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륭의 소설에 대해 사람들은 하루에 한장을 읽기도 버겁다고 한다.
어렵다고 하면 더 눈길이 가는 법,
읽어보니떠오르는 게 있으니그것은 무당.
책 제목이 '죽음의 한연구' 였는데 마치 신기가 제법 단단히 들은 무당이 혼을불러내느라 주저리주저리 읊조리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문장들이 어디서 끝나는지 이어지는지 모를정도로 ,,,,
결국에 읽다 포기해버리게 됐다.
예전에 한국일보에서도 어떤 사람이 박상륭의 소설로 평론을 써서 상을 받았는데 이번 경향신문에서도 박상륭의 소설로 평론을 써서 당선이 됐다.
그의 소설에 대해서 쓴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후한 점수를 얻고 있음이 틀림없다. 나도 언젠가는 꼭 이해해야 할텐데...
그나마 읽을수 있었던 책은 "앤더슨씨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은데아마 ....
그 소설만은 박상륭 특유의 무당푸석거리 하는듯한 문장이 아니여서 읽을 수 있었다. 그 소설은아주 재밌게 읽었다.
박상륭씨의 팬이 만든 홈페이지 http://www.ryung.net/
아래 글은 이번 경향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정석 씨의 평론.
브리콜라주로 빚은 잡설의 지형학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와 박상륭의 구도적 글쓰기
-이정석
1.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
박상륭의 소설은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규범적인 근대소설의 형태로부터 멀리 일탈해 있다. 종교적 경전을 방불케 하는 장황한 언설이 연이어지는가 하면, 한편의 학술논문처럼 작품의 말미에 각주를 매달고 있기도 하다. 그의 최근작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이하 ‘신을 죽인 자’로 표기) 역시 가독성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표준적 소설의 영토를 훨씬 벗어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소설로서 인정할 수 있는 근거는 우선 문학이라는 제도적 장(場, champ)이 부여한 소설이라는 장르적 표지에서 찾을 수 있다. 뒤상(Marcel Duchamp)의 ‘샘’은 제도적 권능이 예술과 비예술을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임을 충격적으로 폭로하고 말았다. 어쩌면, 박상륭 텍스트도 문학장을 지배하는 제도적 권능의 힘을 가시화하는 또 하나의 ‘샘’일지 모른다.
한국문학이 가지 못한 미답의 영역을 개척한 커다란 발자취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박상륭의 소설은 한국문학의 제도적 장에서 철저히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박상륭은 거장이라는 신성한 권위를 획득한 채 스스로가 제도적 장르 범주를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산해기’가 ‘산문’을 표방하고 있는 데 비해, 그 속편인 ‘신을 죽인 자’는 ‘소설’의 표지를 달고 있다).
물론 ‘신을 죽인 자’가 단순히 문학장의 승인으로 인해 소설로서 인정받는 것이라면 다소간의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끝내 그것을 소설로 인정한다면 근대 소설미학의 지평에서 박상륭 소설의 텍스트성을 주의깊게 논의해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박상륭의 소설이 한국문학의 넓이와 깊이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인가? 규범적 소설 형식의 전복을 통해 탄생한 파격적 글쓰기의 심층에 자리잡은 작가의 내밀한 욕망은 무엇인가? 그 파괴와 전복은 진정 문학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바람직한 고투인가? 너무나 낯선 박상륭 소설의 텍스트성의 지리를 밝히지 않고서,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다발에 대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문학장에서 예술적 권위를 인정받으려면, 기존의 문학적 관례를 존중해야 하는 동시에, 그것의 파괴와 변용을 통해 자신만의 새로움을 창출해야 한다. 그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상실한 채 기존의 문학적 관행을 과도하게 답습하게 되면 상투성이라는 공격이, 지나치게 혁신적일 때는 난해하다는 비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 작가가 계승과 단절, 파괴와 창조의 그 역설적 딜레마 사이에서 균형을 획득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은 일이다. 기존의 문학적 관습이 기반하고 있는 근본적 토대마저 급격히 해체하면서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상륭의 소설 텍스트에는 선행 텍스트들의 상호교차 현상이 눈에 띄게 빈번히 목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차용과 변용 속에서 혁신적인 새로움을 생성시키는 능력, 자족적 소우주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의 경계도 없이 뻗어나가는 드넓은 우주. 우리는 박상륭의 텍스트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으리라.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ouroboros)처럼 명확한 단절선을 그을 수 없게, 선행하는 텍스트와의 상호 교섭과 변용 속에서 태어난 텍스트.
