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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언니네] 정희진씨 인터뷰

by eunic 2005. 2. 25.

[언니네] 정희진씨 인터뷰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의 저자 정희진

우리사회에서는 지난 20여년 동안 여성운동가들의 노력으로 그간 은폐되었던 가정폭력의 심각성이 비교적 대중적으로 알려졌고,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은 그 구체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가정폭력 추방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법이 제정되었다고 해서 아내폭력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대해 정희진씨는 가정폭력은 그 은폐성 때문에 오히려 여성운동이 활발할수록, 해결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활발할수록 문제의 심각성이 증가하는(드러나는) 특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우리가 아내폭력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과 왜곡된 사실들이 크게 작용했다.
 
정희진씨는 아내폭력에 대한 기존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아내폭력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제시한다. 그간의 가정폭력에 대한 접근은 여성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가족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정희진씨는 가정폭력이 고문과 같은 국가 폭력, 조직 폭력 등 일반적인 폭력과 똑같은 발생 매커니즘을 가졌다고 본다.
스트레스 때문에, 술 때문에 고문을 했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구타 남편은 술이나 스트레스, 열등감 때문에 아내를 때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술을 마셨다고 해서 남편을 때리지 않는다.
또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아내를 때렸다면, 왜 길거리에 있는 사람이나 직장 상사를 때리지는 않은 것일까?
왜 꼭 "집안"에서 "아내"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냐는 것이다.

아내폭력을 일부 남성들의 실수나 버릇, 일탈적 현상으로 취급하는 "때리는 사람=비정상=소수=스트레스"라는 도식화는 아내폭력을 정치적 문제, 권력 관계의 산물, 여성에 대한 범죄가 아닌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보는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런 시각은 일상적으로 만연한 아내폭력을 특수한(일반적이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면서 문제를 축소시킬 뿐이다.
이와 반대로 정희진씨는 아내폭력이 현재 가족 구조의 일탈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 심지어 규범이라고 말한다.
남성중심적인 가족 구조에서 아내폭력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언니네 : 가정폭력이 아니라 아내폭력이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부터 이전의 연구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내폭력에 관한 접근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정희진 : 여성들이 아내폭력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전에 여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문제는 언제나 사적인 문제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반영하잖아요?
저는 인간사의 '어떤 것은 정치적인 문제고 어떤 것은 개인적인 문제인가', 그걸 누가 정했냐고 묻는 거지요.
예를 들면 여성이 경찰에게 강간 당한 것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이고 남편에게 강간당한 것은 가정사로 취급 되잖아요?
이러한 시각은 피해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 남성이 누구냐에 따라 문제의 성격을 달리 취급하는 것이죠.
철저히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아내폭력도 마찬가지예요.
아내폭력을 피해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의 성격이 달리 보인다는 거죠.
이제까지 인권 개념은 가정에서는 적용이 안 되었잖아요?
이걸 여성의 인권 문제로 보면, 여성들의 성역할과 여성의 인권이 양립할 수 없다는 거고, 그래서 폭력이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피해여성들은 끊임없이 인간으로서의 맞지 않을 권리와 아내, 어머니로서의 '도리'(참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죠.
아내폭력이 정상 가족의 일탈(물론 여기서 정상적 가족이란 가부장제의 가족 규범에 충실한 가족을 말한다)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가족구조가 전제하고 있는 성역할(gender role) 그 자체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때리는 남자들은, 사람을 '사람'을 때린 것이 아니라 '집 사람'을 때렸다,
즉 '교육시켰다'고 하거든요.
아내가 잘못해서 때린 것, 그게 남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아내의 잘못을 방기하는 것은 가정을 소홀히 하는 거라고 보는 거죠.
단적으로 말해서 보통 남편의 폭력을 아내가 성역할을 안 한 것에 대한 처벌이라고 받아들이잖아요. 반대로 남자가 성역할을 제대로 안 했다고 해서, 아내가 남편을 때리지는 않죠.
가족=사적 영역/여성/평화/화해, 사회=공적 영역/남성/경쟁/권력이라는 이분법도 여기에 한 몫을 하게 되죠.
가족은 언제나 사랑과 평화로 가득한 공간이라는 강력한 이미지는, 아내폭력을 비가시화하고 이러한 은폐는 결국 폭력을 방조하고 있죠.
아내폭력은 가족 구조 그 자체에서 유래한 것이기에 가부장제가 끝나지 한 아내구타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남편에게 애교를 부려서 안 맞았다, 빌어서 안 맞았다, 그럼 폭력이 없는 거라고 할 수 있나요?
사실, 성매매, 강간, 음핵 절개 등 모든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에 대한 성역할의 연속선의 끝에 있는 문제들이죠.

