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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책 바오 닌- 전쟁의 슬픔

by eunic 2005. 2. 25.

바오 닌 <전쟁의 슬픔>
/ 정희진

그 옛날 공자도 알았던 것 같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언어가 없을 때 혹은 자기 상처를 들여다 볼 용기가 없을 때, 인간은 고통을 겪고도 그로부터 배우지 못하는(困而不學) 상태를 반복한다. 냉전 시대.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입장일 뿐이다. 제3세계는 바로 그들의 땅에서 끝없는 대리전을 치러야 했다. 인류 역사상 4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냈던 한국전쟁, 가장 참혹했다는 베트남전쟁. 남한과 베트남은 학살과 이산이라는 공통의 체험을 했지만 우리는 늘 서구의 언어(시각)로 아시아와 만난다.


1991년 출판된 이래 10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베트남문인회 최고상, 영국 <인디펜던트> 최우수 외국소설, 당국의 검열로 재판을 찍지 못했지만 남베트남 퇴역 군인의 5분의1 이상이 읽었다는 베스트셀러. 베트남전쟁 참전 작가 바오 닌(Bao Ninh)의 <전쟁의 슬픔>(박찬규 옮김, 예담 펴냄. 1999)은 베트남어-한국어로 직접 번역되지 못하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거쳐 우리에게 왔다.


자기 고통에 치열한 인간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북베트남인민군 바오 닌이 전쟁의 피해자가 아닌 역사의 주체가 되기 위해 선택한 것은 글쓰기였다. 그의 젊음과 영혼은 전쟁으로 짓이겨졌지만, 자신이 경험한 살인, 인간의 추악함, 공포를 불러오기 위해 그는 다시 청춘을 바쳤다. 망각이 아니라 기억이 그를 구원한 것이다. 그는 람보나 맹호부대의 영웅, 베트남 민족해방사의 모범으로 읽히는 <사이공의 흰옷>의 투사, 모두 전쟁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본다. 전쟁을 겪은 병사의 목소리는 어쩌면 같을지 모른다. "어떻게 그처럼 많은 영웅이 나올 수 있습니까 영웅이 그렇게 많았다면 우리는 전쟁에 졌을 것입니다." "나는 죽어서 천당에 갈 것이다. 왜냐면 살아서 지옥에 있었으니까."


좋은('해방') 전쟁, 나쁜 전쟁이 따로 있을까 모든 전쟁은 그저 악일 뿐이다. 전쟁과 군대는 그 자체로 성별화된 제도이며 남성들간의 계급 정치다. 평화를 위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자의 아들은 군대에 가지 않는다. 이들은 전쟁으로 돈을 벌고 권력을 얻는다. 정작 전쟁에 참가한 혹은 끌려간 남성은 전쟁의 이익과 무관하다. 안타까운 것은 전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남한의 참전 군인들이 자신을 주체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베트남전에서 저질렀던 반인도적 행위를 보도한 신문사에 난입해 기물을 부수는 것으로 주체가 된다. 군 가산제 폐지론에 화가 난 남성들은 현행 징병제를 문제 삼는 대신, '2등 국민'으로서 군대에 가지 못한 여성이나 장애인을 공격함으로서 피해를 보상받으려 한다. 이전에 참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이후에 참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전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일지 모른다. 우리는 왜 전쟁의 슬픔을 성찰하기보다 누구에게 분노를 전가할 것인가에 열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