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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김선일과 윤금이

by eunic 2005. 2. 28.
김선일과 윤금이
[한겨레 2004-06-28 17:47]
[한겨레] 모든 비판은 비판 대상에 권력을 부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지금 ‘어떤 동영상’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가 아무리 ‘다른 목소리’를 낸다 할지라도, 언급 자체가 상황을 더 악화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섭고 감정적으로 혼란스럽다. 동영상을 보지 말자는 외침을 홍보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 ‘8미리’는, 자상하고 따뜻했던 남편이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여 스너프 필름을 만들고 즐겼던 사람이었다고 밝혀지자 부인이 수치심에 자살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영화의 감독 조엘 슈마허의 극우적 가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생각할만한 미디어 비판서였다.

길거리에서 매춘 여성이 고객을 호객하는 행위는 불법이지만, 그 장면을 화면에 담는다면 예술 행위가 된다. 미디어의 힘이다. 미디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바로 메시지다.

청일 전쟁이 청나라도 일본도 아닌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처럼, 남성들의 영토 다툼이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약자의 몸은 강자의 전쟁터가 된다. 한미 양국 정부 지도자들의 소스라칠만한 무능과 폭력성은,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착하고 성실했던 한 청년의 몸에 깊이 새겨졌다. 지배 폭력과 저항 폭력을 둘러싼 폭력의 정당성 문제는 늘 논쟁거리지만, 이번 사건은 ‘약자의 폭력’도 모든 이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존재 의의 자체가 대량 살상 무기인 부시 행정부, 이번 사건의 ‘가해자’인 이라크 저항 조직, 동영상을 유포하고 보는 한국인들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폭력을 행하는 사람,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 이 모든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 셋 중 하나다. 폭력의 일상화는, 바로, 상황이 되면 나를 포함하여 누구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다.

언론과 정부에서 동영상 유포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와 처벌 의사를 밝힌 것은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다행스럽고 잘한 일이다. 이같은 조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실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국가는 자신이 보호해야할 국민이 누구인가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인다(이번 희생자가 고위층 자녀였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국민들의 믿음은 그러한 상황의 반영이다). 여성이 참혹하게 죽은 사건일 경우에는 정부는 물론, ‘진보’ 세력도 비극적인 희생자의 사진을 유포하고 최대한 활용한다.

1992년 기지촌 여성 윤금이가 미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사진이나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소녀의 사진은, 여성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잔혹성을 알려 반미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당당히 전시되었다. 아예 포스터가 만들어졌다. 평화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어느 남성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그런 사진들이 게재되었는데, 여성들이 항의해도 남성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여성들이 반미의식이 없다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진보’ 남성들의 태도는, 이번에 동영상을 유포시킨 미국의 잔혹 전문 사이트와 똑같다. 이들 역시 항의의 표시로 서버를 다운시킨 한국 네티즌들을 ‘사이버 테러리스트’라며, 자신의 유포 행위는 “테러리스트들의 잔인성을 세계에 알려 다시는 이런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모든 폭력 상황은, 폭력을 행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사이에 그 어떤 연민도 공통점도 있을 수 없다는, 주체와 대상의 극단적 이분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들이 한국 네티즌들을 사이버 테러리스트라고 한 것처럼, 9·11테러 당시 울부짖던 미국인들처럼, 지금 동영상 유포에 분노하는 한국인들처럼, 누구나 자신의 문제일 때는 폭력에 민감하다. 이러한 민감성이 다른 사람에게도 확대되어야 한다. 여성이든 이라크인이든 세상사람 모두가 인간의 범주에 들어온다면 폭력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우리 언니는 고 김선일씨가 뉴스에 나올때마다 "저 사람 부모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라고 나에게 물었다.
자기 자식이 절규하는 목소리를 그저 화면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식의 고통이 손마디 마디 전해올텐데... 말이다.
나는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지만 언니는 시종일관 그 가족들의 아픔을 걱정했다.

박노자는 이라크 전쟁장면을 미디어를 통해 합법적으로 보여주는 것 역시 스너프 필름의 일종이라고 한 바 있다.

또한 내 친구와 나도 미군범죄 일지를 여러번 보게 되면서, 피해자가 느낀 공포감을 전이받았다. 외국인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의 고통을 겪고 있는 선생님 중에는 우유를 마시지 못한다고 한다. 남자의 정액이 연상되기 때문에.

정신대문제협의회 일부 회원들은 선생님이 해준 고통의 역사를 들으면서, 피해의식이 느껴져 남편과 성생활에 있어서 문제를 겪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듯, 미디어라는 이름으로,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윤금이씨의 사진은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고, 나도 또한 그러한 사진을 여러번 보고 사람으로서 상처가 되었다.

내가 기다리는 한겨레 '정희진 칼럼'은 오늘도 배반하지 않았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어느 누군가는 딴지를 걸면서, 다르게 생각해봐야 할 것에 대해서 시기적절하게 지적해준다.

그녀의 글을 보고나서야,
왜 백인 인종이 유린당하는 장면을 알 자지라 방송을 통해서 볼 수 만 있었는지 이해가 가고,
모든 고통의 장면들은 피해자에게는 공포를, 가해자에게는 정말 미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