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비정상인'을 알아?
[오마이뉴스 2002-10-24 12:51]
#1. 니들이 비정상 맛을 알아?
<오아시스>를 보고 와서 한참을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정상인들의 천국이다. 그리고 그 정상인이라는 특권은 신체에 아무 지장 없는 성인 남성에게 한정된다(권력, 돈 등은 옵션이다). 외국에서 버스를 타는데 그 안에는 누구나 손이 닿을 만한 위치에 벨이 있었다.
최근 들어 '어린이벨'이라고 하차문 옆에 구색을 맞추려는 듯 설치해놓은 버스가 몇몇 등장하곤 있지만, 어린 시절 버스를 타면 벨을 누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매우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난 하차벨이라고 하는 것은 장난치지 말라고 높은 곳에만 두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어린 나는 생각했었을 것이다. 저 벨을 자유자재로 누르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어른(이라는 정상)이 되어야겠다고. 자기와 다른 타인을 비정상이라고 쉽게 규정지으면서까지 정상이고 싶어하는 사회.
스무 해를 비정상인 채 살아왔다. 이 땅에선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여성은 페니스가 없는 비정상적인 남성이니까. 일찍이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지 않았던가, 여성은 남성이 되지 못한 장애인이라고.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나 비정상적인 성격을 갖고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스스로의 비정상을 비난받았다.
비정상이라는 '원형 교도소'에 갇혀 어디서든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으로 괴로워해야만 했다. 나는 그들과 결코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 나는야 비정상. 정상이 아니니까. 기껏해야 동정을 받는 그러나 대부분은 멸시를 받는 그런 비정상. 갑자기 묻고 싶어졌다. 니들이 말하는 비정상이란 게 뭐야.
각종 영화 잡지 표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수많은 영화 평론가들의 극찬을 이끌어낸 대단한 영화 <오아시스>는 내겐 쓰레기로 버려도 시원치 않을 감정만을 안겨다줬다. 보고 나서 감동이 찡하게 밀려와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고? 악어의 눈물. 아마 눈물을 흘렸다는 그 자들은 잘난 정상인들이었을 거다. 아니면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거나. 넌 그때 왜 눈물을 흘렸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아시스>를 관람한 그 시선 속에는 정상인으로서의 치밀한 분리주의가 숨겨져 있다. 어차피 나는 영화 속의 종두나 공주가 아니다, 영화를 보며 그들의 아픔과 환대를 공유하게 되어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쓰라려도 그건 잠시일 뿐 영화가 끝나면 나는 다시 그들과 '다른' 정상인이다.
결국 영화를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종두의 강간혐의로 경찰서에서 취조를 하던 형사의 다음과 같은 대사뿐이다.
"그래, 여자로 보이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제 멋대로 비정상으로 간주하던 한 개인을 잠시나마 정상으로 보게 해준 감독에게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는 멋진 '정상인'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극장을 나오면서 스스로가 사회적으로 규정된 정상인이라는 점에 안도하는 '비정상인'들이기도 하다.
#2. 섹슈얼리티, 폭력 그리고 메타포의 문제에 있어서
장애인의 섹슈얼리티를 다루고 있다는 <오아시스>는 정작 욕망에 있어서 여성은 항상 타자의 개념이었다는 기존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은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될지언정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오아시스>에서 공주의 섹슈얼리티는 주체적인 종류의 것이 아닌, 대상화된 객체에 불과하다.
공주의 섹슈얼리티는 전과자로서의 종두가 갖는 상대적 박탈감을 벌충시켜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는 영화 <나쁜 남자>의 경우에서도 나타나는데, 그 영화에서 영화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정서는 무엇이었던가.
선화의 (어떤 의미에서의) 타락과 비극을 모조리 설명해줄 만한 포용력을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는 무엇이었던가. 바로 위대하신 '사랑'이라는 욕망이었다. 물론 그 욕망은 애시당초 여남이 공통적으로 갈구하던 것이 아닌, 어느 한쪽(남성)에게서 시작되어 강제적으로 다른 한쪽(여성)의 삶과 맞바꿔 이루어낸 욕망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의 <나쁜 남자>에 대한 비판처럼, 깡패/대학생이라는 사회자본적 계급보다 우선시되는 건 언제나 남성/여성이라는 성적 계급이라는 것(하나 더 있다면 'All is fair in love and war' 정도?)을 절실히 통감하게 한다는 면에서 <오아시스> 역시 전과자라는 낮은 사회적 계급의 남성의 욕망과 그의 계몽을 위해 철저히 여성의 욕망과 인권은 유린된다.
