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페미니스트가 이영훈 씨를 옹호한 이유 그리고...
<100분 토론-이영훈 논란>을 두고 ‘옹호’와 ‘반론’의 여러 입장들의 반목이 빠지고 있는 함정 중의 하나는 그의 발언이 ‘청산 반대냐 찬성이냐’에 대한 판단 여부이다. 이영훈 교수의 발언의 문제성은 그의 태도가 “청산의 반대”이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제시한 방법이 “올바른 청산이 되기 위한 해법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도 아니다.
오늘 <한겨레>에 실린 칼럼에서 여성학자 정희진 씨가 지적하듯이, “현재의 청산 주장이 국가주의적 사고에 기초해있다”는 이영훈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리고 이 교수의 발언이 “군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으로 인식하는 근거가 ‘자발적 매춘 여성’에 대한 혐오여서는 안 된다”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발언은 매우 소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교수의 발언은 ‘실수’가 아니라 명백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만약 정희진 씨가 지적하고자 하는 그런 내용을 말하고자 했다면 이영훈 교수는 토론회 자리에서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꼭 강제로 동원되어야만 군 위안부입니까?”라고 물었어야 했다. 이 차이를 우리 사회는 인지할 수 있는가?
이영훈 교수가 그렇게 묻지 않았던 것은 진중권 씨의 말처럼 “전달의 실패가 아니라 좀 더 깊은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것의 원인은 진중권 씨의 지적과 전혀 다르다.) 이영훈 교수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적’으로 삼은 것이 단지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역사 청산 논쟁”이었을 뿐,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역사관의 “남성적 폭력성”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이영훈 교수의 발언은 다시 한 번 ‘실수’이며, 정희진 씨가 이영훈 교수를 옹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언어와 ‘그’의 언어가 사실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우리는 짚어야 한다. (이영훈 교수를 변호하는 이들(진보누리에 올라오는 글을 비롯하여)이 이 차이를 모르는 이상 진정한 '변호'는 불가능하리라 본다.)
“종전 이후, 일본의 전쟁범죄 중에서 강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당연히 그 강간 범죄는 전쟁범죄로 인정받았지만, 이 경우 강간은 살인이나 약탈 등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았고 단독으로는 심의되지 않았다.” 이 말은 김부자라는 학자가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글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이 사실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알 수 있는가. 막말로 숫처녀든 아니든, 나이가 어리든 아니든, 강제로 끌려갔든 아니든 ‘식민지 지배’라는 구조적 범죄로서 ‘위안부’ 제도는 명백한 폭력이며, 전쟁범죄이다.
페미니즘이 이영훈 교수의 발언을 굳이 ‘옹호’한다면, 그것은 ‘꽃다운 어린 나이에 멋모를 때 끌려가’ ‘나이 많고 폭력적인 일본군인’에 의해서 ‘유린’되었다는 식으로 ‘군 위안부’ 문제를 볼 때 일어나는 ‘또 다른 성폭력’에 의해 고통받아왔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어디에 ‘분노’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의 발언은 ‘그들’의 발언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왜냐하면 그의 발언에는 ‘분노’가 없기 때문이다. 비단 토론회의 자리 배치만 문제였던가. 그가 토론회장에서 자신의 논지를 펼 때 상대방에게 보였던 태도, 표정, 말투는 ‘경멸’이었지 ‘분노’가 아니었다.
‘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 식민지 폭력의 문제에서 ‘강제성’만 문제가 되는가, 거기에는 심지어 ‘위생’의 문제까지 끼어있다. 실제로 일본의 우익 역사학자들은 ‘객관적 근거’를 들어 군 위안부 시설의 ‘위생성’을 강조하곤 한다. 거기에 대해 “실제로 안 깨끗했다”라고 맞받아칠 것인가. 실증적 역사학의 함정은 여기에 있다. 아마 이영훈 교수는 “깨끗하든 안 하든 군 위안부는 범죄이다”라고 말하겠지만, 그런 그가 ‘국가주의 청산론’에 대적했던 무기야말로 일본 우익들이 들고 있는 ‘위생성에 대한 객관적 근거-실증’과 같은 것이 아니었는가.
‘이영훈 논란’이 터졌을 때, 의외로 페미니즘 진영의 즉각적인 반응이 적었던 것은 매우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희진 씨의 글을 읽으면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그 글이 섣부른 ‘실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정희진 씨는 자신이 ‘분노’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기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는 그렇지 못하다. 한 페미니스트는 이영훈 교수를 비판하면서 ‘군 위안부’가 왜 ‘역사’ 문제냐는 짧은 논평을 했다. 그 말처럼 이영훈 교수의 발언 안에서 '군 위안부 문제'는, '문자'로는 그랬을지 몰라도 '언어'로서는 ‘역사적 문제’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정말 무서운 것들은 누구인가. ‘우리 할머니’들이라고 말하는 민족주의 청산론자들과 일본 우익들이 같을 수 있는 지점, ‘탈국가적 논의를 해체한다’는 것이 일본의 실증주의자들과 같을 수 있는 위험성. 그것이 진짜 위험이다. 그런 위험을 모른다면,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의 이영훈에 대한 옹호적 이해와 군 위안부 분들의 이영훈 교수에 대한 분노가 어떻게 ‘다른’ 편이 아니라, ‘같은’ 편인지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2004/09/20 [12:23] ⓒ
누가 썼는지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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