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병장'의 심리에 대한 소고
권혁범 (대전대 정외과 교수)
한국 남성들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군복무 경험이다.
20세 신체 건장한 남자는 삼대 독자가 아니라면 특권층 부모의 빽이 없는 한 군대에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가기 싫어한다.
스무살의 나 같이 '철없는' 사람, 즉 징병제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사람만이 '신성한 국방의무' 운운하며 훈련소에 자랑스럽게 걸어 들어간다.
옆에서 '남자는 모름지기' 하며 부채질하는 인간들 탓도 크다.
굴욕, 억압, 복종으로 점철된 2년여 고난의 행군 동안 군대에 대해 맘속으로 혹은 사석에서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예비사단에서 지급한 개구리 복을 입은 채 사회로 '복귀'할 때! 이제 수난시대는 갔고 애국심과 남성성 테스트는 끝났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군에 갔다 오는 사이에 병역 면제받은 동기생은 졸업을 했고 여학생들은 이미 직장에 취직해서 자신의 선배가 되었으며 자신은 '어른스러워진' 대가로 뇌에 이끼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비애와 박탈감을 느끼며 '예비역 병장'은 강한 보상심리를 갖게 되고 결국 틈만 나면 '내무반 시절'을 미화하는 회고 에피소드와 '분단현실의 심각성과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에 목매고 살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고생을 도맡아 한 사람, 남들 놀 때 국가에 청춘을 바친 사람은 오로지 군필자뿐이다.
어눌하고 게으르고 다분히 '여성스럽던' 남성들조차 군복무 후에는 성실근면하고 심각한 사나이/어른/국민으로 변한다.
이제 군 경험은 '나'라는 인간의 뼈며 살이며 본질이다.
군 비판이나 병역에 대한 이상한 헛소리들은 '나'에 대한 인격모독이며 '나'를 짓밟는 폭력이 된다.
병역 관련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제기될 때마다 사이버 항해자들이 갑자기 일사분란하게 '총화단결'하며 '구국의 테러리스트'가 되는 이유다.
이제 그는 국가와 안보 그리고 남성 중심적 위계질서의 수호신이다.
최근 이화여대 총학생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지지 성명을 밝히자 당연히 이 예비역들이 들고 일어났다.
왜 그들은 꼭 '이대생'들에 대한 테러를 좋아하는지?
남녀공학 대학교에서 성명서를 발표했어도 이런 식으로 대응했을까?
남자, 즉 '임자' 없는 여성에 대해 가학적 폭력적이 되는 남자들의 전형적인 예다.
"이대총학이 강간사태를 유발할거다!" 믿어지는가? 이건 인격 모독을 넘어 형사적 입건의 문제가 아닐까?
물론 나는 군복무자들이 느끼는 억울한 심정, 상대적 박탈감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 분노를 군대 제도 자체 혹은 분단현실 혹은 징병제 혹은 군사주의 문화 혹은 특권층에 대해 투사하지 않고 왜 여대 후문 앞에서 서성거리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익명의 아이디로 자신을 숨기고 사이버공간에서 "대한민국의 예비역이여 총궐기해서 이대총학으로 몰려가자!"고 선동하는 당신은 좀 비겁하지 않은가?
군복무가 그렇게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당신의 청춘을 빼앗아간 못된 경험이라면 청와대 혹은 국방부 앞에서 거적 깔고 침묵시위라도 벌여야하지 않는가?
대체복무제나 양심적 병역거부권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군대내 처우 개선 구호라도 외쳐야 하지 않는가?
그 대신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을 고통, 우울증, 폭력 문화, 공범자, 지적 마비 상태로 몰아넣었던 그 징병제 군대에 여성들 마저 가야 한다고 외치는 건 무슨 가학심리인가?
군대에 있을 동안에는 온갖 비리, 부당한 명령, 폭력적 질서에 쉽게 굴복했던 자신의 자존심을 이런 식으로 복원하려 하는가?
남성들은 군복무로 느끼는 박탈감을 토대로 여성이나 사회적 소수자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느끼는 소외감, 불안증, 차별에 감정이입하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걸까?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성차별은 그대로 놔둔 채 군입대에서의 성평등을 외치는 것은 파렴치한 행위다.
그것은 한쪽 발을 잃은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똑같은 출발점에 서서 백미터 달리기하라는 '평등'한 주문과 다를 것 없다.
군가산점 폐지에 울분을 토하며 그것을 주도한 페미니스트를 몰살시키겠다고 협박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지지를 보내는 여대 총학생회를 테러하고 싶어하는 사이버 마초들 상당수는 이 사회에서 받는 계급 및 학력/학벌 차별의 희생자이다.
그들이 부르주아고 명문대 고학력자라면 평생 한번도 보지 않을 공무원 시험 가산점에 목 맬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들은 가부장적 편향과 정치적 무지로 인하여 자신의 계급적 분노를 성별화하는 오류를 범하며 그것을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부르주아' 이미지를 갖는 여대에게 투사하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계급간의 위계질서와 억압관계를 은폐하며 지배층이 원하는 남자 대 여자 싸움의 함정으로 빠져드는 지름길이다.
그대들은, 자신이 백여년이 넘는 국가주의 및 군사주의의 거대한 세력이 자신의 몸 속 깊이 심어놓은 이데올로기를 배양하는 숙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가?
테러하려는 당신은 이미 진정한 당신이 아니다. 예비역 병장이여 '라이터'를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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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대 정외과 교수/ dju.ac.kr/~kwonh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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