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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인물과사상] 멈춘 진보와 ‘이영훈 사건’

by eunic 2005. 2. 28.

'이영훈', 진보, 한국사회

/정희진

<인물과 사상>, 2004년 12월호

멈춘 진보와 ‘이영훈 사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무지몽매한 한국 남성들을 깨우쳐 주는 감동적 에세이를 써 달라”는 <인물과 사상>의 청탁 의도에 도전하고 싶다. 나는 모든 남성이 여성문제에 대해 ‘무지몽매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남성을 깨우치는 데’도 별 관심이 없다.
‘여성주의 정치학’이 내 삶의 다양한 준거 중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내가 ‘계몽적인 인간’이 될까봐 몹시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계급, 지역, 학벌, 성별 제도 등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지배 규범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어느 순간 타인을 설득하는 위치에 서지만,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진 정치적 입장의 전부는 아니다.
사안에 따라, 동일한 사람이 계몽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계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계급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사람이 여성문제나 지역 차별 문제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 있고(실제 대개 그렇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성별 문제에는 예민한 편이지만, 서울토박이, (아직까지는)이성애자, 비장애인으로서, 내가 ‘편리’와 권력을 누리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간혹 ‘가해자’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문제는 자신을 뒤돌아보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것이다.
사회운동은 매순간 새롭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운동이란 정해진 어떤 입장을 현실에 적용, 실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우리/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계속 걷지(進步)않고 멈춘다면(守舊), 즉, 삶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억압과 고통을 복잡하게 사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수구 세력’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입장을 변화와 성찰 없이 믿으면서, 혹은 자신이 하는 정치가 정치의 전부하고 생각하여,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타인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 이것은 폭력이다 - ‘진보’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지난 9월 방영된 MBC TV 프로그램 <MBC 100분토론 - 과거사 진상 규명 논란> 편에서, 서울대 이영훈 교수가 ‘군 위안부’ 관련 발언으로 여론의 집중 공격을 받은 것은, 현재 한국사회 ‘진보’ 진영의 수준을 정확히 반영하는, 아니, 우리사회가 어떤 사회인가를 말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주제로 최소한 10권 이상의 책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그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연(內燃)하고 있던, ‘국가’, ‘역사’, ‘근대성’, ‘식민지’, ‘민족’, ‘민족주의’, ‘탈식민’, ‘젠더(성별)’, ‘여성의 성’, ‘이분법’, ‘진보’, ‘남성성’, ‘진실’, ‘화해’, ‘노무현 정권’... 등등 나열하기에도 숨찬, 지난 세기 한국사회를 구성해왔던 수많은 코드가 한데 얽혀, 폭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은, “과거사 청산에 반대하는”, “정신대 할머니를 매춘 여성 취급한”, “일본 우익과 같은” 이영훈 교수 개인에 대한 여론 재판, 단 한 가지였다.