2. 니체적 박상륭, 그리고 비니체적인 차라투스트라
박상륭의 텍스트는 근대소설이 구축해놓은 장르적 관습을 해체하고 변형하며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때 그의 텍스트는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이질적 담론들을 끌어안아 심원한 우주적 사유를 키워내는 구도의 발현체가 된다. 최근작 ‘신을 죽인 자’에서도 박상륭은 다양한 담론들을 융합하여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문학적 개성을 발산하는 텍스트를 창조해내고 있다. 자신의 소설을 “자기의 것이거나, 빌려온 남의 것이거나, ‘해묵은 포도주를 새 부대에 옮겨 담기’”라고 지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종교의 경전과 신화는 물론 다양한 소설들이 새로운 텍스트 형성의 중요한 자산으로 활용된다. 따라서 기존 담론 영역 사이의 경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잡다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요소들을 씨줄과 날줄로 텍스트를 직조하는 브리콜라주(bricolage)는 박상륭의 소설세계를 구축하는 효율적 기제의 하나로 지적될 만하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신을 죽인 자’는 차라투스트라의 행로를 따라 서사를 구축해 나가지만, 서사라인은 발화들을 배열하는 배치선의 역할에 그치고 만다. 이처럼 서사적 형상화의 과정이 대폭 축소된 대신 차라투스트라의 자문자답과 늙은 성자의 설교, 그리고 패관자의 요설이 어우러져 텍스트성을 이루게 된다. 이때 그 안에는 문학작품과 종교적 경전과 철학적 사변이 뒤엉켜 혼재하므로 상호교차하는 텍스트들에 유의하지 않으면, 박상륭의 소설을 향해 가는 길은 그만큼 더 험난해진다. 더구나 ‘신을 죽인 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차라투스트라’로 표기)의 패러디라는 점에서 차용과 변용이 가져오는 유사성과 차이에 민감해야 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인류를 위한 새로운 ‘복음서’라고 칭하면서 당대의 위선적인 문화에 대한 전복을 감행한다.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피안의 세계를 참세상이라 여기는 반면에, 현세를 죄와 거짓에 가득 찬 곳이라 단죄한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참된 삶이 피안에 있다고 보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문화는 자기 삶의 주체로 서지 못하는 무력한 노예적 인간만을 양산할 뿐이다. 따라서 그는 초월적 세계를 상정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체계를 창출하기 위해, ‘몸과 지상적 욕망을 긍정하는 삶’을 드높이 외친다. 박상륭 역시도 외적 존재에 의존한 타력적 구원을 부정하고, 차안과 피안, 성(聖)과 속(俗), 존재와 세계가 일체화된 세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니체적 사유를 공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정될 수 있음직한 그와 같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신을 죽인 자’에서 박상륭은 사유의 근친관계를 언급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니체의 입장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다.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이 갑작스런 변모의 이면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알다시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가치를 전도시키는 초인사상을 설파하기 위해 ‘상승을 위한 몰락’의 하산을 했다면, 박상륭의 “차라투스트라는 다시금 인간이 되려고” 하산해서 자탄을 위해서만 입을 연다. 그래서 니체적인, 너무나 니체적인 박상륭이 창조한 차라투스트라는 회한과 탄식을 읊조리며, 대단히 비니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텍스트는 하산 도중에 만난 늙은 성자의 입을 빌려 지난날 차라투스트라의 과오를 낱낱이 들춰낸다. 