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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by eunic 2005. 2. 25.

아래의 글은 위안부 누드를 민족의 치부를 드러냈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류를 짚어줍니다.
누드가 가진 사회적 의미, 권력관계를 통해서 말이죠.
일반누드는 괜찮지만 위안부 누드는 안된다는 의견에는

문제의 원인을 은폐시키려는 남성사회의 전략이라고 말하는 정희진 씨.

김종엽 씨의 글은 이승연 누드만을 해석한 것이었다면
정희진 씨의 글은 누드 전반에 대한 반대를

위안부누드의 거센 반감의 여세를 몰아 말한것 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이승연 누드’ 사건을 두고 “황당하다”, “민족의 아픔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식의 비판은 보수적이고 위험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누드’는 식민 역사에 대한 상업주의의 테러 혹은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아니라, 한국의 남성과 여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민족 문제로 보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기 쉽다.

영화 〈원초적 본능〉의 감독 폴 버호벤의 후속작 〈쇼걸〉은, 제목답게 더 많은 여성들이 더 많이 벗었지만 기대와 달리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이 예상치 못한 결과는 성차별 사회에서 포르노, 누드 산업이 생산하는 에로틱한 쾌락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게 해준다. 〈쇼걸〉은 쇼걸들의 벗은 몸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여성의 벗은 몸을 보여주어 남성 관객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데 있지 않고, 쇼걸들의 연대와 자매애를 강조했기 때문에 돈벌이에 성공할 수 없었다.(남성 사회의 관객들은 여성의 단결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승연 누드’ 역시 포르노그래피가 쾌락이나 ‘표현의 자유’의 실천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건이며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포르노를 본 남성 관객 혹은 남성화된 관객이 느끼는 쾌락은 권력 행동의 결과이다. 포르노의 쾌락은 여성이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응시의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재현되어 독자에게 권력이 있다는 느낌과 의식을 만족시켜 줄 때에 발생한다. 이러한 권력 구조 때문에 포르노 산업은 철저히 성별화된 정치경제학에 의존해야만 작동이 가능하다. 따라서 여성은 포르노를 만들어 돈을 벌거나 구매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이승연 누드’는 제작사의 주장대로 “역사적 아픔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재현되는 남성과 여성의 성별 권력의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는 누드 산업의 당연한 귀결이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 격차가 최대치일 때, 관객의 쾌락도 최대한 보장될 것이다. 가장 자극적인 소재는 바로 이 권력 관계의 극단화를 의미한다. 일반 포르노 화면에서는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남자 대 여자라는 성별 권력 차이, 그 자체가 주요 쾌락 코드이다. 그러나 ‘위안부 누드’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남녀라는 성별 권력 차이에다가 남성은 일본, 제국주의, 군인, 성폭력 가해자이고 여성은 한국인, 식민지, 순진하고 겁먹은 ‘처녀’, 피해자라는 코드가 더해져 남성 권력을 극대화시킨다. 나의 문제 제기는 군 위안부 문제가 성적 표현의 금기 성역이라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의 섹슈얼리티를 어떠한 시각에서 재현하느냐이다(군 위안부 할머니가 직접 그린 피해 여성의 누드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므로 ‘위안부 누드’는 황당한 사건이 아니라, 남성의 이윤과 쾌락을 보장하려는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누드의 소재가 위안부였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라면, 일반 누드와 포르노그래피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까. 이 사건에 대한 비판 담론의 목적이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위안부 누드에 대한 시민의 분노와 그로 인한 시장의 외면이 왜 ‘O양’, ‘B양’ 등 여성 연예인 비디오 피해 사건에는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았을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폭력이 이처럼 성애화될 때, 남성 권력은 보이지 않게 되고 여성 억압은 생물학적 질서로 간주되어 비정치화한다. 이 사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인간의 감성과 사랑이 평등이나 정의가 아니라 지배와 폭력을 에로틱하게 느끼게 되었는가에 대해 묻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평등을 에로틱한 것으로 느낀다면, ‘위안부 누드’는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난받지 않는 일반 누드’와 ‘비난받은 위안부 누드’는 차이가 없으며, 여성의 인권과 존재성을 몸으로 환원하는 포르노그래피 산업의 연속선상에 있다. 만약, “일반 누드는 되지만 위안부 누드는 안 된다”는 사고 방식이 그 차이를 발생시켰다면, 이는 문제의 원인을 은폐하려는 남성 사회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겨레신문 & 한국여성의전화연합 회지 <여성의 눈으로> 게재