이 사건은 수많은 이슈를 안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주로 두 가지 측면에 논의를 한정하고자 한다.
하나는, 성(차)별과 국민국가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혹은 활용하면서, ‘주류’ 억압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는 한국의 남성 중심적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보수, 진보에 상관없이 정신대 문제를 ‘민족의 아픔’ 혹은 ‘민족의 수치’라고 보는 한국사회의 시선과, 강제로 끌려간 성폭력 피해 여성을 ‘자발적 공창’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우익의 논리가 모두 동일한 인식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닮은 아들들의 폭력
현재 한국사회에는 재중교포(‘조선족’, 왜 재미교포는 ‘조선족’이라고 하지 않는가?)의 한국 국적 취득 문제와 관련하여, 세 가지 정치적 입장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진보적 입장으로, 그들도 우리 민족의 일원이므로 국적을 허용하여 이들이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노동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보수적 입장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민족이면 곤란하므로 국적을 허용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세 번째 입장은, 한국사회에서 한국 국적 소유자에게만 시민권과 노동권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허용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합법적으로 노동할 권리를, 왜 국적을 기준으로 제한 하냐는 것이다. 예전부터 주한 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이나 다국적 기업의 주재원들은, 한국 국적 없이도 자유로이 합법적으로 노동하고 있다.
재중교포들도 서구에서 온 백인 이주 노동자들과 같이, 한국 국적이 없더라도 합법적으로 노동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재중교포의 합법적 노동권을 위해 국적을 허용하는 것은, 한국인만 대한민국의 합법적 시민이라는 국민국가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재중교포들이 중국인이라 할지라도 노동권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허용하지 말자”는 것이지만, 그 이유는 보수 진영과 정반대이다. 이처럼 마지막 세 번째 입장은 앞의 보수, 진보적 입장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독자적인, 새로운, 폭넓은 정치적 입장이지만, 현상적으로는 보수 진영과 같은 “반대” 의견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MBC 100분토론 - 과거사 진상 규명 논란>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이영훈 교수의 시각이 위의 세 번째 입장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이영훈 교수가 한나라당‘측’ 토론자로 출연한 것은 잘못이다).
이영훈 교수처럼 ‘지나치게’ 진보적인 사람들, 특히, 그 ‘지나친’ 진보적 입장이 여성 문제에 대한 것이고,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진보 진영과 다른 시각일 때, 이런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로 매도되기 쉽다.
한국사회에서 여성 문제는 정치적 문제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여성 억압에 대한 입장은 진보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몇 년 전 진보 진영과 시민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던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많은 ‘진보 인사’들이 ‘안기부 프락치’라고 몰아세운 경우나, 유시민 의원이 개혁당 활동 당시, 당내 성폭력 사건 해결을 요구하는 여성 당원들에게 “해일이 일고 있는데, 겨우 조개나 줍고 있냐”고 비난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는 사건들이다.
여기서, “해일”은 여/야, 좌/우 갈등 등 남성들간의 정치, 즉, ‘진정한’ 정치를 의미하며, “조개를 줍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를 비아냥거린 표현이다. 여성 억압이나 성폭력은 너무나 사소한 문제라는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파리의 연인>, <다모>, <살인의 추억>등 남성 주인공 두 명이 등장하는 최근의 문화적 재현물들은, 김영삼 정부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된 국가 권력 이양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이 텍스트들은 모두 ‘아버지’없이 ‘아들들’, ‘형제들’간의 갈등과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데, 이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군사 파시즘 세력이 더 이상 정권을 획득할 가능성이 없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비유한다면, ‘좌파’와 ‘우파’간 투쟁이 ‘아버지와 아들의 드라마’라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민주화 운동 세력 간에 국가 권력이 승계, 교환되는 양상은 ‘아들들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아들들’이 힘을 갖기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자신들에게 가했던 논리와 규범을 다른 진보 세력(대표적으로 여성주의 진영)에게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70-80년대에 보수 세력은 부정부패와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세력에게, “너희들, 한국이 그렇게 싫으면, 북한 가라”는 식으로 탄압했다.
이런 인식 체계 안에서 민주화운동은 ‘친북’을 의미했고, 이 같은 논리는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전가의 보도가 되고 있다.

<100분 토론>에서 열린우리당 송영길 의원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일부 발언은, 그들이 폐지하고자 하는 국가보안법의 논리와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이날 토론회 내용은 MBC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영훈 교수 - “국가 주도의 과거 청산은 한계가 있다. 민간 차원에서 성찰과 고백 등이 더 중요하다”

송영길, 노회찬 의원 - “그럼, 당신은 과거사 청산에 반대하나?”

이영훈 교수 - “군 위안부 시설은 한국인 병사들도 이용했다. 군 위안부 동원은 한국 내부의 가부장제도 문제 원인의 일부다”

송영길, 노회찬 의원 - “그럼, 일본은 책임이 없다는 건가?”

이영훈 교수 - “기생 관광, 기지촌 성매매와 전시 성폭력이 전혀 관계없다고 인식한다면, 나는 대단히 유감이다. 두 문제 모두 여성 억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송영길, 노회찬 의원 - “그럼, 당신은 일본 우익이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매춘 여성이란 말인가?”