그 비판의 골자는 “대지에 충실하라”(‘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의 복음이 현대문화의 타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박상륭이 보기에 니체의 철학은 형벌의 땅을 축복의 땅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 찰나적 쾌락에의 탐닉을 정당화함으로써 “축생도(畜生道)의 성시”를 야기하는 근원일 뿐이다. 아울러, 초인조차도 인간 자신을 극복한 존재라기보다 “‘초동물(超動物)’에로 몰락”한 그 무엇에 불과하다. 결국, 몸을 중심축으로 한 사유는 “몸을 부유하게 하는 교의” 물신주의의 범람과 무뇌의 존재, 즉 개아(個我)가 소멸된 ‘대중’이라는 이름의 독룡(毒龍)을 낳음으로써 나락으로의 함몰만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뇌의 대중이 아편에 중독되어 자기를 잃어버린 ‘열명길’에 나오는 우중(愚衆)이자 비판이론가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가 비판해 마지않는 ‘일차원적 인간’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시조 차라투스트라의 니체적 변용이 당대 문화에 대한 일전의 도모이듯이, 니체적 차라투스트라의 박상륭적 재변용은 천박한 현대문화와의 투쟁을 위한 서사적 방책이다. 좀더 상세히 말하면, 박상륭의 새로운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적 사유와 대척적 위치에 서서 현대의 병리적 문화현상을 통렬히 비판하며 문화적 대전환을 도모하려는 염원의 매개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나 제임슨(Fredric Jameson)의 견해를 빌려 표현하자면, 박상륭의 소설에는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결’하려는 열망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많이도 범해져 있을 오류, 오독, 곡해 등은 패관의 학식의 짧음” 탓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전략적인 글쓰기의 소산이라는 심증을 굳힐 수밖에 없다.
차마 내려다볼 수가 없어, 구름으로 얼굴을 가렸던 해가, 그의 주검까지도 외면할 수가 없었던지, 구름 틈새로 내려다보며, 주검 위에 놓이는 꽃처럼, 붉은빛으로 감쌌다. 그 주검은, 물과 물이 맞닿는 자리에, 달마(達磨)가 둘러놓은, 달마의 금색(禁索)에 꿰어진, 숯처럼 꺼먼 색깔의, 마른 고추 하나였다. 그것은, 한 죽음의 탄생을 고지(告知)하고 있었다.(378쪽)
차라투스트라는 “더불어 창조할 자,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판에 써넣을 친구”(‘차라투스트라’)가 있을 성 싶지 않은 가치 불모의 속(俗)적 공간 ‘시장’에서 자아가 없는 ‘대중’들의 돌팔매에 쓰러진다. 박상륭은 그 주검을 “아들이 어미 품을 파고들며, 늙은 어미가 어린 남편으로부터 젊음을 수혈하는 자리”, 즉 죽음과 삶이 넘나드는 경계선 상에 눕힘으로써 현대문화의 재생과 구원을 절실하게 갈망한다. 물론 ‘유리장’에서의 사복(蛇福)의 거세와 공동체 내공간으로부터의 배제나, ‘죽음의 한 연구’에서 외부로부터 유리의 내부로 들어온 육조의 구도적 죽음이 보여주듯이, 내공간으로 들어온 외부적 타자의 죽음을 통한 공동체의 재생이 박상륭 서사미학의 발현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요소라는 것이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를 번제(燔祭)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매독 걸린 늙은 대지”와 다를 바 없는 현대문화를 정화하려는 모습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거듭 확인하게 된다. 박상륭의 구도적 글쓰기가 근대예술이 잃어버린 제의적 기능을 복원하려는 강렬한 의지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당연히 “일상적 언어로 표현되는 구체적 영상(concrete image)만이 실사적(實事的-Rupa, 色)이어서 의미가 있는 것인 듯, 주장하는 근대 사실주의 소설에서 멀리 비켜나 인간의 존재론적 비의와 우주적 진리를 계시하려는 소설적 경향도, 예술의 제의적 기능의 복원이라는 맥락을 고려해야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3.수(獸)와 신(神)의 존재론
