제일 용감한 물고기예요. 세월 낚으러 왔다는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면 망둥어가 그 찌를 제일 먼저 물거든요. ‘웃기네, 니가 무슨 세월을 낚아?’ 하면서, 되려 망둥어가 낚시꾼들을 확 낚는 거죠. 죽음 같은 걸 가볍게 아는, 뭔가 초월한 물고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어요. 여기 사람들은 망둥어의 배를 갈라서 말릴 때 약한 식촛물에 헹궈서 널어놓는데, 그러면 파리가 거기에 알을 안 깐대요. 그건 ‘망둥어를 통한 어떤 파리의 사랑 같은 게 아닐까?’ 하는 거죠. 알이라는 게 알카리성이라서 산성에 알을 낳으면 죽는다는 걸 파리가 미리 안다는 거죠. 아무튼 망둥어는 재미있어요. 맛도 있고….”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잠시 얼이 빠져 있었다. 멍청한 망둥어의 용기를, 비천한 파리의 사랑을 얘기하는 저 남자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저 남자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우습고도 엄청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7년 전이었다. 금호동에 살던 시인은 세 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를 내고 이곳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로 흘러들었다. “우연히 마니산에 오르게 됐는데 마니산 아래에 펼쳐진 동네가 너무 예쁘더라고요. 산에는 단풍이 들고, 들판에서는 벼가 노랗게 익고, 파란 바다가 딱 펼쳐져 있는데, 그야말로 유홍준 선생님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말한 삼원색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었어요. 저런 마을에 한번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빈집이 있어서 그냥 무작정 살아버리게 된 거죠.”
시인이랍시고 시집을 내봤자 1천 권 팔기도 힘든 풍토 속에서 1만 권을 팔았던 그는 그때도 나름 잘 나가는 시인이었다. 하지만 출판사 계약금을 받으면 집안의 빚 청산하기에도 바빴던 그에겐 도시에서는 방 한 칸 구할 단돈이 없었다. 충북 중원 태생의 똑똑하고 감수성 예민했던 공고생은 졸업 후 기계 혐오증에 시달리는 핵발전소의 책벌레로 4년을 일했다. 그리고 뒤늦게 서울예전 문창과에 입학했고 결국 시인이 됐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줄곧 서러울 만큼 가난했다. 그래서인지 당연하게도 그의 시들은 주로 가난한 가족사에 대한 고통과 슬픔, 자본주의에 대한 야유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예전에 금호동에 살 때랑, 여기 강화도에 살 때랑 어떤 시적인 변화가 있냐’고 물었다.
“여기 올 때는 뭔가 다르게 써봐야겠다는 느낌을 갖고 왔어요. 김훈 선생님이 한 TV 프로그램인가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무가 한 대목 같은 걸 소개한 적이 있었어요. ‘내일이면 또 나가야 되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저 바닷가로. 죽은 나무를 거꾸로 타고….’ 어부들 얘기죠. 전혀 꾸미지 않은, 정말 훌륭한 시구나! 아, 나도 시로 내 삶이나 이웃들의 삶을 저렇게 쉽게 노래할 수는 없는가 하는 반성을 하던 차에 이곳에 오게 된 거죠.”
강화도 동막리에서의 그의 일상은 전혀 분주할 게 없다. 1주일에 세 번 왕복 여섯 시간 걸리는 버스를 타고 안양으로 강의를 나가는 것 말고는 그에겐 이렇다 할 스케줄이라는 게 없다. 그 나머지 시간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남의 농삿일을 거들거나 주로 술을 마시며 논다. 그렇게 7년을 살았는데 그에겐 여전히 신기한 것 투성이다. “제일 신기한 건 역시 바다예요. 작년엔 병어가 그렇게 잡히더니 올해는 왜 갈치가 잡히는지, 말랑말랑한 뻘의 힘(‘뻘을 걸어가면 힘이 든단 말이죠. 말랑말랑한 게 발을 잡는단 말이죠. 그 말랑말랑한 힘…’으로 시작한 뻘 얘기는 문명에 대한 우회적 비판일 텐데, 그 얘기는 무려 30분이나 계속되었다)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저로서는 너무 신기할 뿐이에요.”