이날 (우종창 월간조선 편집위원 같은 ‘과거사 청산 반대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송영길, 노회찬 의원의 사고방식은, 인간과 세계를 a와 not a의 대립 구도로만 보고, 전혀 다른 c의 입장을 a와 not a의 논리로 환원하는 전형이었다.
c의 입장에 대해 너무도 무지할 뿐 아니라, 자신의 무식과 성찰 없음을 ‘진보’와 ‘민족의 아픔’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것이 파시즘이다.
이 날의 토론 내용으로만 본다면, 우종창 위원과 송영길, 노회찬 의원은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가장 생산되지 말아야 할 유형의 리더라고 본다.

위에 적은 이영훈 교수와 송영길, 노회찬 의원 사이에 오고 간 대화는, 현재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의사소통 방식이다.
송영길, 노회찬 의원의 사유 방식과 대화 방식은, (중산층-이성애자-비장애인-‘명문대’ 출신-서울 혹은 경상도 지역 남성들의 삶의 경험에서 구성된) 기존의 진보/보수, 좌파/우파라는 정치적 전선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정치라고 믿으며, 다른 억압을 자신의 정치적 전선으로 환원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이나 각각 15%를 차지하는 장애인, 동성애자, 인구의 거의 절대 다수를 구성하는 ‘비명문대’ 출신 지방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기존의 정치 개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사 청산이 ‘국민’ 대다수와 관련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과거사 청산을 주장하는 담론에도, 제도 정치권에서 논하는 찬성/반대 외의, 기존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구성된 또 다른 전선이 있다는 것이다.

성별 제도의 문제는 기존의 진보/보수와 전혀 다른 차원의 정치이다. 맑시스트나 파시스트나 집에서 설거지 안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기존의 정치는 여성 억압과 여성의 노동 ‘위에서’ 존재 가능한 것이다. 성차별은 기존의 정치가 작동하기 이전의 정치이다.
위의 대화 방식은 내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내가 ‘박근혜 패러디’를 비판하면, “그럼, 너는 한나라당이냐”는 반응이 돌아오는 식이다.
나는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의 정치적 입장에 반대하며, 순전히 행정 수도 이전 공약 때문에 노무현 후보에 투표한 사람이지만, 여성으로서 ‘박근혜 패러디’에 분노했다.
내가 ‘박근혜 패러디’를 비판하는 글을 한겨레신문에 썼는데, 대개의 ‘진보 인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선배 여성운동가들로부터, “너는 70년대에 안 살아봐서 박정희가 얼마나 지독한지 모른다.
‘박근혜 패러디’를 비판하다니, 너는 정치의식이 없다”는 항의를 들었다. 이 말은 여성의식은 정치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졸지에 ‘박근혜 지지자’가 되었다. 행정 수도 이전에 찬성하면서도, ‘박근혜 패러디’를 비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행정 수도 이전을 지지하면, 여성 비하 사건인 ‘박근혜 패러디’도 지지해야 하나?

과거사 청산 담론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이영훈 교수 발언에 대한 여론의 분노는, 우리사회의 국가주의와 매춘 여성에 대한 혐오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한국사회의 남성성과 관련이 있다. 왜 일본의 전쟁 참가자들 중에는 평화운동가가 되는 사람도 있는데, 한국의 베트남 참전 ‘용사’들은 극우 세력이 될까?
왜 우리사회에는 제주 4.3과 그 수많은 양민 학살 사건들, 광주 항쟁 등 한국 현대사에서 ‘가해자’로 참여한 사람들의 ‘커밍아웃’과 자기반성이 그토록 없을까?

사실, 한국 사회(남성)는 단 한 번도, 여성을 제대로 ‘보호’한 적이 없다.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한국 남자들은 여성을 외세에 ‘팔아먹고’, 그로 인해 국가를 지속하고 생계를 유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남성 지배 세력은 언제나 ‘포주’였다. 고려시대, 원나라에 조공으로 받쳐졌던 환향녀(還鄕女) 여성들을 ‘화냥년’으로 몰았고, 70년대 초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이 철수하려하자 기지촌 매춘 여성 ‘제공’을 조건으로 주둔을 애원했고, 달러를 위해 기생 관광을 장려했다.