문화적 타락을 불러온 원흉이라는 비판의 칼날을 니체의 심장에 꽂음으로써 들려주려는 박상륭적 복음의 메시지는 ‘신을 죽인 자’의 텍스트성을 이루는 핵일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텍스트를 가로지르는 인식론적 지반이라는 점에서, 주의깊게 탐색할 필요가 있는 화두다. ‘신을 죽인 자’는 서사성의 물기가 증발해버린 마른 늪과도 같다. 대신 늙은 성자와 패관자(稗官者)의 일방적 발화가 빈약한 재현적 서사의 물줄기를 벌충해 나간다. 소설적 형상화보다 철학적 종교적 신화적 성찰과 논리적 사유가 어우러진 비재현적 서사축이 전체 텍스트의 형식적 의미적 구도를 좌우하는 텍스트. 지금부터 그 텍스트성의 비밀을 탐색하기 위해서, 먼저 의미 발생의 주요한 원천이 되는 비재현적 서사축에 주목하여 박상륭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인식적 지도를 그려나가 보기로 하자.
아이로니컬하게도, 박상륭 사유의 시원(始原)은 육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육체성에 천착하여 육체의 초월을 모색하고 다시 육체를 기반으로 ‘마음의 우주’를 정관(靜觀)하려는 사유! 그에게 육체란 한 몸에 두 머리를 가진 바룬다새와 같은 양면성을 지닌 존재다. 우선 육체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감옥’으로 다가온다. 손자와의 권력투쟁도 마다하지 않다가 결국 아들, 손자와 함께 탑에 갇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혈육의 육신을 몽땅 뜯어먹은 우골리노 백작, 지상의 어떤 “고뇌에도 지지 않던 나도 배고픔에는 지고 말았다”(‘신곡’)는 그의 처절한 절규. 그리고 육욕을 참지 못해 개 흉내를 내면서까지 딸에게 몸을 구걸하다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만 개만도 못한 저 설화 속 아비의 떨칠 수 없는 본능. 저 수적(獸的) 인간들의 초라한 모습은 “육신이야말로 지옥 자체”(‘로이가 산 한 삶’)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실감나게 예증한다. 동시에 박상륭의 텍스트에서, 육적 교합과 살해 모티브로 전경화되는 비천한 육체는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전화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로서, 성스러운 정화를 통한 구도의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물적 본능의 집약체인 “육체야말로 진화를 위한 필수조건”이 되기도 함을 깨닫는다.
인간은 육체를 “진화의 역동적 도약대”로 삼아 축생도(畜生道)의 부정성을 순치하는 육신의 진화를 거쳐 ‘문화도(文化道)’, 라캉(Jacques Lacan) 식으로 표현해서 상징계의 영역으로 도약하게 된다. 물론 상징계의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상징계를 유지하는 법과 질서를 수용함으로써 자연적 본능(육체)을 일정하게 제어해야만 한다. 그런데 상징적 질서에 의한 자연적 본능의 억압은 필연적으로 소외와 결핍을 낳게 마련이다. 그 소외와 결핍을 메우려 인간은 물질주의에 탐닉하거나 피안의 존재를 갈구하게 되지만, 이는 박상륭에게 개아(個我)가 소멸된 비주체적 삶의 추구라는 점에서 ‘역진화’라는 비판의 표적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박상륭은 인세(人世)라는 상징계의 한계와 결여를 어떻게 극복하려 한 것일까? 라캉이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죽음, 즉 주체 소멸의 방향에 열어놓고 있다면, 박상륭에게는 오직 해탈만이 참된 길로 지향된다. 해탈? 인간 내부에는 “밖에 있는 것과 꼭 같은 한 벌의 우주가 고스란히 차려져 있다”고 한다. 박상륭에게, 인간이 짐승스럽기도 하고 신령스럽기도 한 존재라면, 해탈이란 바로 그 내면의 우주 발견하기라 말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해탈은 ‘지상적 존재로서의 존재성의 철저한 자각과 자기 내부의 신성(神性) 깨닫기’라고 풀이할 수 있다. 개아(個我)로 태어나 민중의 염원을 담아 대아성(大我性)을 획득한 인신(人神)적 존재, 예수는 그 해탈의 경지에 이른 보살의 전형적 존재다.
