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내 방과 옷을 항상 깨끗하게 정리하고 하루 세끼 식사를 내 방으로 가져올 것, 내 방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말 것.
둘째, 집에서 당신 옆에 앉으라고 하지 말 것이며 같이 외출하는 일은 꿈도 꾸지 말 것.
셋째, 내가 부르면 즉시 대답하고 어떤 애정도 기대하지 말 것이며 방에서 나가달라고 할 때 즉시 나가줄 것 등"
위대한 과학자의 실패한 사랑 - 아인슈타인
조숙경/포항공대 과학문화연구센터 박사후 연구원
과학동아 2002년 5월 skcho@postech.ac.kr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불리는 아인슈타인을 규명하는 작업에서 그의 첫번째 아내였던 밀레바 마리치와의 비밀스런 일화가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신격화된 과학자’ 아인슈타인.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또다른 모습을 살펴보자.
17세기에 독일의 유명한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라이프니츠가 있었다. 그는 만물을 단자 (monad)라는 것을 통해 파악하고 이해하려 했는데, 그에게 단자는 주변에 의해서만 그 특성이 결정되는 성질을 가졌다. 언뜻 보면 단자는 만물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로서의 원자라는 개념과 유사하지만, 각각의 특성이 원자처럼 미리 규정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의해 결정된다는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단자 철학’ 개념을 빌자면 아인슈타인이라는 한사람을 규명하는 작업에서도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특히 아내와의 관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더구나 아인슈타인에게는 밀레바 마리치라는 첫번째 아내와 관련해 비밀스런 일화가 새롭게 밝혀졌고, 또 지금도 연구되고 있다. 그와 밀레바와의 관계를 아는 것은 아인슈타인이라는 한 인물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물리학과 동급생으로의 만남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학 동급생으로 만나 1903년 결혼했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하얀 머리카락, 한손에 파이프를 들고 또 한손은 바지 주머니에 대충 넣은 모습,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프린스턴대의 오후 교정을 평온하게 거니는 모습. 누구나 한번쯤 위인전에서 만났음직한 과학자 할아버지의 전형이다. 이 모습은 영화 ‘백튜더 퓨쳐’에서 거침없이 시각화됐고, 알게 모르게 과학자의 대표적인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서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 익숙한 전형적인 과학자의 모습을 갖춘 대표적인 인물을 말하라면 단연 아인슈타인을 손꼽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의 울름 지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기 사업의 실패로 그에게 특별히 교육적 환경을 제공해줄 수 없었지만, 어머니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10살 때까지도 독일어를 잘 구사하지 못해 저능아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받았으며, 김나지움에서는 수학 교사에게 ‘최악의 악몽’(worst nightmare)으로까지 불렸다.
하지만 기하학에서 두각을 보였고, 17살에 당시 유명한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학(ETH)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기공학도가 되려고 했지만, 재수하는 동안 물리학에 미래를 걸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한 아인슈타인은 1896년 그보다 네살 연상으로 수학 및 과학부에 입학했던 홍일점 여학생 밀레바 마리치를 만났다. 밀레바는 세르비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자연과학과 음악에 흥미를 느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과 과학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던 그녀는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과학도로 당시 자연과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스위스로 유학온 것이었다.
물리학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서로 통했던 두 젊은 남녀는 곧 동료로 친해졌고, 어느새 연인이 됐다. 부모 곁을 떠나온 젊은이(당시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이탈리아에 있었다)들이, 그것도 관심사가 동일한 젊은이들이 서로 친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밀레바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그녀를 ‘나의 귀여운 병아리’라고 부르면서 “나와 마찬가지로 강인하고 또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라고 쓰고 있다. 그는 또 “당신을 생각하지 않고는 이 유감스런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소”라는 강한 사랑 고백도 빠뜨리지 않았다.
상대성 이론에 큰 공을 세운 밀레바
1986년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마리치의 큰아들인 한스 알버트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오갔던 연애편지를 공개했다. 1897년 대학에서 만날 때부터 두사람의 결혼 직후까지 주고받았던 모두 54통의 편지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두사람의 관계와 당시 그들이 처했던 상황, 한번도 알려진 적이 없던 딸의 출생, 그리고 1905년에 발표되는 아인슈타인의 중요한 논문들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줬다.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스위스 공과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에 관한 토론과 공부를 계속하다가 6년 만인 1903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전 두사람이 떠났던 밀월 여행으로 이들에게 이미 리제를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들은 딸의 존재를 죽을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
1901년 유명한 휴양지 꼬모 호숫가로의 여행 후 임신 사실을 알게된 밀레바의 인생은 급격하게 변모했다. 수학자로서의 성공을 눈앞에 뒀던 그녀는 과학공부를 그만두고 고향 세르비아로 돌아가 아무도 모르게 아인슈타인의 딸을 낳았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세르비아에 머물던 밀레바에게 보낸 편지에서 딱 한번 딸의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딸 리제를은 두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당시 아인슈타인에게 “밀레바와 결혼하면 너의 인생이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다”라는 험한 말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과학도로서의 꿈을 접었을 뿐만 아니라 교사 시험에도 떨어진 밀레바는 1903년 결혼 후 점점 더 유명해지는 남편의 연구를 도와줬다. 그녀는 아인슈타인의 동료가 아니라 아내였고, 남편이 유명해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상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발간된 새로운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이 가장 창조적이었던 시기인 1905년에 발표한 세가지 주요 발견(상대성 이론, 광전효과, 브라운 운동)의 진짜 주인공은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바로 그의 아내 밀레바라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는 대학시절 밀레바와 함께 공부하던 볼츠만, 헬름홀츠, 키르호프, 오스트발트의 고전들이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물리 이론을 구상하고 확립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특히 취약했던 수학에 능통해 대학 때의 동료인 그로스만과 함께 상대성 이론이 안고있는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어준 주인공이었다는 것이다.