‘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정치학

// 정희진

이 사건에 대한 가장 보수적이고 위험한 견해는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나?”, “민족의 아픔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 “황당하다”는 식으로 기획사와 해당 연예인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누드’는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아니라, 한국의 남성과 여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민족 문제로 보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기 쉽다. 다시 말해, 이번 사건을 “역사와 민족에 대한 상업주의의 테러”로 보고 이에 근거하여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사건이 생산되는 구조와 의식의 반복일 뿐이다. 사실, 현재의 비판 담론은 이 사건의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건을 민족 문제나 예외적인 사건으로 보고 싶은 남성의 시각이 이 문제가 발생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 내부의 성별 권력 관계(gender)의 모순으로 기인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비판 담론이 여성 문제와 성 문제에 무지한 몰성적(沒性的, gender blind)인 시각에 기반하고 있다.

이 상품에 대한 비판과 제작 중단이 가능했던 것은, 여성의 인권과 존재성을 몸으로 환원하는 포르노/누드 산업 자체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프로젝트가 민족주의 담론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이 상품은 한국의 민족주의와 언론 매체의 엄숙주의, 살아있는 생존자의 고통, 생존자의 직접 말하기, 정대협과 정신대연구소 등 그간 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인권을 위해 헌신해왔던 여성운동의 저항 등 제작진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한 문제’에 부딪쳐서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그들이 이러한 반응을 미리 생각할 만한 사회 의식이 없었다고 보고, 예상했더라도 시장질서가 자기 상품을 수용했다면 간단히 무시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여성과 여성주의, 전쟁시 성폭력 피해 여성의 존재에 대한 철저한 무시와 무지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이 사건에 대한 비판 담론의 목적이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위안부 누드에 대한 시민의 분노와 그로 인한 시장의 외면이 왜 ‘O양’, ‘B양’ 등 여성 연예인 비디오 피해 사건에는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았는지부터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성폭력 피해 여성의 인권에 관심이 없으며, 성폭력과 성관계를 구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섹시한 성관계는 성폭력이라고 믿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에 성폭력 당한 것은 정치적인 이슈/인권 문제이고, 한국 남성에게 성폭력 당한 것은 개인적인 일인가? ‘위안부 누드’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은 민족의 명예를 모욕하는 일이고, 여성 연예인의 성적 사생활을 몰래 찍고 팔고 돌려보는 것은 즐거운 일인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런 상품의 제작 행위뿐 만 아니라, 이 제작 행위에 대한 한국사회의 해석 - 한국인(남성)들의 분노는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두렵기까지 하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에서 여성 누드나 포르노그래피가 왜/어떻게 가능한지를, 포르노그래피 가 ‘쾌락’이나 ‘표현의 자유’의 실천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건이며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포르노에서 남성 관객 혹은 남성화 된 관객이 느끼는 ‘쾌락’은 권력 행동의 결과이다. 포르노의 쾌락은 여성이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응시의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재현되어 남성 독자가 자신이 권력이 있다는 느낌과 의식을 만족시켜 줄 때에 발생한다.