결국 박상륭이 주창하는 보디사트바(菩薩, Bodhistattva)도, 자기를 무한히 확장하여 우주 만물의 근원적 원리로서의 도(道), 혹은 진리를 구득(求得)한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가 예술에 비해 종교를 한 단계 윗길로 평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예술이 “인간이라는 유정이 축생도를 극복한 총계”(‘칠조어론’)라고 해도, 상징계의 언어는 사물의 참된 실상을 포착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도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는 말이 상기시키듯이, 언제나 상징계의 언어는 궁극적인 진리의 거처인 실재계(The Real), 혹은 공계(空界)를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그럼에도 선적(禪的) 비유법이나 우파니샤드의 부정어법은 상징계적 언어의 한계를 딛고 표현될 수 없는 충만한 진리로서의 실재를 온전히 드러내려는 각고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그동안 박상륭이 보여준 글쓰기 역시도 상징계의 언어가 지닌 숙명적 한계를 돌파하여 우주적 도에 더 가깝게 다가서려는 힘겨운 노력의 일환으로 인정될 만하다. 그 과정에서 변화무쌍한 언어의 파도에 실어 나르는 광대한 사유의 폭과 깊이는 우리를 경외와 찬탄으로 이끌리게 한다. 그리고 그 광활한 우주적 서사공간 속을 유영하는 독자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을 도야하며 진리에 한층 접근한 듯한 희열을 맛보게 된다. 따라서 구도적 글쓰기는 고통을 매개로 작가와 독자의 상호소통을 도모하는 고통과 희열의 미학이라 칭할 만도 하다. 박상륭은 ‘아으, 누가 이 공주를 구해낼 것이냐’에서 자신의 글쓰기가 휘황한 물질주의의 시대, 대중 추수주의의 늪에 빠져 신음하는 ‘시의 여신’을 구하기 위한 고투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품미학의 논리에 빠져버린 소설에서 문학의 위기를 읽을 수 있듯이, 도의 사변적 개진을 통한 소설의 도구화에서도 근대 소설문학의 균열을 감지할 수 있다.
4.초인의 몰락 속에 떠오르는 숭고의 그림자유기적으로 짜여진 재현적 서사축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신을 죽인 자’도 근대소설의 인과적 통사원리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차라투스트라의 하산-늙은 성자와의 만남-군중과의 조우와 피살-모래톱에의 매장’으로 이어지는 유기적 사건의 연쇄망을 추출해낼 수 있다는 면에서, 근대소설의 문법을 따르고 재현적 근대소설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신을 죽인 자’에는 재현적 서사축과는 이질적인 비재현적 서사축이 독특한 소설적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다. 더 이상 유기적이고 안정적인 텍스트성을 거부하고 재현적 서사가 본격적인 구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전체 텍스트의 구도를 미리 결정해버리는 비재현적 서사축이야말로 철학적 종교적 신화적 담론들을 한 덩어리로 농축시키는 용광로가 되어, 재현적 서사원리에 기반한 근대적 소설양식을 와해시킨다. 이처럼 박상륭의 소설은 근대 소설미학적 관점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표현형식과 존재방식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의 예술과 학문은 각 영역의 엄밀한 구분과 경계의 설정에 기초한다. 소설문학 역시도 타 영역과의 차이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기에, 근대적 합리성에 입각한 그와 같은 경계짓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박상륭은 자신의 소설을 ‘잡설(雜說)’이라고 지칭하며 의도적으로 그 경계를 해체하려 든다. ‘신을 죽인 자’에서는 그 경계의 해체가 작가와 서술자와 인물의 통합으로 실현된다. 그로 인해 작가와 서술자, 서술자와 인물의 차이가 무화되어 그 구분이 무의미해 보일 정도다. 늙은 성자도 서술자도 작가 자신의 분신에 불과해 보인다. 심지어 차라투스트라조차도 늙은 성자의 부정적 짝패로서 그 언설의 정당성을 증거하는 존재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정도다. 이와 같은 폐쇄적 동일화는 초월적 심급에서 그 모두를 관장하며 서사를 견인하는 초월적 존재를 상기시킨다. 텍스트를 종횡무진 누비는 ‘패관자(稗官者)’는 바로 그 초월적 존재를 지칭하는 이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아니면 신통하게도 자가옷 거리는 튀어나가 흙에 버무려져 고물떡이 되었는데, 그 흙 밑의 개미귀신 한 마리가 낮잠 자다 날벼락을 맞고, 이 씨부랄누무 늙은탱이, 지옥에 빠져 피를 빨리고 싶어 환장을 했댜 어쨌댜? 하고 눈을 희게 떠 부라린다, 라든, 에잇 쏵하다, 쏵해! 돌? 소설(小說)하기의 잡(雜)스러움!
