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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우리는 왜 여기서 문학을 하는가

by eunic 2005. 3. 1.

우리는 왜 여기서 문학을 하는가

작년 11월경 연구실로 한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불문과 졸업반 학생이었는데 졸업을 한 뒤에 대학원 불문과에 진학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의대를 다시 다녀볼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다. 의대에 다녀볼까 하는 그의 고민은 후진국의 대학생으로서 말장난과 같은 문학 따위는 공부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것에서 생겨난 모양이다. 이제 다시 입시 준비를 하여 의대에 들어 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학을 가지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는 것같다.
차라리 의대를 나와 무의촌에서 한 사람의 의사로서 성실하게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생각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나로서는 소위 일류 대학이라고 알려진 학교를 나와서, 일류 회사에 취직한 후, 부잣집 처녀에게 장가를 가서 편안히 삶을 유지한고 싶다는 유혹에 그가 빠지지 않고서, 다시 말해 편안한 익명의 기능인이 되는 대신에, 자기에게 교육을 시켜준 사회에 무엇인가 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것 같아, 그의 고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것이 사실 얼마나 필요한 고민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그러나 문학을 포기하는 것과 문학을 전공으로 삼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며, 어느 분야에서 공부를 하든 문학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되풀이 표명된 것이지만, 문학은 써먹을 수가 없다는 것을 그 중요한 특징으로 갖고 있으며, 그 써먹을 수 없다는 문학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데, 바로 그것이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힘에 대한 감시체의 역할을 문학으로 하여금 맡게 하는 것이다.
그 문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이름 밑에 오히려 인간을 어압하는 세력에 봉사하게 될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더구나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관념 자체는 그 봉사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의 지적 우월감을 나타내기 쉬우며, 그 우월감은 봉사의 성과가 쉽게 나타나지 않을 때, 자기가 봉사한 인간들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기가 쉽다.

문학을 전공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문학을 포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문학을 전공으로 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학의 기본 정신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의 행위는 몸으로 쓴 문학이 될 것이며, 그가 만일 쓴다면 그가 쓴 일기는 펜으로 쓴 문학이 될 것이다. 문학을 완전히 버릴 수 있다는 것은 결국은 인간을 억압하는 힘에 대한 반성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그에게 한 말은 대체로 그와 같은 것이었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 선생님의 글입니다>

나무꾼님의 글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해서 올렸습니다.
글의 출처는 퍼온 것이라 제목이 맞는지, 어느 책인지 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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