밀레바는 또한 1897부터 1898년까지 하이델베르크에 머물면서 독일 물리학자 필립 레나드의 강연을 듣고 열광해 ‘분자의 운동과 충돌로 이동한 경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편지로 써보냈는데, 그것이 이후 아인슈타인의 브라운 운동에 대한 연구의 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의 과학 연구에서 행한 역할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인슈타인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 구절에서 분명하게 찾을 수 있다. 그는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학에 관한 연구를 언급하면서 상대성 운동에 관한 ‘우리의’ 이론 또는 상대성 이론에 관한 ‘우리의’ 연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노벨상을 받으면 그 상금 전액을 밀레바에게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는데, 이는 상대성 이론에 대한 밀레바의 공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강한 증거로 보인다.
가족을 버리고 물리학을 선택하다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두사람의 결혼은 1919년 끝이 났다. 사실상 1903년 결혼 후부터 두사람의 관계는 멀어지기 시작했고, 아인슈타인이 세상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되면서 부부싸움이 더욱 잦아졌다.
1904년과 1910년에 태어난 두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도와야 하는 가정주부로서의 일상에 놓여진 밀레바는 더 이상 과학 세계와 닿을 수 없었고, 스스로의 삶을 패배적이고 비극적인 것으로 느껴갔다. 남편에게 사랑을 원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또다른 연인을 찾아 사랑을 구하고 있었고, 급기야 1913년 두사람은 별거에 합의했다.
1914년 아인슈타인은 이혼을 하고 싶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지키라는 편지를 밀레바에게 보냈다.
첫째, 내 방과 옷을 항상 깨끗하게 정리하고 하루 세끼 식사를 내 방으로 가져올 것이며, 내 방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말 것. 둘째, 집에서 당신 옆에 앉으라고 하지 말것이며 같이 외출하는 일은 꿈도 꾸지 말 것. 셋째, 내가 부르면 즉시 대답하고 어떤 애정도 기대하지 말 것이며 방에서 나가달라고 할 때 즉시 나가줄 것 등.
5년 후 두사람은 결국 이혼을 했고,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상금의 절반만을 밀레바에게 주었을 뿐이다. 그는 이혼 후 쇠약해진 건강을 회복하면서 먼 친척 엘자와 곧 다시 결혼했지만 또다른 여성을 찾아 사랑을 구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밀레바는 두아들을 힘겹게 키우다가 1948년 사망했다. 1955년 아인슈타인의 죽음 소식을 접했을 때 큰아들 한스는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았고, 정신분열증을 앓던 둘째 아들은 1965년 사망했다.
스위스 공과대학의 물리학과 동급생으로 만나 수학과 물리학에 대해 밤새워 토론하며 과학자를 꿈꾸던 10대 후반의 두 과학도는 결국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이별했다.
한사람은 20세기 최고의 물리 학자라는 영예를 안았고, 또다른 사람은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말수가 적고 우울하며 신뢰하기 힘든’ 촌뜨기 세르비아 출신으로 단지 위대한 물리학자의 첫번째 아내였을 뿐으로.
사실 아인슈타인과 밀레바의 결혼 생활이 실제로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혹 그들이 생존해 우리 앞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해도 두사람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의 또다른 면모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은 그가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물리학적 연구를 수행할 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아내 밀레바로부터 수학적, 물리학적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비인간적인 면모로 그가 결혼 전 비밀리에 딸을 얻었는데, 그 딸에 대해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방기했다는 점, 그리고 결혼 후 끝없는 외도로 두번째 결혼마저 비극으로 몰고 갔다는 점이다.
이것은 분명 센세이션한 사건이다.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2백년 이상 지속된 뉴턴의 고전 물리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물리학의 체계를 구축한 20세기 대표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이고 보면, 그가 과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미치는 파급 효과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밀레바가 남긴 숙제
오늘날 과학자들이 사회와 동떨어져 혼자 고독하게 자연에 대한 탐구를 수행해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60년대에 물리학자였다가 과학사학자가 된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자들 역시 사람이며 과학자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의 과학 이론의 형성과 선택에는 사회적 요소가 개입된다는 점을 설파했다.
사실상 과학자 개인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과학사의 발견 중 많은 부분은 그 과학자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일궈낸 노력의 총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인슈타인이 가장 절친했던 동료인 아내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학문적 도움을 받고도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오늘날 한편의 논문 끝에 붙는 수십편의 참고문헌과 감사의 글은 그 논문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밀레바로부터 받은 도움을 평생 비밀에 부쳤다. 그는 어쩌면 밀레바로부터의 도움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고,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남편이기 때문에 자신의 공헌을 주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든 분명한 사실은 그 동안 우리가 알아왔던 아인슈타인이 ‘뒤틀려진 아인슈타인’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선한 측면만 부각된 신격화된 아인슈타인이었다.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의미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의 우리 삶에, 그리고 살아가야 할 내일에 던져주는 시사점이 크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밀레바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인슈타인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아인슈타인의 과학연구에서 행했던 역할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그것을 정당하게 인정해주는 것이다.
19세기라는 시대에, 그리고 남편이라는 무게에 가로막혀 과학도로의 꿈을 접고 시들어간 밀레바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달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한편에서 아인슈타인은 스스로를 변명할지 모르겠다. 과학자란 도덕적 인간성을 갖춘 성인이 아니라 단지 과학 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정진한 사람일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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