‘그리고 늙은네는 다시 이어 이렇게 말했(도)다’ 그 사잇소리를 넣어야 할 차례인 것…(중략)… 말이 많도다. 뒈진 좆맹이, 패관꾼은 좀 가만히 자빠져 있으라고시나!(148쪽)
패관자는 초월적 위치에서 글쓰기를 행하고 있는 현재의 자기 자신마저 굽어본다. 여기서 우스운 이야기와는 다른 프로이트식 ‘유머’, 즉 자기 확신을 지닌 뭔가 위대한 정신적 포즈를 읽을 수 있다. 패관자는 언뜻 자기비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근대소설의 맹점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그것의 확장과 변형인 ‘잡설’을 통해 우주적 신비의 끝 너머까지 정관하는 듯한 오만함을 감추고 있다. 이처럼 살입음의 감옥에 갇힌 인간의 숙명적 유한성을 희롱하며 도의 세계로 내달리는 패관자의 태도에서, 우리는 숭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재현적 서사축에서 발산하는 짙은 비애감은 숭고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억제치 못할 식욕에 걸인의 동냥밥과 하초가리개를 바꾸고 벗음의 부끄러움으로 인해 “자꾸 무엇이 민망”해 어찌할지를 몰라하는 장면이 상기시키듯이, 재현적 서사축은 차라투스트라가 초인(超人)에서 인간(人間)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동물적 인간으로 몰락한 차라투스트라의 자탄이 야기하는 비애는 초인을 무너뜨린 또 다른 거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비속한 언어에 묻어나는 익살스러움도 그 이면에서부터 뿜어나오는 숭고의 빛을 어쩌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이 자아내는 비애의 파토스는 숭고의 별빛을 더욱 빛나게 하는 어두운 배경과도 같다. 이처럼 비재현적 서사축이 재현적 서사축을 압도할 때, 재현적 서사가 초월적 심급에 존재하는 패관자의 이념에 수렴되어 그 정당성을 서사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 소설양식의 해체와 일탈이 지닌 의미를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해체가 근대적 합리성에 의해 불순한 것으로 간주되어 배제된 것을 포용하며 서사의 영토를 확장하는 미덕과 함께, 타 영역으로부터 예술의 자율성을 지켜주던 방패막이를 제거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5. 구도의 서사를 넘어, 다성적 서사를 위하여
문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문학적 글쓰기는 어떠해야 하는가? 언뜻 너무나도 자명해 보이는 것 같은 물음이지만 그에 대한 쾌도난마(快刀亂麻)식 답변이 아직 우리 손에 주어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잡식성의 장르, 소설의 본질을 명쾌하게 정의하기란 얼마나 난처한 일인가. 그럼에도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소설의 문법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거운 관념의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텍스트 ‘신을 죽인 자’, 이 관념의 굽이굽이를 넘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 하나, 과연 이것이 소설일까? 하는 물음을 금방 우문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소설의 본성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소설의 본성은 이런 발언을 가능하게 한다. 고정된 형태로 남아있기를 거부하고 끊임없는 형식 실험으로 자기 갱신을 도모하는 장르가 바로 소설이라고, 그래서 구도적 글쓰기가 보여주는 규범적 소설문법으로부터의 일탈과 변이는 가장 소설의 본질을 잘 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에 더해 관념적 사유의 무거움을 한층 경쾌하게 전달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끝없이 이어지는 쉼표의 징검다리가 만들어내는 유려하고 탄력있는 주술적 문체는 마치 문학적 언어는 이런 것이라는 것을 시위하는 듯이 그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 변이와 탈주의 와중에서 서사성이 빈곤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시선도 그저 단순한 우려에 불과할지 모른다. 