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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책 ''전쟁''과 ''근대'' 통해 재발견한 여성

by eunic 2005. 2. 28.

'전쟁'과 '근대' 통해 재발견한 여성
[한겨레 2004-07-30 17:48]


[한겨레] 한국전쟁이 여성지위 변화 계기
전후 힘겨운 경제활동 경험 통해
주체성 형성·가부장 폐해 눈떠
여성의 근대 용납하지 않았던
'신여성'에 대한 남성적 시각 비판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삶은 정치학과 역사학의 주제지만, 여성의 삶은 의학과 생물학의 주제로 간주된다. 특히, 근대 이후 공/사 영역 분리의 성별화가 가속화되면서, 남성의 삶은 더욱 공적인 것이 되었고 여성의 삶은 더욱 사적인 것이 되었다. 이로 인해 여성의 일상은 역사와 대립하는 듯 보였으며, 여성의 삶은 역사학의 주제가 될 수 없었다. 남성들간의 권력 투쟁, 곧 법·전쟁·왕조·영토획득 위주의 기존 역사 서술에 도전하는 여성사는 근대 분과 학문 체계를 넘나드는 다학제적 접근으로 미시사·일상사·구술사 등과 함께 현재 가장 각광받는 학문 중 하나다. 여성 역사학자 이임하씨의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와 남성 사회학자 김경일씨의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은 최근 사회과학계의 젠더(성별)와 한국현대사에 관한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성과이다.

이임하는 대표적인 남성 서사인 (한국)전쟁을 여성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할 뿐 아니라 전쟁사 자체를 다시 쓰고 있다. 지은이는 파괴와 공포로 상징되는 전쟁의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기존 시각을 비판하면서, 여성에게 전쟁은 사회 진출과 노동의 기회이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전쟁으로 인한 남성 부재의 현실에서 여성은 생계 부양자일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데다 철저한 남성 중심사회에서 공식 노동 시장에 참가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식모’, 성매매, 노점상, 삯바느질, 미군 부대 세탁부, 고리대금업 등 ‘비공식’ 부분의 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지은이는 고려시대의 환향녀들이 ‘화냥년’이 된 것처럼, 여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오랜 이중 메시지를 비판한다. 여성이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를 바라면서도, 집안일도 완벽하게 하기를 기대하고, ‘정숙’하지 않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 전쟁 후,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여성의 생애사이자 전후 여성노동시장을 분석한 정치경제학서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김경일은 ‘신여성’이라는 코드를 통해 젠더와 한국의 근대성 문제를 다룬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나혜석·김일엽·허정숙 등 ‘신여성’들의 자아 형성, 성과 사랑, 경제적 독립, 교육에 대한 치열하고 급진적인 세계관은, 한국의 페미니즘이 왜 보부아르가 아니라 나혜석에게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신여성’과 ‘구식 여성’이라는 구분은 있지만, 신남성과 구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이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 근대와 진보를 표상하는 장소가 되었음을 뜻한다. 여성에 대한 규정이 남성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 사회는 근대성을 추구하면서도, 여성의 근대는 용납하지 않는 모순을 보여주었고 이는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반복된다. 이 책은 ‘신여성’에 대한 기존의 남성 중심적 시각의 전형성을 비판·극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여성사는 젠더를 역사의 설명 대상이 아니라 역사를 설명하는 요소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전쟁이나 근대가 여성, ‘신여성’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한국 전쟁, 자본주의, 근대 국가가 성별 관계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관점의 연구가 이후 과제로 남는다. 두 권 모두 여성을 인터뷰하는 등의 질적 방법보다는 잡지·신문·논문 등 기록된 문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