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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나무꾼 님 블로그 ''문학에 대해서''

by eunic 2005. 3. 1.

"인생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엔 너무 길지만 무엇인가를 이루기엔 너무 짧은 것인데 나는 내 재능을 허비했다."

"보고 있지 않은 듯 하면서도 하늘은 역시 모든 것을 보고 있었구나."

둘 다 일본의 소설가 나카지마 아쓰시의 소설에 나오는 말들이다. 앞의 말은 얄팍한 자존과 과도한 自己愛 때문에 정작 봐야 할 것을 놓쳐버린 자의 한탄이니 삶의 자세에 관한 것이겠고, 뒤의 것은 역사 앞에서 사람은 한 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고 정직해야 한다는 충고로 읽혀진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는다. "여기 이 소설, 직접 경험한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도 좋은 경험을 많이 하셨는데, 왜 자신의 그런 좋은 경험을 소설로 쓸 생각은 안 하고 다른 것만 쓰시죠?"

나의 친척이며 인척 그리고 선배며 후배들은 또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나무꾼은 왜 하나도 안 유명하면서 굳이 소설을 쓴다고 그렇게 고생을 하는 거지?

그 어떤 질문도 의문도 납득시킬만한 답을 나는 갖고 있지 못하다. 소설은 수필이 아니다. 개인의 경험이 소설의 동력은 될 수 있겠지만 소설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거대한 세상의 형편없이 초라하거나 혹은 터무니없이 화려한 존재들 앞에서 몸을 떨고 있을 때 계시처럼 문득문득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이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서 재구성해낸 것, 그것을 우리는 아마 소설이라 말하는 것일 게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그러한 매력을 탐지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소설 따위를 쓰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개인의 경험을 소설화하는 것도 물론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지간히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제법 팔리는 소설이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대단히도 유치한 작업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 거대한 세상의 작은 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거대한 세상 자체일 수도 있다. 그 무한한 가능성을 포기한 채 장사꾼으로 나서야 할 그 어떤 이유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부분과 전체>의 저자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의 저 유명한 가스실에서 인생을 터득한 사람이다. 그가 만일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었다면, 부분에 집착했더라면 죽음의 직전에서 공포로 오들오들 떨기나 했을 뿐 전체를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을 사유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완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인식을 갖지 못하는 한 그는 늘 불안해한다. 불안한 상태에서는 전체를 볼 수가 없다.

공산주의의 현격한 퇴조 이후 사유화경향은 어지러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公私 구분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권력은 이미 사유화되었고, 공적인 마당에서 사적인 감정을 챙기는 풍토가 상식이 되었으며,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시무시한 이기주의는 종종 인간의 장기까지를 요구한다. 조만간 영혼을 매매하는 집단이 출몰할만도 하다. 이런 세상에서 문학이 어찌 장사나 하고 있을 수 있으랴.

일부에서는 문학의 죽음이 어떻고 잠꼬대 같은 소릴를 하고 있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사물화되고 시뮬레이션화되는 이 시대야말로 어쩌면 문학이 문학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제 얼굴을 내놓을 적기가 아닐까.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것이 문학이라는 사르트르류의 증언이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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