더욱이 근대소설의 전개가 서사성을 지우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음에 비추어본다면, 관념성에 대한 우려를 접고 구도적 글쓰기를 근대소설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시도로 인정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잠깐 그에 대한 찬탄을 멈추고, 그 변이와 탈주가 몰고올지도 모를 또 다른 역풍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박상륭의 사유공간에서 참다운 예술은 종교적 예술, 즉 구도적 행위의 매개체로 기능하는 예술이다. 그는 근대예술이 영혼의 구원을 성취하고자 원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힘이 되지 못하고 해탈을 도모하는 정신에 대해서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이 비판에는 진리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예술의 자율성 운운하며 심미성을 추구하는 근대예술의 발전방향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은 근본적으로 감성의 한계와 개념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존재와 세계의 참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고, 미리 특정한 관념이 전제되고 상상력은 단지 그것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에 머문다면, 그때의 문학은 관념의 종속물에 불과하게 된다. 사변적 언술이 서사성을 흡수해버리는 텍스트, ‘신을 죽인 자’ 앞에서 그러한 염려를 하는 것이 지나친 우려만은 아닐 것이다.
근대의 서사문법 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신화적 관념성은 박상륭 소설의 고유한 미적 자질을 형성하는 주선율로서, 그의 우주적 사유를 한층 장엄하게 물들인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여기’의 문제를 사회적 메커니즘의 심층적 맥락까지 고려하면서 풀어내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로이가 산 한 삶’으로부터 ‘왈튼씨 부인이 죽은 한 죽음’을 거쳐 ‘미스 앤더슨이 날려보낸 한 날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작에서 볼 수 있듯이, 박상륭이 현대문명의 병리현상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구도적 글쓰기가 이 시대의 문제성을 정공법으로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그 비재현적 방식을 공허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그럼에도 구도적 글쓰기가 근대 서사양식의 미덕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상상력과 관념이 행복하게 조화를 이룬 새로운 서사양식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신이 요구된다. 대화체의 의장에도 불구하고, ‘신을 죽인 자’는 초월적 심급에서 특권적 권능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 패권적 존재로 말미암아, 전체 텍스트가 일방적인 독백적 설교로 전락한다. 이처럼 근대적 계몽의식과 비견됨직한 독단성을 과도하게 내장한 글쓰기란 타자적 요소들을 배제하고 차이와 소통을 무화시킴으로써, 항상 도(道) 아닌 도그마로 전락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타자적 지평 속에서 진정한 대화성을 복원할 때, 비로소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구도적 글쓰기가 절대적 존재를 정점으로 한 동일성의 제국이 아니라 다성적 서사의 세계를 열어 보이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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