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헐 ‘손끝으로 느끼는 세상’
만난다는 것이 반드시 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36살 이후 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하면서 카세트 테이프에 쓴 일기,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음을 전제한다. 그는 어둠의 세계로 나를 초대하면서 어둠과 빛의 경계를 허문다.
“언제 한번 보자.”
이 말은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을 배제한다.
책을 읽고 나서 며칠 전 친구에게 “연말에 한번 만지자”고 했다.
다소 관능적인 이 말에 상대는 당황한다.
나는 다시 말했다.
“언제 한번 목소리를 들려줘!”
그러자 이번에는 ‘들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졌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언어는 없다.
제주도 사람에게 남해는, 남해가 아니라 북해다.
남성에게 성교는 삽입이겠지만, 여성에게는 흡입이다.
힘있는 자들은 그들의 경험을 객관(따라서 중립)이라고 우기며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편과 특수로 가른다.
그래서 ‘정상인’은 일반 교육을, 장애인은 특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영국의 교육학자 존 헐의 <손끝으로 느끼는 세상>(강순원 옮김·2001·우리교육)은
우리 말 제목과 번역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영어 제목(On Sight & Insight)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원제에 대한 나의 주관적 해석은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깨달음에 관하여”
이 책은 정상인의 기준에 더 근접하고자 하는 ‘장애인 성공담’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상인 중심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몸의 정상성,
그 자체에 도전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세요’, 살펴‘보니’ 어떻습니까,
왜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여기를 ‘보세요’….
이처럼 비(非)시각장애인의 언어에서는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무엇이 보는 것이며 어떻게 아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감촉으로 색깔을 본다.
어떤 사람은 읽지 않고 경험으로 안다.
그는 비시각 장애인이 보고 있는 세계가 세상의 일부임을 상기시키면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인식 능력을 상대화시킨다.
지은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시각 장애는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지만,
세상을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시각장애인에게만 가능한 새로운 사유의 세계.
나는 그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낀다.
동시에 같은 소수자로서 그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가 장애인이었기에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면,
내겐 여성으로서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억압받는 자들의 인식적 ‘특권’이다.
거리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밤에 더욱 반짝이고
너무 밝은 태양은 보이지 않는다.
빛과 어둠은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포용하지 않는 것 같다.
흔히 우리는 빛만 승리하고 어둠은 빛 앞에 굴복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어둠과 빛의 대립은 결국 서로를 소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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