한국 남성들은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여중생 사건을 규탄하는 ‘평화’시위에서도, “너희가 우리 여자를 강간했으니, 우리는 너희 여자를 강간 하겠다”는 ‘fucking USA'를 열창한다.
심지어, 주한미군사령관 부인과 부시 대통령의 부인을 납치, 감금하여 성폭행한다는 <태극기를 꽂으며>라는 ‘반미에로’ 영화를 만들고 즐긴다.
‘군 위안부’ 여성들의 생애사 기록들은, 전시 일본군에 의한 강간보다, 귀국 이후 한국 남성에게 당했던 구타, 성폭력, 학대가 그녀들에게는 더 큰 상처였음을 보고하고 있다.
이럴 때, 한국 남성과 한국 여성을 같은 ‘한국인’의 범주로 묶을 수 있는가? 한국 남성은 일본과 미국의 피해자이기만 한가?

토론회 전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과 귀를 덮었고, 한국인들을 절대로 성찰, 사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영훈 교수는 국가 폭력 등 인권 침해 사건은 규명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민간 차원의 성찰과 자각 없는 국가 주도의 과거사 청산은, ‘진정한’ 청산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의 청산이란 과거의 소수 범죄자들을 들추어 모든 역사적 책임을 덮어씌우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성찰의 거울로 삼아 사회 전체가 도덕성을 고양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과거사 청산’을 기획하는 것은, 수많은 차원의 ‘청산’ 중의 하나일 뿐, 그것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가 자행한 국가 폭력을 다시 국가의 권위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것은, 국가만을 의미 있는 정치적 주체로 보고 국가를 모든 문제 해결의 최종 심급으로 간주하는 국가주의적 발상이 녹아있다.
이영훈 교수의 이같은 견해는, 그간 국가주의를 비판해 온 조혜정, 김은실, 권혁범 등 한국의 논자들이나 우에노 치즈코, 도미야마 이치로 등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이전부터 논의되어 온 것으로, 새롭거나 ‘이상한’ 논리가 아니다.

정신대 문제가 한국사회의 성차별 때문이기도 하다는 역사 인식을, 일본의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연결하는 것은 대단히 단순하고 위험한 발상이다.