우리에게 예사로 보이는 사실도 그의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는 그 수수께끼로 시를 쓴다. “시는…, 솔직하게 얘기하면 안 되는데…, 아침에 쓰는 것도 아니고, 저녁에 쓰는 것도 아니고, 마감날이 다가오면 써요. 보통 때는 (노트를 보여주며) 이렇게 메모만 해둬요. 가을 물소리, 아궁이 속 쥐, 손금, 무서운 약속….” 시작 메모와 관련해서 그가 들려준 얘기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손금’과 ‘무서운 약속’에 대한 것이었다. “이건 정말 제가 처음 발견한 건데요. 왼쪽 손바닥을 펴보세요. 사람의 손금엔 ‘시’라고 쓰여 있어요.”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정말 그러네’ 하며 신기해 하고 있는데 그는 어느새 ‘무서운 약속’으로 화제를 옮겨 가고 있었다. “한평생 가난하지만 착하게 사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이었는데, 그때 제가 아버지한테 참으로 무서운 약속을 할 뻔했어요.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그런데 그런 말 하면 아버지가 괜히 마음이 약해질까 봐 안 했거든요. 그게 제가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인 것 같아요. 그건 제가 요즘 아버지가 만들어준 손금을 보면서 ‘시만 쓰고 사는데 왜 부끄러운 일이 많아지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죠.”
도대체 바보 같을 정도로 선량해 보이고, 무서울 정도로 통찰력 깊은 이 시인을 부끄럽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그건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을 수도 없’고 ‘어머니 가슴에 못을 뽑을 수도 없’는 ‘지지리도 못나게 살아온 세월’(<가을 하늘>)이었다. 그리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호박’ 같은 자기 존재도 늘 한심하기만 하다. “눈이 나쁜 몇몇 사람들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많이 해요. 제 겉만 보고는, 동심이 남아 있는 것 같고 순진해 보인다고. 그럼 저는 바로 이런 얘길 해요. 그만큼 제가 게을리 살았다는 얘기라고. 현장에서 열심히 살다보면 거짓말도 하게 되고, 때로는 나쁜 일도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저는 열심히 안 사니까 그럴 일이 드문 것뿐이에요.”

그를 만나기 전에 나는 잠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래도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가난한가? ─ 그의 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의 가난은 설렁탕을 먹다가 눈물을 훔쳐낼 정도(<눈물은 왜 짠가>)이며, 하루 여섯 번 개를 죽이면서, 하루 여섯 번 자신을 죽여야 할 정도(한때 산 속에서 형과 짐승을 키워 내다팔던 시절에 대한 시 <여름, 그 무덥던 어느 날>)였다. ─ 또한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한 사람인데 마흔이 넘은 그는 왜 아직 제비나 까치 따위를 기다리며 외롭게 혼자 사는가? 시인을 사랑하는 꿈 많고 선량한 아가씨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래서 나는 급기야 그가 구도적으로 가난과 고독, 그리고 짝사랑을 지향하는 선천성 서정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심각한 질문에 그는 동문서답이나 다름없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한때 특허 내려고 연구를 열심히 했더랬어요.” “무슨 특허요?” “많아요. 콜라 같은 거 반만 마시고 나중에 나머지 반을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투 터치 캔을 만들어 코카 콜라한테 맨날 지는 펩시를 뚫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한때 여자들이 혁대를 늘어지게 하고 다녔잖아요. 그게 되게 도발적인 이미지인데, 그 혁대 끝에다가 가짜 버클을 하나 더 달자는 거죠. 그럼 더 도발적이지 않을까요? 어둠을 켤 수 있는 에너지 같은 것도 생각했어요. 낮에 피곤할 때 어둠을 켜는 거예요. 인공 태양 같은 걸 쏘아 올리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아, 그리고 안 잊어먹는 우산….”
“안 잊어먹는 우산은 어떻게 생겨야 되는 건데요?”
“일단 좀 비싸야 돼요. 한 1백만원쯤. 비싼 건 안 잃어버리잖아요. 두 번째 방법은 우산 살 때 서비스로 우산 그림이 그려진 신발 깔창을 주는 거예요. 그럼 방 나가다가 ‘아, 우산 챙겨야지’ 할 거 아니에요.”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동화적인 상상력을 가진 성인을 실제로는 거의 처음 만나는 터라 아예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꿀꿀하게도 ‘궁핍’이라는 단어와 가장 친밀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 아이러니에 취해 내가 얼굴까지 붉히고 있을 때 그는 불쑥 진심을 말했다.