정희진씨는 이번 논문을 준비하면서 45명의 피해여성과 5명의 가해 남성을 만났다고 한다.
피해자들과의 면담은 정희진씨를 힘들게 했다.
"듣는 자가 성찰을 게을리 하는 순간, 말하는 자의 고통은 대상화된 이야기 거리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상품'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말처럼, 끊임없는 긴장감과 자기성찰을 요구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연구자와 증언자 사이의 평등은 서로의 자원을 나누되, 각자의 자원이 '경험 대 이론'식으로 이분화, 위계화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나는 증언자들의 고통의 목격자가 됨으로써, 다른 상황에서 또 한 사람의 증언자가 된다. 그러므로 연구는 여성주의 지식인의 특권이 아니라 의무이다. 연구 초기의 죄의식은 내가 지식 생산에 특권적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정희진씨는 연구과정의 윤리에 관해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정희진씨는 인터뷰 내내 이 여성들에 대한 미안해했다.
(눈가가 붉어지기도...)
연구 과정에서 피해사례를 얘기한다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운 일인데 다시 누군가에 의해 회자된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니네 : 아내폭력을 연구하면서 느낀 어려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정희진 : 일단 자기 앞에 부상당한 여성이 앉아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연구 이전에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제가 스스로를 '피해자-연구자-운동가'라고 정체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제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힘들었죠.
그리고 가정폭력, 성폭력하면 흔히 생각하는 선입견, 호기심과 선정성에 대한 부담이 있었어요.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주변에서는 제 논문이 이럴 것이다 미리 상상하고 하는 말들이, 솔직히 듣기 싫었어요.
문제의 심각성만 나열할 것이라든지, 때리는 사람은 나쁜 놈이고 맞는 사람은 불쌍하다는 식의 선/악 이분법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즉 이런 문제들은 저널리즘적인 주제이지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언니네 : 선정성의 문제를 말씀하셨는데요, 힘든 부분인 것 같아요. 문제의 심각성이 사건의 잔혹함에 비례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가 하면, 잔인한 사건을 이야기하면 오히려 '진짜야?' 하면서 믿지 않는 부분도 있고. 여성문제에 있어서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하기까지 너무나 어려운 것 같아요.

정희진 : 여성에 대한 폭력은 어떤 면에서 남자는 물론 같은 여성들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상담한 것 중에 여자 2명이 남자 한명에 의해 여관에 끌려갔어요. 보통 생각할 때는 여자 둘이 남자 하나 이기지 못하나 생각이 드는데, 가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 남자가 성기를 꺼내고 위협하는 순간, 이 여자들은 충격을 받고, 굉장한 공포를 느끼게 되어 그것에 압도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자들의 언어가 없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려운 면도 있어요.
여성들에겐 자기 경험을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는 담론이 없는 경우가 많잖아요? 남편에게 맞았을 때, 아프다, 화나다라는 감정을 가지는 게 당연할 것 같은데,
대부분의 여성들은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는 왜 참을성이 없을까? 를 먼저 생각하거든요.

이문열 같은 사람은 요즘 여자들이 서구화되면서 '없었던 문제를 괜히 만들어내서 일을 만든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언어가 없었던 것이지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잖아요.
언어와 해석 구조가 없으면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고 설명할 수 없게 되죠.