영화「원초적 본능」의 감독 폴 버호벤의 후속작「쇼걸」은, 제목답게 더 많은 여성들이 더 많이 벗었지만 기대와 달리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이 예상치 못한 결과는 성차별 사회에서 포르노, 누드 산업이 생산하는 에로틱한 쾌락이 어떤 권력 관계에서 가능한지 보여준다.「쇼걸」은 쇼걸들의 벗은 몸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여성의 벗은 몸을 보여주어 남성 관객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데 있지 않고, 쇼걸들의 연대와 자매애를 강조했기 때문에 돈벌이에 성공할 수 없었다(남성 사회의 관객들은 여성의 단결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같은 권력 구조 때문에 포르노 산업은 철저히 성별화된 정치경제학에 의존해야만 작동이 가능하다. 따라서 여성은 포르노를 만들어 돈을 벌거나 구매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모든 재현(re-presentation)은 현실을 구성하는 담론의 일부이며 실천이기 때문에, 현실의 권력 관계를 반영한다. 현실에서 권력과 자원이 있는 집단은 포르노그래피의 대상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이러한 재현물은 ‘흥행’에 실패한다. 현실 세계에서 인간성을 박탈당하고 열등한 자로 낙인찍힌 사람이 화면에서 고문당하는 경우와, 권력 있고 존경받는 사람이 고문당할 때 관객의 반응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경우 쾌락을 느낀다면 후자의 경우는 심한 불쾌감으로 다가온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가 바로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 괴벨스가 유태인 민중이나 여성이 아니라 유태인 장교를 대상으로 제작한 스너프(snuff) 필름이 관객의 저항으로 상영되지 못한 일이다.

작년에 문제가 되었던 기지촌 여성 윤금이씨가 잔인하게 살해된 주검 사진 전시도 마찬가지다. ‘평화운동’ 시위 현장에서 그녀는 반미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전시된 것이 아니라 힘없는 매춘 여성이었기 때문이 전시된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서, 후세인의 비참한 사진 전시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격렬한 분노와 거부감에서 보듯이, 정치적 선전물에서 남성 인물 전시는 거부감을 낳지만 여성이 전시되는 것은 쾌락을 생산한다. 여성과 남성의 이미지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산, 소비되는 것이다.

‘이승연 누드’는 제작사의 주장대로 “식민의 역사적 아픔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재현되는 남성과 여성의 성별 권력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는 누드 산업의 당연한 귀결이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 격차가 최대치일 때, 남성 관객의 쾌락도 최대한 보장될 것이다. 가장 자극적인 소재는 바로 이 권력 관계의 극단화를 의미한다. 일반 포르노 화면에서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남자, 여자라는 성별 권력 차이 그 자체가 주요 쾌락 코드이다. 그러나 ‘위안부 누드’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남녀라는 성별 권력 차이에다가 남성은 일본, 제국주의, 군인, 성폭력 가해자이고 여성은 한국인, 식민지, 순진하고 겁먹은 ‘처녀’, 피해자라는 코드가 더해져 남성 권력을 극대화시킨다. 그만큼 ‘재미’있으며 더 팔릴 수 있는 상품이 된다.

나의 문제 제기는 군 위안부 문제가 성적 표현의 금기 성역이라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의 섹슈얼리티를 어떠한 시각에서 재현하느냐이다(군 위안부 할머니가 직접 그린 피해 여성의 누드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므로 ‘위안부 누드’는 황당한 사건이 아니라, 남성의 이윤과 쾌락을 보장하려는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누드의 소재가 위안부였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라면, 일반 누드와 포르노그래피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폭력이 이처럼 성애화(sexualized)될 때, 남성 권력은 보이지 않게 되고 여성 억압은 생물학적 질서로 간주되어 비정치화 된다.

이 사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인간의 감성과 사랑이 평등이나 정의가 아니라 지배와 폭력을 에로틱하게 느끼게 되었는가에 대해 묻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평등을 에로틱한 것으로 느낀다면, ‘위안부 누드’는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난받지 않는 일반 누드’와 ‘비난받은 위안부 누드’는 차이가 없으며, 포르노그래피 산업의 연속선상에 있다. 만약, “일반 누드는 되지만 위안부 누드는 안 된다”는 사고 방식이 그 차이를 발생시켰다면, 이는 문제의 원인을 은폐하려는 남성 사회 전략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