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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인터뷰 한국여성의 전화’ 상담차장 정희진

by eunic 2005. 3. 24.

‘한국여성의 전화’ 상담차장 정희진씨(인터뷰)
한겨레 1996-05-13

◎“아내구타 관대한 시각 빨리 변해야”“얼마 전 예순네살 된 할머니한테서 전화를 받았는데, 평생을 남편에게 맞고 살았다며 이제라도 이혼하고 싶다면서 우시더군요.

그동안 경찰서에도 몇차례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집안 일이니까 집에서 해결하라’는 말만 들었답니다.”


여성문제를 상담해주는 ‘한국 여성의 전화’ 상담 차장 정희진(30)씨는 “남편에게 구타당해도 집안 문제로 돌려버리는 우리 사회의 관행이 하루 빨리 깨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정폭력에 대한 이런 무관심이 결국 가정과 인륜을 파괴하는 무서운 범죄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이나, 구타에 시달리다 못해 남편을 살해한 아내의 경우를 보세요. 딸을 대신해 살인을 저지른 이상희 할머니 사건도 결국 가정폭력이 낳은 비극입니다.”


정씨는 남편한테 학대받는 아내가 특별히 잘못을 저질렀거나 몸과 마음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갓 결혼한 신부에서 70대 할머니까지, 평범한 주부에서 대학교수까지 많은 여성들이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며 “맞는 여성 가운데 ‘맞을 이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정씨는 가정폭력을 막기 위해선 무엇보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격체라는 인식을 깨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흔히 맞는 여성에게 이혼하라고 권하지만 ‘시집가면 그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아직도 지배적인 사회에서 이혼녀란 멍에는 치명적”이라며 “이런 사회에선 맞는 여성에게 탈출구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인 여성이 고통받는다면 가족 모두가 희생되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맞는 아내들은 육체적인 피해도 크지만 자아 상실감과 굴욕감에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된다고 한다.

또 이런 어머니를 보며 자란 딸들은 맞는 걸 당연시하게 되고 아들은 때리는 걸 배우게 돼 폭력의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고 정씨는 지적했다.


정씨는 가정폭력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맞는 여성에 대한 피난처 제공 등을 규정한 ‘가정폭력방지법’이 하루빨리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정폭력방지법이 ‘남성의 손발을 묶는 법’이라는 비난도 많지만 이 법을 통해 폭력으로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이미 파괴된 가정을 회복시킬 수 있다”며 “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에 많은 남성이 참여한 것을 보면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박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