언니네 : 연구의 어려움과 이어지는 부분인데, 연구자의 윤리와 여러 가지 딜레마에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정희진 : 여성학 연구 과정 또한 여성운동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구 내용 자체가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터뷰 과정이 그들을 위한 상담 과정이니까요...
또 그것은 저 자신을 위한 작업이죠.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그러므로 연구 대상과 연구자라는 구분이란 무의미하다는 거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그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없으니까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연구는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그리고 여성주의적인 시각이 아내폭력, 가정폭력을 전부 설명할수 없거든요. ... 내가 어떤 문제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는 얘기는, 결국 그 문제가 복잡한 권력 관계의 그물망에 있다는 것, 복잡한 모순 구조의 산물이라는 얘기겠죠.

언니네 : 아내폭력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가해남성 재활프로그램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효과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정희진 : 가해자 교육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다/없다를 이야기하기 앞서, 우리가 좀 질문 방식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그 질문 자체를 질문하는 거죠.
만일 우리가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맞았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을 당연히 처벌해야지 상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근데 왜 때리는 남편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상담, 치료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세요?
구타는 범죄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처벌을 해야된다고 생각하고, 그게 가장 확실한 근절 방법입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범죄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해져요.
조직 폭력배를 상담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성 범죄자들은 상담을 하죠.
또 흔히 이런 경우 가해남성들의 '인권'을 이야기하는데, 보통 우리는 다른 범죄자에 대해서는 인권 문제에 무감하면서, 특히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람에 대해서는 인권을 걱정하죠.
이건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 너무 허용적이고, 여러가지 사회적인 맥락은 무시한 채 무조건적으로 인권은 같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광주항쟁 피해자의 인권과 가해자의 인권은 같은 수준에서 얘기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잖아요.
아내를 때린 가해 남편의 인권은 걱정하지만, 만일 구타 남편을 정당 방위로 죽인 여성이 있을 때는, 그 여자는 그냥 "죽일 년"이 되고 교화프로그램 같은 걸 받아야 한다고 생각 안 하죠.
그리고 실제 교육 프로그램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워요. 가정폭력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휘두르는 일종의 통치 행위이지, 버릇이나 무지, 순간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거든요.
철저히 힘의 논리에 따른 것임에도 아내폭력을 사소하게 생각하니까 습관, 버릇, 실수라고 생각해버리는 거죠.
저는 가해자 프로그램보다 피해여성들을 지원하는 데 더 많은 자원이 사용되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아내폭력 가해자들에 관한 문제는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 성매매자 명단 공개와 많은 연관성이 있었다.
흔히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가해자의 인권논리는 언제나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아니던가. 여기서 공개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대립구도가 아니라 다른 식의 질문을 던지는 게 필요하다는 정희진씨의 말은 굉장히 뼈있게 들렸다.
아내폭력은 일반적으로 기혼여성과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하기 쉽다.
미혼/비혼은 그저 '이런 폭력적인 남자들과 결혼을 피하자'라는 수준에서 아내폭력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근데 정희진씨 말에 의하면 연인 관계에서도 폭력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함정이 있다.
사랑과 폭력은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 그리고 연애관계 또한 우리 사회의 남녀관계의 구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힘겨워 하고 나약한 소리를 하는, 나조차 감당하기 힘든 자신에게 남자 친구가 정신차리라며 따귀 한 대를 때렸다고 하자.
남자 친구가 날 정말 사랑하나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이것을 명백한 폭력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실제 여기에는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과 나를 향한 폭력은 뒤엉켜있다.

