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희진/ 여성학강사
<출처: 안티조선 커뮤니티 우리모두 http://neo.urimodu.com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http://windshoes.new21.org>
여성의 몸에서 모순이 폭발하다
대개 젊은 여성들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아저씨", "이모", "아줌마" 등 세대(30년)화된 언어로 호칭함으로서 '어린 여자'이고 싶어한다.
남성의 20대는 준비기간이지만, 여성의 20대는 절정으로 간주된다.
나이 어린 여성의 여성성만이 교환 가치를 갖기 때문이고, 젊은 여성들은 그것을 잘 안다.
어떤 포주들은 매춘 여성의 체중이 1kg 늘어날 때마다 5만원씩 벌금을 부과한다.
상품을 훼손한 댓가를 상품에게 청구하는 '여자 장사'의 아이러니다 (성매매가 인신매매/성폭력이 아니라 성노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각 좀 하라).
청일 전쟁이 청나라도 일본도 아닌 한반도에서 벌어졌듯, 약자의 몸은 강자의 전쟁터가 된다.
미국 남성이 한국 여성을 강간하니까, 한국 남성은 미국 여성을 강간하고 싶어 촛불 집회에서「fucking USA」를 열창한다.
남자들의 영토 싸움이 여성의 몸에서 벌어진다.
남자는 죽이지만 여자는 강간하는, 성별화 된 제노사이드(인종 청소)를 어떻게 설명할까?
남의 것을 빼앗을 때 주인은 죽이지만 가구는 가져온다.
여성이, 제노사이드 당하는 국가의 동등한 구성원이라면 남성과 똑같이 죽여야 마땅하다.
나이주의,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 이 모순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폭발한다.
왜?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존재성을 몸으로 환원한다.
남성의 정체성, 계급은 몸의 기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여성의 계급성은 그녀가 소유한 돈이나 능력보다는 몸의 상태-젊은가, 예쁜가-에 의해 좌우된다. 사회는 여성의 몸이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에 집착하고, 그 책임을 여성에게 묻는다.
여성은 보는 주체가 아니라 보여지는 대상이지만, 가부장제는 언제나 피해자에게 해결사의 역할까지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남성의 눈으로 우리의 몸을 만든다.
여성이 몸으로 환원된다는 것은, 여성의 몸에서 역사와 정치를 제거하여, 여성이 단지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생물로 남아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전체 성폭력의 3분의 1이 가족 내 성폭력이다.
남성이 자기 딸, 처제, 조카, 어머니를 강간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그녀의 사회적 관계를 삭제하고 여성을 '구멍'-물질로 환원시킬 수 있는 남성 권력 때문이다.
성폭행 하면서 여성의 입에 사정한 남자가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한 후, 피해자인 내 친구는 몇 년째 거식증을 앓고 있다.
그녀에게,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식욕, 성욕, 수면욕?
남성의 식욕과 성욕은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의 식욕과 성욕은 연관될 필요가 없고, 관련된다하더라도 정치적 의미가 없다.
남성의 성욕은 '원래' 무제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경계가 없는데 무슨 정치적 의미가 발생하겠는가.
하지만 식욕, 성욕, 수면욕이 인간의 3대 생존 조건이라는 말은 (젊은/이성애/비장애)남성에게만 해당한다.
여성에게 성욕과 식욕은 생존의 기본 조건이 아니라 과도한 욕망으로 간주된다.
남자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진 권리가 여성에게는 구걸하고 설득하고 투쟁으로 쟁취해야 할 정치적 목표, 욕망인 것이다.
여성의 식욕은 성욕으로 유추된다.
식욕과 성욕은 모두 혐오스런 여성 젠더를 상징한다.
여성이 성욕과 식욕의 욕망을 드러낼 때, 우리 여자들 스스로 실천하는 일상적인 걱정/억압의 커멘트들을 생각해보라.
동시에 섹스와 음식 만들기는 젠더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노동이다.
여성은 '어머니'의 노동을 하는가, '창녀' 노동을 하는가에 따라 계급이 정해지지만 '어머니'/'창녀' 두 계급 모두 남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노동에서도 여성은 소외된다.
내가 아는 몇몇 인터넷 좌파 사이트에는 '진보' 남자들이, "매춘하러 갔는데 그 여자들이 너무 더럽게 보여 되돌아왔다"는 경험담을 올리고 맞장구치는 리플이 수없이 달린다.
'더럽다면', 누가 더 '더러운가'? 엥겔스가 말했듯이, 남성 인구의 99%가 매춘(買春)하지만 여성은 그에 비해서는 극소수만이 매춘(賣春)에 종사한다.
누가 더 더러운가? 남성은 여성보다 더 섹스를 필요로 하고 섹스로서 남성성을 획득하는, 그야말로 일상이 섹스인, '섹스의 화신'이지만 남성은 성적 존재로 간주되지도 않고 성애화의 대상도 아니다.