“돈 벌 능력도 없지만, 그렇게 벌어서 잘 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여기서 동네 친구들 일을 도와주러 다니면서 많은 걸 배워요. 배운 건 시(詩)인데 실제로는 잔심부름을 하는 거죠. 가난하다는 건 뭔가 부족하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원하는 것도 없으니까 실제로는 가난한 것도 아니죠. 그렇죠. 생각이야…. 물론 이런 생각도 해요. 아이고, 한 4천만원만 있었으면 좋겠다. 시골에 가서 집 한 채 사서 어머니 좀 모시게….”
“앞으로도 이렇게 살 작정이라 결혼도 안 하는 건가요?”
“이렇게 살겠다는 여자도 없지만 있다 해도 고생이 될 게 뻔하니까….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내가 사는 방법인데 여자한테 그걸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시에 종종 나오는 ‘나를 버리고 시집간 그 한 여자’를 아직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아, 전혀 아닌데요. 전혀 아니거든요. 그냥 전혀 아니에요.”
몇 번이고 그렇게 아니라고 고개를 젖던 그는 한동안 그 여자에 대한 단발적인 기억들을 더듬었다. “그 사람은 참 순수했던 사람이고…, 손등을 한번 만져봤어요. 여자들 손은 대부분 다 그런데, 참 부드러웠어요. 그런데 그 양반 말이 별로 없는데 재치가 있었어요. 무슨 카페에서 음료수를 시켰는데 제가 알록달록한 빨대를 보면서 ‘청실홍실인가 봐요’ 했더니, 그 여자가 ‘홍동백서 같은데’ 하는 거예요.”

시집가버린 여자야/ 그 바닷가에/ 혼자 나가 당신과 함께 걸어보다/ 엉망으로 취해/ 고향 같던 어머니 같던 당신 같던 풀섶에/ 아!/ 내가 잃어버린 안경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내 탯줄은 썩어 무슨 풀꽃을 피웠는지 ─<내가 잃어버린 안경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중에서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선천성 그리움> 중에서

나는 순간 미안해졌다. 어쩌자고 나는 짝사랑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시인의 ‘흐린 날의 연서’ 같은 추억을 건드렸을까? 그를 두고 다 큰 녀석이 툭 하면 운다고 하던 어느 문인의 말이 기억나, 나는 괜히 딴청을 피웠다.
“이제 봄이네요. 올 봄에는 제비가 올까요?”
“재작년부터 잘 안 오네요. 얘네들이 모여서 날기 훈련을 할 때 보면 그 대열이 여기부터 저 끝까지 한 1백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는데….”
“왜 안 올까요? … 그런데, 제비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거죠?”
뜬금없는 내 질문에 그가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박씨한테 물어보세요. 박씨야, 넌 어디서 왔냐?”
엉뚱한 질문을 엉뚱한 대답으로 받아치고는 그는 금방 시선을 다시 창밖의 고욤나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또 ‘딴 얘기’를 했다.
“허공의 산문가는 제비밖에 없어요. 제비는 한 문장으로 완성해요. 지지베베지지베베…. 저새낀 산문가다! 다른 놈들은 대부분은 그냥 ‘찍’ 하잖아요. 그 산문가가 안 오니까, 분명 시의 시대인 것 같긴 한데, 과연 시(詩)의 시대가 오긴 올까요?”
강화도 동막리에 와서 쓴 1백50여 편의 시는 아직 한 번도 시집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그중 일부가 올해 안에 시집으로 만들어지게 될 것 같다. 고통도 희망도 아닌 산다는 것의 그 뜨거운 긍정을 그가 이곳 강화도에서 어떻게 표현했을지 나는 무척 궁금하다. 그의 그 새로운 시집이 한 10만 권쯤 팔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면 희망적인 절망을 노래하는 이 천진한 시인은 시의 시대가 왔다면서, 그러니 제비 따위 안 와도 좋다면서 헤벌쭉 웃겠지? 나는 그 웃음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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