지금 우리에게 의미 있는 탈식민주의는 과거사의 책임을 일본에게 물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를 성찰하는 일이다. 맑스 레닌주의보다 금기시되었던 일제 점령 하 1920년대의 민족주의와, 아류 제국주의 국가로서 이주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2004년 한국의 민족주의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우리 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민족의 범주에서 제외된 여성이나 장애인, 이주 노동자에 대한 억압을 비가시화하려는 의도로 연결되기 쉽다.
저항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의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는 것이다. 여전히 일본으로부터의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한국 민족주의의 주된 내용일 때, 한국사회의 ‘탈식민’은 요원할 수밖에 없고, 동남아 등 다른 국가에 대해서는 ‘가해자’인 자기 위치를 성찰하기 어렵게 된다.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매춘 여성?
이영훈 교수는 정신대 문제와 관련한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한 ‘청산’을 요구했다.
성노예제 조직과 관리라는 일본의 전쟁 범죄가, 일제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강제 동원 과정에서 협조하고 위안소를 위탁 경영한 한국인 관리자, 위안소를 찾은 한국인 병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일부 군대에서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자행된 여성의 성 착취,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사실상 방조된 미군 기지촌에서의 성 매매 문제도 청산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군 위안부’ 문제를 민족 모순으로만 제한하는 시각을 비판하면서, 성폭력과 성매매를 남성 중심 사회에서 발생하는 ‘동일한’ 여성 인권 침해 사안으로 파악한다.
때문에, 일제가 물러간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 인권 침해로서의 성폭력과 성매매는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현실까지도 청산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남성 중심의 획일적인 언어와 인식이 너무나 지배적인 한국사회에서 수용 이전에,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 남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그의 급진적 인식은, 나와 내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을 놀라게 했지만(이후 그의 ‘해명서’는 더욱 감동적이다), 곧바로 송영길 의원에 의해, ‘정신대 = 공창제’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으로 매도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공식 영역(결혼 제도)과 비공식(성매매, 성폭력...) 영역 모두에서 성의 자유를 누리지만, 여성에게는 가족 안에서 출산을 위한 성만을 허용한다.
남성은 두 영역을 마음대로 넘나들지만, 여성이 비공식 영역의 성적 제도와 연관되는 것은 낙인을 의미한다. 특히,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극심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성활동(섹슈얼리티)이, 성별에 따라 이토록 의미가 다른 것이다.
남성의 계급과 정체성은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성의 지위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남성은 ‘정숙한 남성’과 ‘문란한 남성’으로 분류되지도 않고, 남성의 가치가 ‘순결한 남성’과 ‘타락한 구매자/판매자’로 정해지는 경우도 없다.
이처럼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그렇지 않지만)여성의 성은, 여성의 자아와 인격, 가치를 좌우하는 주요 요소로 간주된다. 그래서 성폭력과 성매매 제도가 여성을 통제하는 권력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내가 가장 두려웠던 사실은, 이 교수 발언에 대한 ‘온 국민’의 분노, 그 감정의 정체가 매춘 여성에 대한 완벽한 타자화와 혐오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으로 인식하는 근거가, ‘자발적인’ 매춘 여성에 대한 혐오여서는 안 된다.
나는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매춘 여성이라는 구분보다, 성폭력과 성매매가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현재 대한민국 여성들은 일제에 의해 집단 성폭력을 당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성폭력은 만연해있다.
일제 시대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 기지촌 매춘 여성들, 2004년 여성 노동 인구의 4분의 1에서 5분의 1에 이른다는 성산업 종사 여성들, 그리고 밤길 걷기를 두려워하는 여성들의 일상적 공포는 모두 같은 원인으로 인한 다른 현상들이다.

한국 남성에게 성폭력 당하면 ‘개인적인 일’이고, 일본 남성에게 당하면 ‘민족의 아픔’인가?
성폭력은 가해 남성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성격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의한 폭력이라는 사실이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여성을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매춘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를 정하는 방식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성매매와 성폭력은, ‘자발’과 ‘강제’라는 ‘반대’지만, 여성의 시각에서는 구별될 수 없는 연속선이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과 성매매의 원인이다.
남성의 성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여성을 남성의 성 권력의 희생자와 ‘자발적으로 남성의 욕구에 부응한’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성폭력 피해 여성이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모두, 결국은, 남성을 위한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나는 일본 우익의 주장대로, 한국 여성들이 ‘성매매’로 전쟁에 ‘참가’했다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며, 당연히 사과,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제시대 ‘군 위안부’ 문제의 가시화와 역사화는 물론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는 여성의 성 피해가 민족주의의 이해와 일치할 때에만 문제시된 것이기도 하다.
대다수 한국 남성들이 일제시대 ‘군 위안부’ 경험을, “우리 여성들을 육체적으로 파괴함으로서, 여성은 물론 겨레 전체를 정신적으로 파괴한 민족의 수치”라고 본다.
즉, 전시 성폭력을 여성 인권 침해라기보다는, 여성의 생식 능력 훼손이라 보고 이를 민족 말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때 여성의 몸은, 남성 집단 간 갈등을 의미하는 ‘정치’에서, 가장 확실한 동원의 토대로 기능하게 된다.
한국 남성들이 “우리도 일본여자를 강간하자"고 심심찮게 말하는 것은, 여성의 몸을 볼모로 한 남성 정치학의 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occupation of the womb)’을 의미하게 되고, 일제의 경우처럼, 그리고 한국이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이 공식적인 전쟁 정책이 되는 것이다.
‘군 위안부’ 사건은 민족 모순이자, 여성 인권 침해이다. 이 사건을 민족 간 갈등으로만 환원하려는, 한국 남성들의 그 집요한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국 남성들이 한국 여성에게 행하는 성폭력과 성매매는 괜찮다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영훈 교수가 질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