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빌어보는 소망
대학 2학년 때 버스를 타고 가다 잠이 드는 바람에 ‘588’이라 불리는 청량리 성매매 업소 거리를 지나치게 되었다. 버젓이 버스가 다니는 2차선 도로인데도 길 양편에 성매매 업소가 붉은 전면 유리창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나가는 남자를 잡아끄는 야한 공주처럼 옷을 입은 여자들은 놀랍게도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유심히 바라보던 내 눈에 눈물이 흘렀다. 슬프다고 느끼기도 전에 계속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세상이 무서웠다.
몇 해 전에 전북 군산에 있는 성매매 업소 집결지인 대명동과 개복동에 화재 참사가 있었다.
피해 여성들은 감금 상태에서 성매매를 강요당했다고 했다. 성매매 업소 100m 앞에 파출소가 있었는데도 경찰관들 중 일부가 업주로부터 주기적으로 뇌물을 받고 업소의 불법 사실을 묵인해 왔다고 했다.
결국 성매매 업소에 있는 여성들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국가로부터 보호받기는커녕 도리어 철저하게 유린당한 셈이었다.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고 이 땅에 산다는 게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니 영하 10도가 넘는 낯선 밤거리에서 길을 잃었을 때 두려운 것은 추운 날씨나 길을 잃은 사실이 아니라 인신매매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만든 영화 〈나쁜 남자〉를 봤을 때도 감독이 사랑을 너무 병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보다 낯선 남자를 함부로 쳐다보다 성매매 업소에 팔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 오래 남았다.
성매매는 성을 사고파는 사람, 그 틀을 유지시키는 폭력세력, 그리고 그것을 눈감아 주는 비리세력이 공생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성이 매매되는 현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축된다. 언제라도 내가 피해 여성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따라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성매매가 있는 한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들은 모두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직접적인 피해 여성에게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어떤 이는 성매매도 일종의 노동이라고 말을 한다.
성의 질서가 유지되기 위한 안전장치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노동이 여성 모두를 평생토록 두려움에 떨게 만든단 말인가?
또 성의 질서가 돈을 주고 한쪽 성을 삼으로써 유지될 것 같으면 국가가 나서서 성매매 기금이라도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별이 총총 빛나는 밤길을 여유 있게 혼자서 걷고 싶다.
여자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 마시고 콧노래 부르며 걷고도 싶고 여행 가서 하룻밤 자고 오고도 싶다.
심야 영화관을 느긋하게 찾아보고도 싶고 새벽바람을 마시며 달리기도 하고 싶다. 두려움 없이 말이다.
성매매의 공포만 사라진다면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일들을 아직까지 여성들은 큰마음을 먹어야만 할 수 있다.
새해에는 성매매 방지법이 법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감과 지지 속에 온전히 지켜져서 여성들이 활짝 웃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오금희/고교 교사<한겨레의 흐린뒤 맑음 꼭지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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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자리가 늦어지면 시계만 쳐다보고 언제 가나, 그러다 지하철 끊기는 시간이 다 되어되면 누가 말려도 역으로 뛰어나간다.
택시를 타는 게 무섭고 꺼려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100원이 모자라서 택시에서 무지하게 혼난 기억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손님인 나와 남자운전수만 둘이 있다는 상황은 날 무지하게긴장하게 한다.
내 주변 친구들도 그렇다.
나쁜 일을 겪진 않았지만 항상 그런 우려를 하면서 타곤 한다.
야근을 많이 하는 언니는"뭐하고 노느라 이렇게 늦게다니냐"는 훈계도 듣고,남자친구와 존대말로 통화한 우리언니에게는"유부남이나 꼬시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그 자리가그렇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한공간에 있을때 여자는 위축된다. 긴장한다.
물론 좋은 아저씨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밤길 걷는게 두렵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얼마나 공감하고 있을까.
그건 외모와 옷차림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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