최근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와 [위험한 여성] 등등을 읽으면서 "남자들이 무섭다"고 느낀 나머지 조금 위험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이건 정말 "그런 남자들은 피하고 싶다"는 아주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언니네 : 아내구타를 하는 남자들의 징후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정희진 :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사실 이것도 가정폭력을 대한 편견 중의 하나죠.
어떤 남자라고 유형화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모든 남녀 관계에서 가능한 거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수행하고 있는 성 역할(gender role) 자체가 폭력이라는 거죠.
경미한 폭력과 심각한 폭력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는 거에요.
골프채로 때리는 것은 폭력이고, 사랑해서 때리는 뺨 한 대는 폭력이 아닌가요?
여성에 대한 무시, 욕설, 성역할에 근거해서 여성에게 과다한 노동과 희생을 당연히 요구하는 것 그것은 폭력이 아닌가요?
어떤 것이 폭력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역할 자체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거죠
.
예를 들어, 특별히 가부장적인 남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갈등은 일반적이잖아요?
여성들은 집안 청소를 둘이 같이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남자들은 왜 하필 자기가 테레비 보는데 청소기로 시끄럽게 하냐는 신경질을 내죠.
그럼 여성들이 열 받아서 화를 내고, 이때는 긴장감이 돌지요.
이런 상황에서 폭력이 행사되는 경우가 많죠.
모든 가정폭력은 다 성 역할 갈등에서 와요.
일상적인 가정생활에서 폭력이 내재해 있는 거라고 보면 되요.
예를 들어 이성애 연애관계에서 성폭력과 데이트가 구분이 안 되는 것이나, "뺨 한 대가 살인까지 간다"는 말 있잖아요? 실제로 여성의 사고사 중 가장 많은 것이 배우자에게 피살된 경우에요.

인터뷰 막바지에 여성학과 여성운동간의 관계, 양자를 경험한 사람으로서의 관계의 긴장감이라든지, 전망 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정희진씨를 상당히 괴롭게 만들었는데, 기자가 너무 쉽게 질문을 던졌다는 반성이 든 것은 '공부'의 의미를 들은 후였다.
"공부는 끊임없이 자기 현장의 문제를 사유하는 것이며 대학원도 일종의 현장"이라는 정희진씨의 대답은 공부/활동의 이분법에 대해 새롭게 고민할 기회를 주었다.
계속해서 30대 기혼여성이 공부를 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네 : [여성의 전화]에서 활동하시다가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신 걸로 알고 있거든요. 대학원 공부 자체도 힘든 거지만 결혼을 하고 애를 낳은 후 새로운 것(공부)을 시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정희진 : 공부를 하면서부터 기혼여성, 집안형편, 나이 이런 나의 삶의 조건이 내게 유리한 게 별로 아니 하나도 없구나를 실감하죠.
밤 9시에 집 밖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당연하게 누리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엄청난 희생이나 댓가를 요구하는 불가능한 일이거나 최소한 설명해야 하는 일이 되는 거죠.
예를 들어 젊고 가정이 유복한 남성이 공부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아줌마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일인 경우가 많죠.
며칠 전 대학 동창 모임을 나갔는데, 모두들 저에게만 왜 공부하느냐고 집중적으로 묻더군요.
그들은 저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솔직히 모욕감을 느꼈어요.
저는 "내가 왜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느냐"고 되물었어요.
같이 있던 공부하는 다른 남자 동창들에게는 누구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죠. 그들이 공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요.
어떤 면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적 포지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공부는 끊임없이 자신의 현장의 문제를 사유하는 것이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주한미군 범죄근절 운동본부]에서 일하는 정유진씨는 여성의 시각에서 주한미군의 문제를 민족 문제가 아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글을 썼죠.
현장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들이죠.
(당대비평 2001년 봄호 [오키나와에는 왜 '양키고홈'이 없을까]를 읽어보길 바란다. 군사주의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으로 주한미군 문제를 인권과 생명 그리고 평화 문제로 발상 전환을 요구하는 글이다)

장장 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남의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인터뷰는 끝이 나게 되었다. 어느덧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설레임과 기쁨은 무언가를 배우고 온다는 또는 무엇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배운다는 것은 꼭 어떤 특정한 지식을 전수받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생각해 보는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당분간은 이런 "공부"에 몰두할 것 같다.

* 정희진 님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그녀가 감수한 [위험한 여성]을 읽길. 그리고 그녀가 기획·편집한 [한국여성인권운동사]를 읽길 바란다 (한국여성인권운동사 중 "한국기지촌 여성운동사"는 그녀가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