자신을 강간하려 든 사람 혹은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버린 남자를 사랑한다는 설정은 남자감독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성적 환타지다. 그 어떤 여성도 강간이라는 메타포를 쉽게 사용할 수 없다. 강간이 얼마나 한 인간(보다 정확히는 여성)의 삶에 비참하게 가해지는 폭력인지는 비록 직접적으로 겪지 않아도 '여성'이라면 충분히 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메타포는 단지 메타포로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랑지상주의자 이창동은 정말로 사랑에 눈이 멀었던 건지 그 잘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강간'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지만, 그 메타포는 여성관객으로서 보기에 매우 심기가 불편한 작위적 설정에 불과하다.
당신은 당신을 강간하려다 실패한 낯선 사람을,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는 익명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내 경우였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강제폭력을 당하는 심정의 처참함과 육체적 상처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그러한 설정이 공주(라는 장애인여성)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은 장애인여성을 섹슈얼리티의 주체로 인정'할 수 있는' 작가의 시선이라는 비평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건 혹자의 말마따나 옆집 부부의 섹스 장면을 의도적으로 삽입한 뒤 공주에게 (저들과 같은)'너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홍종두라는 것을 부추기는 저급한 장치에 불과하다.
일찍이 영화 평론가 정성일이 김기덕 감독을 평했듯(나는 김기덕(의 영화들)이 싫다. 그러나 이 말이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 김기덕(의 영화들)은 틀렸다고 읽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틀렸다고 말하는 순간(그런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옳다고 말하는 순간) 대부분 그것을 증명하려 들기 위해서 갑자기 김기덕의 영화들을 정치적, 미학적, 과학적(?), 또는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대상으로 전화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김기덕의 전략이며, 내심 바라는 바이다. 여기서 그것을 대상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를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 무시무시한 잔혹함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세상의 형상에 놀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방어하게 만든다.), 이창동 감독 역시 모든 가능성을 극한까지 몰고 간 뒤 그에 대한 반론은 미학적 몰이해에서 기인한다는 인상을 사정없이 풍김으로써 모든 반론을 원천봉쇄한다.
게다가 <오아시스>의 경우에서는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주제 속에 숨겨진 숱한 폭력과 헛된 환상은 각종 장치(관객으로 하여금 종두를 이해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영화 편집 등)들로 교묘하게 감춰지고, 비단 그들의 소외에 대한 관객의 공감을 유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소외'가 실은 관객 스스로에 의한 것이라는 윤리적 물음을 던짐으로써 모든 비판을 슬며시 비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오아시스>를 비판하는 자는 마치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것과 대립항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게 되고 그로 인한 암묵적인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3. 키치(Kitsch)
키치는 아주 연속적으로 빨리 두 개의 눈물을 흐르게 만든다. 처음 눈물은 잔디 위를 달리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라고 말한다. 두 번째 눈물은, 잔디 위를 달리는 아이들을 보며 모든 인류와 함께 감동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라고 말한다. 키치를 키치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두 번째 눈물이다.(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오아시스>는 키치다. 누구나 알아차릴 만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향을 다룬다. <오아시스>가 표상하는 세계는 사실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꿈꾸는 장밋빛 세계이지만, 역시 그건 절대 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안도한다. 그들의 아픔을 잠시나마 공유했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밀란 쿤데라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오아시스>를 보고 나온 우리의 두 개의 눈물은, 첫 번째 눈물은 그들의 고통을 공감했다는 점에서, 두 번째 눈물은 많은 관객들과 <오아시스>에 대해 '넘 감동적이었어, 아름다운 사랑이었어'라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데서 흘리는 눈물이다.
그리고 <오아시스>를 키치로 만드는 것 역시 두 번째 눈물인데, 우리는 <오아시스>에 대한 미사여구적 담론을 만들어내면서 소외된 자들에 대해 놀라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스스로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동하며, 마지막으로 이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동정이나 인간성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매정한 인간으로 매도하기 때문이다.
결국 로맨스와 휴머니즘이라는 널리 공감할 만한 주제로 환원하게 되어 있는 <오아시스>는,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기존의 방식이랄지 가부장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스토리 전개와 엔딩 장면에서, 대중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답습하는 전형적인 키치이다.
#. 끝으로
내게 <오아시스>는 비정상으로 규정 당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비정상이도록 느끼게 만드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건 스스로를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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