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와 여성으로서 응당 누려야할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역사적인 시위를 벌였다. 시간은 흐르고 쌓였지만, 여전히 수많은 억압 속에서 답답해하는 여성들이 적잖다. 그 여성들에게 있어 1908년은 여전히 어제 같은 오늘로 엄습한다. 매년 3월 8일은 여성의 날이다. 그에 맞춰 48대 서울대 총학생회는 이번 주를 '반성폭력주간'으로 설정해 다양한 행사를 벌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정희진 선생님으로부터 듣는 이성애 연애의 정치경제학>이라는 길고 난해한 제목의 강연회가 열렸다. 7일 오후 4시 법대 주산홀에서 진행된 강연회는 2백 명을 넘는 참석자들의 열띤 경청과 웃음으로 채워지는 의미있는 2시간이었다. 강연을 맡은 서강대 시간강사 정희진 씨는 자유로운 히피풍의 옷을 입고 등장해, 자기의 강연이 "일목요연하고 명쾌한 강의가 아닌 도리어 일상과 불편하게 만나는 시간이 되길 원한다"며 운을 뗐다.
| ▲주산홀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 ⓒ 스누나우 |
'로망'속에가려진 남녀의 권력관계
정희진 강사는 온갖 '로망'으로 덧씌워진 남녀 사이의 연애 관계에도 사회·역사적인 권력관계가 함유된 정치가 작동한다는 발언으로 강연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강연회의 주제가 이성애 관계에 모아진 점에 대해, 강연회장에 있을 법한 성적소수자들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그는 적잖은 여성들이 외모와 다이어트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붇는 것을 우려하며, "여성의 주체적 종속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두 예"라고 짚어냈다. 'subject'이라는 단어는 '주체'를 뜻하지만, 'be subject to'는 '종속'을 가리키는 뜻이 있다며, 종이 한 장 의 근소한 차이에서도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꼬집었다. 세간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오해와 편견 속에서, 페미니즘은 기실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예리한 눈을 감지 않는 분야라고 그는 주창했다. '못생기고 매력 없는 남자친구 없는 불만분자', '남성 전체를 혐오하는 레즈비언 성향 농후', '개인의 문제를 과장해서 엄살떠는 집단 오류' 등의 편견을 누가 만들었는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특히 대학에서 구태여 페미니즘에서 가치중립성을 선택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검열"이라고 진단했다. 자연스레 성과 사랑으로 이어진 강의에서, 정 강사는 성과 사랑이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는 주장에 대해, 젊은 백인 이성애자 남성과 그렇지 못한 계층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반론했다. 가령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우의 경우 계단 자체가 정치가 될 수 있듯이, 여성들에게는 남녀 사이의 관계가 이내 정치로 치환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최근 오랜 동안 가정폭력에 신음했던 인기여성연예인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에선 경제적인 구분보다 성별 구분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전히 악용되고 있다"고 파헤쳤다.
| ▲강연 중인 정희진 강사 ⓒ 스누나우 |
남성의 법칙을 배워야하는 여성
일상의 언어 역시 그의 예리한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자궁을 의미하는 라틴어가 '남자가 있는 곳'을 뜻하고, 여성의 질은 '칼집'을 의미한다"면서, 언어에 내재된 남성중심적인 사고를 비판했다. 나아가 "남성에게는 '삽입'일 수 있는 섹스가, 여성에게는 '흡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의 중에 학생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낙태를 경험하는 학생들이 적잖다"며, "성관계 동의에 따라 사랑을 판단하는 남성들은, 여성의 성관계 동의와 상관없이 관계를 오래 끌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고 꼬집었다. 즉, "여성들이 섹스에서 주체적으로 자기를 지키는 합류적 사랑을 택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이어 요즈음 인기를 끌고 있는 여성상의 왜곡된 면모를 들쳐 내며 촌철살인의 너스레를 떨었다. "'요염하면서도 정숙한 여자', '똑똑하면서도 나서지 않는 여자', '섹시하면서도 성관계를 해보지 않은 처녀성의 소유자'라는 모순되는 여성상은 그릇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모든 식민지인이 이중국어 사용자'라는 프란츠 파농의 말을 빌어서, "여성 또한 여성의 법칙뿐만 아니라 남성의 법칙 또한 습득해야 하는 의무를 짊어진다"고 역설했다. "백인이 흑인의 문화를 배우려 하지 않고, 미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어를 배우지 않는 실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득권을 가진 부류는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는 반대편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고 말했다. 열기를 더해가는 강의분위기 속에 그는 "양성 모두 콘돔을 항상 휴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성폭행 사고 이후 가해자에게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거나 성병에 감염되는 여성 피해자들이 적잖다"며, "위급한 성폭행 순간에는 가해자에게 콘돔을 착용하라고 요구해야 한다"는 논쟁적인 발언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여성이 성관계를 하는 파트너에게 콘돔 착용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실제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콘돔 착용을 요구했다는 점이, 수사과정 중에서 '동의에 의한 성관계'로 의심 받는 태도는 매우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정희진 강사는 "가부장제가 여성을 동일하게 가둘 때, 우리는 다양성으로 맞서겠다"라는 국내 게이활동가의 말을 인용하며 강연회를 마쳤다. 일상의 편함을 넘어 '의미있는 불편함'을 던진 강연
이 날 강연회는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는 강연회를 꾸려가려는 주최 측의 노력이 돋보이는 행사였다. 장애우들의 이동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유산홀을 강연장으로 마련한 점이나, 청각장애우들을 위해 자막을 실시간으로 보여준 점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선배의 추천으로 오게 됐다는 사회대 신입생 박꽃보라 씨는 "대학 입학 전부터 여성주의에 관심을 품고 있었는데, 직접 강연을 듣게 돼 개인적으로 큰 의미였다"고 말한 후, "기회가 된다면 학내 여성문제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반면 강연에 대한 다른 반응도 있었다. 사회대의 한 남학생은, "강연 내용이 여성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몇몇 극단화된 예를 일반화하는 태도는 껄끄럽게 느껴졌다"고 피력했다. 강연시간엔 웃음이 가득 묻어났지만, 강연장 밖 도처에 깔려 있는 기우뚱한 이성애 정치경제학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하는 고민으로 각자의 발걸음은 좀 더 무거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의미 있는 불편함'을 참석자들에게 선사한 정희진 씨의 강연은, 양성 모두에게 타인을 만나는 방법에 대한 바람직한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
| ▲이날 청각장애우들을 위한 속기가 지원되어 자막으로 강연내용이 올라왔다 ⓒ 스누나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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