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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이프] ‘그 때 그 남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by eunic 2005. 2. 28.
‘그 때 그 남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빼어난 남성 젠더 텍스트,「그 때 그 사람들」
<이프>, 2005년 봄호/ 정희진

인자한 할아버지, 박정희
「그 때 그 사람들」을 보고 나서, 왜 박정희 전 대통령 진영이 이 영화에 분노하며 재판까지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박정희 역의 배우 송재호는 독재자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실제 영화에서도 송재호가 재현하는 박정희는 유머스럽고(죽는 순간에 “또 쏠라꼬?”,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낭만적일 뿐 아니라(감상적인 엔카에 흠뻑 취해 있다), 관대하며(부하의 섹스 스캔들을 눈감아 준다), 심지어 인자하기까지 한다.
어딜 봐도 ‘명예를 훼손한’ 흔적이 없다. 송재호의 박정희는, 독한 카리스마에 ‘민족정기’ 넘치는 색마라는, 내가 생각했던 기존의 박정희가 아니었다.
앞으로도「그 때 그 사람들」보다 박정희가 좋게 나올 텍스트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이 영화가 보수 세력의 화를 부른 이유는, “역사 왜곡”이나 “노무현 정권의 어떤 정치적 의도”가 아니라, 순전히 박정희의 여자 문제 때문이다.
‘박정희의 인권을 위해’ 가위질 당한 채 상영되고 있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은(따라서 원래 첫 장면이 아닐 수도 있다), 벌거벗은 여자들과 중앙정보부 요원들 사이의 안면 몰수의 천박한 대화이다.
사람들은 대통령의 섹스를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정당성과 도덕성의 징표로 이해한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해석 투쟁에서, 섹슈얼리티와 젠더는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주요 모순이다. 종속 변수가 아니라 독립 변수인 것이다.
박정희의 유일한 ‘치적’인 경제 발전은, “유신이 이룬 것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이 일한 것”으로 쉽게 반박이 가능하다.
그러나 섹스 문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영웅은 호색이지만’, 그건 들키지 않을 때 얘기다. 가족주의 규범이 강력한 한국사회에서, 최소 100여명의 여성들이 항상 대통령을 위해 대기했다는 역사는 국민에게 역겨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섹슈얼리티는 박정희 담론의 핵심 모순
가부장제 사회에서 계급은 젠더화되고, 젠더는 계급화된다.
계급과 섹스는 서로 맞물리고, 동시에, 성별에 따라 정확히 반비례한다.
권력을 가진 남자는 여러 여자와 섹스 할 수 있지만, 권력이 없는 남자는 한 명도 차지하지 못해 한 여자를 여러 남자와 공유한다.
반대로,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한 남자와만 섹스를 하고, 밑바닥 인생일수록 여러 남자를 상대하게 된다.
「교양」과「남자」의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여성을 동산(動産)으로 보는 남성들은, “강한 보스만이 집단의 생식권을 독점하며 열등한 수컷들은 우울한 기분으로 비실비실 보스의 주위를 맴돌며 전복의 기회를 엿 본다”는 시나리오를 통해 성역할을 학습한다고 본다.
이러한 긴장과 경쟁은 가족 제도가 고안된 후 완화되는데, 가족 제도 안에서는 원칙적으로는 모든 남자가 생식의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 격차는 다시 일부일처제를 무력화시킨다).
성공한 중년 남성들이 젊은 여성에게 집착하는 것도, 그녀의 몸 때문이 아니라 능력 있는 남자는 새로운 세계를 구하여 젊은 여자 앞에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나이든 아내에게는 이미 그렇게 했기 때문에 새로운 인생 목표를 찾는 것이다. 늘 영화로 재현되듯이, ‘보스의 여자’에 대한 남자 부하들의 복잡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보스의 여자’는 남자에게 사회적 지위와 미래, 가능성, 동기, 분노... 등 삶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사람들」은 여자를 매개한 남자들의 권력 투쟁을 냉정하게 재현한(마치 감독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 남자들 수준이 이래요...”), 남자 인생의 축도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엉망진창의 ‘사창굴’과 다름없는 유신의 정점 그리고 말로에 대한 김재규의 결단에 공감하게 된다.

