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책 남성 페미니스트 - 톰 디그비

by eunic 2005. 2. 28.
정희진의 책읽기

남성 페미니스트 / 톰 디그비 엮음


매체명 한겨레 작성일 2004-05-01

남성 페미니스트/ 톰 디그비 엮음, 김고연주·이장원 옮김 / 또하나의문화 펴냄·1만5000원

여성이 자궁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면, 성대를 가진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하나?
이처럼 페미니즘은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을 사회적 억압의 근거로 삼는 남성 사회에 도전해 왔고, 특히 한국 여성운동의 급속한 발전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젠더(성별 제도)는 일상생활부터 국가정책, 사회운동, 지식사회에 이르기까지 가장 첨예한 논쟁 주제 중 하나다.
페미니즘에 무지하면 인간과 사회 현상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남성 중심적 세계관은 점차 상대화해가고 있다.
문제는, 성희롱 사건에 대한 상반된 해석과 논란에서 보듯이 젠더 이슈 인식이 남녀에 따라 극심한 격차를 보인다는 점이다.
여성 문제 인식에 대한 남성들의 문화 지체 현상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한마디로, 여성들의 의식은 ‘1987년 6월 항쟁 직전’인데, 남성들은 아직도 조선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남성은 여성, 여성주의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페미니즘 이론가인 미국 남성 학자가 엮은 〈남성 페미니스트〉는, 여성 억압 현실과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남성의 태도와 사유에 전범이 될 만한 매우 빼어난 책이다.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언뜻 ‘자본가 마르크스주의자’처럼 모순어법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여성 의식이 없는 여성이나 여성 혐오를 내면화한 여성보다, 자신의 남성성을 성찰하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남성이 여성 해방에 더 필요한 존재라고 본다.
곧, 여성으로서 살아 낸 경험이 있어야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기존의 본질주의적 가정을 비판하고, 페미니즘은 남녀 누구나 채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 세계관, 행위력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학을 가르칠 때 발생하는 문제, 자녀 양육을 통한 남성의 치유와 변화, 지배와 방어 논리로 점철된 남성 문화의 고통, 친밀성을 두려워하고 여성의 감정 노동을 착취하는 남성 주체의 문제 등 남성의 삶과 페미니즘 이론과의 관계를 논쟁적으로 분석한다.
동시에 이들의 이론은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지배 문화의 집요한 구속과 이를 극복해 가는 투쟁을 그린 개인의 생애사적 기록이다. 남성에게도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여성주의 이론서지만, 성적 소수자와 섹슈얼리티 관련 전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열세 명의 집필자들은 페미니스트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남성, 여성, 트랜스젠더, 퀴어, 게이 등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이 책의 원제처럼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것이, ‘제3의 성’으로 간주되는 성적 소수자, 남성, 여성을 막론하고 개인과 공동체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남성 사회의 ‘내부 고발자’인 남성 페미니스트의 자기 고백과 분열, 남성 페미니스트가 남녀 모두에게 수용되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고통, 남성 페미니스트에 대한 여성 페미니스트의 의심과 환영의 이중 심리,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을 전환한 ‘남성’이 연구하는 인간의 섹슈얼리티, ‘마초’ 아버지와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페미니스트 딸 ….
이 책의 이야기들은, 페미니즘의 근원적 본령은 여성해방뿐만이 아니라 모든 타자에 대한 소통과 이해의 정신임을 웅변한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