성욕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폭식은 억압되지 않기 때문에, 폭식을 하더라도 집단적으로 모여 먹고 마셔댄다.
하지만 여성에게 폭식은 수치이기 때문에 밤에 혼자 먹는다.
음식과 성을 노동으로 강요받는 사람은 여성이지만, 여성은 음식과 성을 즐길 수도 없고 욕망해서도 안 된다.
가부장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음식을 만들되 먹지 말라, 말라비틀어지되 가슴과 엉덩이는 살찌우라, 몸에 집착하면서 정지해 있으라, 다른 여자와 너의 몸을 경쟁시켜라, 영혼을 비하하고 열등감을 가져라...
남성은 수 천년 전부터 생식, 쾌락, 자기 실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성을 즐겨왔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지금까지도 출산의 영역에 한정될 것을 강요받는다.
여성의 성욕이 부계 가족 유지-아들 낳기만을 위해 허용되듯, 여성의 식욕이 찬양되는 시기는 임신했을 때뿐이다.
또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노동을 자연의 영역에 할당한 남자 체제는, 남성의 굶주림에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
남자들이 민족, 계급 등 그들 내부의 차이로 인해 투쟁할 때 남성의 일시적 굶주림('단식 투쟁')은 정치적 사건이지만, 여성의 일상적 굶주림, 섭식 장애는 철저히 개인적인 일로 치부된다.
그런데,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여성은 성적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성적 매력이 없는 여자로 취급받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음식 만들기를 기대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기쁨이겠지만, 그것이 당연한 노동이 될 때 나는 억압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여성의 현실, 욕망, 언어가 불일치하기 때문에 여성은 늘 복잡한 상황에 놓인다.
'정치적' 허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성들은 "육체가 쇠약해지자 영혼이 찾아왔다"고 말한다.
몸과 정신의 이분법, 아니 모든 이분법 구조에서 남성은 그것이 양립 가능하지만 여성은 둘 중 하나를 버려야만 한다.
여성에게 거식증은 일종의 연속체로 존재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현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먹는 것을 통제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다.
몸무게가 여성의 인격, 능력이 된지 이미 오래다.
이처럼 다이어트는 젠더 문제 중에서 여성의 '주체적 종속'이 가장 심각한 영역이다.
절망한 인간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상사가 죽음을 결정한 귄리라면, 그(녀)가 권력자가 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자살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를 포함하여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폭식으로 해결하려는 여성들,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 때문에 늘 실패했다고 느끼는 여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마음대로 할 것이 자기 몸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섭식 장애는 남성의 투사(投射)와 대비되는 여성의 내사(內射)로서의 우울증과 같은 것이다.
폭식이나 거식은 언어화되지 못한 고통, 직면할 힘이 없는 공포가 내 몸 안에 머무는 일시적 도피처, 연막이다.
여자를 무시하고 혐오하는 사회에서는 음식에 매달리는 여성의 상황을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덜 된 신호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으로 본다.
사회는 여성을 도와주지 않는다.
모든 책임을, 고립된 여성 개인에게 심문한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다이어트 실패는 자기 관리 능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음식에 대한 절제력이 없는 것은, 폭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여성들이 먹는 일에 중독 되는 것은 외로움, 울분 같은 감정의 허기, 남성의 이중 메시지로 인한 무기력 같은 정치적 허기를 신체적 허기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알듯이 영혼의 배고픔, 심리적 좌절은 음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달리 이상 식욕이 '과정 중독'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알콜 중독은 알콜 자체에 중독 되는 것이지만, 폭식증은 음식이 아니라 '먹는 행위'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감정과 정치적 영역에서의 나의 심리 행동을 외면한 상태에서, 음식 자체에 집중하는 살 빼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음식이 적이요, 자신의 몸은 늘 배신자가 되는 상황에서 다이어트는 자기 혐오를 내면화하는 과정이 된다.
나의 타자가 내가 되어서는 해결 없다.
타인의 내 몸에 대한 판단은, 내 몸에 대한 나의 생각을 경유한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이 먼저다.
'아름다운' 몸은 자기 사랑의 수많은 열매 중 하나일 뿐이다.
* 음식과 관련한 나의 고통을 위로하고 사유로 발전시키는 책
『달빛 아래서의 만찬』(아니타 존스턴, 노진선 옮김, 2003, 넥서스BOOKS)
『다이어트의 성정치』(한서설아, 책세상, 2000)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 - 페미니즘, 서구문화, 몸』
(수전 보르도, 박오복 옮김, 또하나의문화, 2003)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크리스티안 노스럽, 강현주 옮김, 한문화, 2000)
『마돈나의 이중적 의미 : 슬래이브걸과 일상적 성사회화』(프리가 하우그外, 박영옥 옮김, 인간사랑, 1997)
『몸 숭배와 광기』(발트라우트 포슈, 조원규 옮김, 여성신문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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