남성 영화가 아니라 남성 젠더 영화
「그 때 그 사람들」을 본 어떤 남성은 내게 김재규가 ‘모호하게’ 그려졌다고 말했는데, 이 말에는 이 영화에 대한 남성들의 기대와 혼란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악당을 죽인’ 김재규는 의인이나 영웅이 아니라 다시 부하에게 잡혀 심문받는다. 자기가 죽인 상관과 똑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윤여정의 나레이션은 감독 임상수 정치학의 완결판이다.
여성의 나레이션은 “이상의 스토리는 남자들의 웃기는 이야기였습니다”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임상수는 남자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그는 이 영화를 보수-진보, 독재-저항, 여야 대립이 아니라, 남성들간의 싸움을 완전히 상대화하는 남성 문화를 성찰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남성은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평가받는(조롱받는) 인식의 대상이다. 감독은 자신을 남성 젠더 질서 외부에 위치 지운다(positioning). 기존 남성 정치학의 어느 편에도 동의하지 않는 남성 내부의 배신자로서, 남자들 간의 분열을 시도한다.
「그 때 그 사람들」은 내가 본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성찰적인, 가장 성숙한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정희 진영의 명예 훼손 소송과 이에 동의하는 법원의 삭제 명령은 너무나 황당한 일이다.
감독이 비판하는 것은, 박정희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남성 문화이기 때문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임상수는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남자로서 한 몫 보려는 자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화의 인물들은 ‘할아버지’(영화에서 박정희를 이렇게 부른다)에서부터 말단 문지기까지, 모두 “남자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를 외친다.
영화에서 남자들은 ‘완벽한 의사소통’을 한다.
왜나면, 여기서 ‘소통’은 명령을 하고,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런 종류의 소통은 군대에서나 가능한 일인데, 파시즘은 사회 전체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죽을지도 모르는데 상사의 허무맹랑한 명령을 아무런 저항 없이 따른다.
이러한 의사소통 체계에서, 사유하는 인간은 총살감이다. 영화 속 ‘국기에 대한 경례’ 장면은, 모든 국민이 완벽한 의사소통에 참여했던 그 시절 일상의 대표적인 예이지 않은가!
관객들이 가장 많이 웃음을 터뜨린 장면, 카메오로 출연한 헌병 홍록기와 봉태규의 ‘뻘소리’는 바로 이러한 소통 질서에 작은 균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한결같이, “나는 위험에 나를 맡긴다, 고로 존재 한다”를 증명하고 있다.
여자 뿐 아니라, 남자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XY :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의 저자 바땅떼에 의하면, ‘남자’는 일종의 허구적 설계도로 그 자신이 연기자이며, 행동을 통해 획득한 신분이다.
대개 여성들은 남자들의 허풍, 거들먹거림, 유치하고 과장된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어하지만, 남자 입장에서는 다급한 행동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박정희 편, 김재규 편 할 것 없이, 모두 쓸데없이 거칠고 요란스런 전투적 태도를 반복한다.
남성성은 힘들게 구축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지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시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다움을 과시할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성이 되지 않을 때 남자가 된다. ‘남자 됨’은, 머뭇거림이나 주저함, 겁먹음은 여성의 태도라는 강력한 안티테제가 있을 때만 성립 가능하다.
모든 결정은 부정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남자들의 동성애 혐오는 남성 안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혐오이며, 여성 혐오는 여성 안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혐오인 것이다.

위임된 권력, 남성 권력의 본질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철이나 장세동 같은 캐릭터 연구는 젠더 시각에서의 일상적 파시즘과 구조적 파시즘의 연결 고리를 밝혀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소작인은 지주보다 마름과 사이가 나쁘다.
사람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보다 그들의 ‘똘마니’들을 더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부하를 잘 못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며 독재자를 불쌍히 여긴다. ‘진짜 권력’은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비해 마름이나 ‘똘마니’의 권력과 횡포는 매우 가시적이고, ‘지주’보다는 덤벼 볼만하기 때문이다.
야사의 전문가들은 10.26 사태의 촉발을 ‘안하무인 차지철’로 보는데, 이는 그야말로 증후적 독해가 요구되는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다.
대통령보다 무서운 경호 실장은 청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장보다 무서운 수위’, ‘교장보다 교사를 들들 볶는 주임 교사’, ‘시어머니 보다 더한 시누이’, ‘아버지보다 더 때리는 오빠’ 때문에 고통 받고 분노한다.
그래서 막상 권력의 실체가 나타나면, 모든 미움을 ‘마름’에게로 돌리고 존경심으로 ‘지주 어른’을 쳐다보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차지철의 권력은 박정희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권력은? 그것은 신(God)으로 부터 나온다.
위임된 권력, 이것이 남성성의 본질이다. 날 때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남성들은 신의 이름을 수시로 바꾼다.
‘조국과 민족’, ‘노동 해방’, ‘소중한 가족’... 남자의 이익을 대신해서, 우리들이 신물 나게 들어온 신의 이름들이다.
이것은 모두 보편, 진리, 우주, 객관성의 신들이며, 폭력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 신들은 남성의 주관성이 과잉 객관화 된 것뿐이다.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살해하는 남자들은 자신이 도덕과 윤리의 명령을 받았다고 믿는다.
그는 스스로를 여자를(여성의 성을) 벌하기 위해 파견된 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을 대리한다.
물론, 아무도 남성에게 자기 이익을 그렇게 포장하라고 권력을 부여한 적이 없다. 남성이라는 자각은 자신이 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의 형성이다.
여자는 남자인 ‘나’를 통해 신과 연결된다(“하나님이 남자는 직접 만드셨지만,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셨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역사이다.

「겨울연가」와「그 때 그 사람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 중심 사회가 작동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구조는, 남성이 여성의 친밀성 능력과 감정 노동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슈바니츠는, 많은 여성들이 남자랑 연애할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남자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자들은 자신 속에 내재한 풍부한 감성과 사랑의 능력 자체를, 상대 남자의 매력으로 오인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배려, 보살핌, 사랑의 생산을 위해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는다.
박정희를 포함,「그 때 그 사람들」의 남자들은 모두 집에 들어가지 않거나 들어갈 수 없다. 이들은 모두 근대화 역군, 새마을 운동적 인간, ‘회사 인간’이다. 이들은 과다한 업무로 인해 같은 남자들하고만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낸다.
가장 큰 문제는, 남자들이 그 많은 시간을 남자들과 보내면서도 그들 내부에서 친밀성을 해결하지 못하고, 여성에게만 그것을 전가, 요구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거사를 앞둔 남자들, 적에 쫓겨 죽음의 목전에 선 남자들은 하나 같이 집에 전화를 건다. “여보, 오늘 밤 나 당신의 기도발이 엄청 필요해! 자지 말고 계속 기도해 줘...” 더욱 심각한 재앙은 이제까지의 언설이 이런 남자들을 “불쌍하다, 여자에게 얼마나 의존적이냐” 등으로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남성 특유의 성찰 없음, 즉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이다. 억압자, 착취자가 불쌍한 사람이 되었으니,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성이 여성과의 관계를 끊고(이후 남자는 여성의 노동만을 필요로 한다), 가부장 세계로의 입문 과정을 그린다.
분리와 단절, 독립만이 인간의 발달 조건이라는 것이다. 만약, 정녕 그렇다면,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친밀성과 관계, 상처 치유를 구걸하지 말아야 한다.
여성적인 것을 혐오하면서도, 왜 여성에게 요구하는 게 그토록 많은가 말이다. 남성은 평생 동안 여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여성을 성적으로 갈망하면서도, 절대 여성에게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진짜 인생’은 남자들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자의 일생 중, 여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 기간은 연애할 때가 유일하다.
결혼하면 남자들이 돌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겨울연가」에 대한 여성들의 지지와 환호는「그 때 그 사람들」이 상징하는 남성 문화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겨울연가」의 남자 주인공 배용준은 드라마가 방송 되는 20회 내내 여성과 소통하기 위해 자아를 조절하고, 여성으로 인해 행복해하고 고통 받는다.
한 마디로, 이제까지 여성들만이 해왔던 관계 유지의 노동을 분담할 줄 아는 남성인 것이다.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는 ‘욘사마’는 여성을 이해하고 여성과 대화할 능력이 있는 새로운 남성형인 것이다.
「겨울연가」에 심취한 이유가 “일본 드라마에서는 ‘남성의 눈물’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일본 여성들의 ‘흥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