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몸, 성폭력
정희진
pregnant, 임신한
pregnable, 정복할 수 있는
impregnable, 난공불락의, 정복할 수 없는...
1. 젠더와 공간
사무실이 많은 도심의 목욕탕이나 사우나 시설들은 대부분 남탕만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달리 쉴 곳이 없어 불편을 겪는다. 반대로 주택가의 ‘동네 목욕탕’에는 남탕이 없는 경우가 있다. 목욕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도심에는 여탕, 주거지에는 남탕의 이용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심은 정치와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적인 공간으로 간주된다. 공적인 공간은 남성들의 삶의 무대로, 대개의 공적인 공간 환경은 여성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여성은 공(公)/사(私) 영역 양쪽 모두에서 일하고 있지만, 집은 남성의 시각에서 휴식처로 간주되어 사적인 공간으로 여겨진다. 도심과 동네 목욕탕의 성별 공간은 공사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의 성별화(性別化, gendered)가 공간 운영 원리에도 적용된 일상의 사례이다. 공간의 젠더화, 즉, 성별에 따른 공간 질서는, 공간이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은 또 다른 사회적 제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공간과 성별 제도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젠더는 공간을 생산하고, 공간은 젠더를 생산한다. “여성의 공간”, “남성 위주의 공간”처럼 공간의 성별화 뿐 만 아니라, 젠더 자체가 공간화 되기도 한다. “여자는 밭, 남자는 씨”라는 일상적 언설은, 여성의 난자도 독립된 세포로서 하나의 ‘씨’라는 ‘과학적 사실’을 위반한다. 남성 중심적 과학조차도, 성별 제도의 고정 관념을 극복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남자는 씨”라는 주장은, 남성만이 인간 형성의 기원(origin)이고 인류(‘man’kind)를 대표하며, 생산의 주체라는 것을 은유한다. 이에 반해, ‘밭’은 ‘씨’가 무엇인가에 따라 ‘밭’의 성격이 달라진다. 이 담론에서 ‘밭’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밭’은 씨에 의해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씨는 싹이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등 변화를 거듭하지만, 여성, ‘어머니 대지’, ‘밭’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 정박성이다. 이 담론은 행위자로서 남성의 이동성, 자아실현, 현실초월성, 창조성을 강조한다. ‘씨’의 변화와 변태(變態, metamorphosis)-남성은 역사적 주체(historical agent)임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밭’의 불변성-여성은 역사의 외부에 존재하는 비역사적 타자(ahistorical other)라는 것을 웅변한다. 남성이 생성(becoming)을 표상한다면, 여성은 존재(being)를 표상하는 것이다.
“여자는 밭, 남자는 씨” 언설에서 남성 젠더는 시간의 변화와 연결되지만, 여성 젠더는 공간화 된다. 남성 사회에서는 여성의 몸이 공간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여자는 항구, 남자는 배”라는 노래 가사처럼, 남성은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지만, 여성은 집 그 자체가 된다. 여성은 남성이 되찾아야만 하는 잃어버린 진실의 저장고처럼 간주되는 것이다. 여성이 공간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여성은 향수병에 덜 걸리기도 한다. 여성은 어머니의 역할 때문에 향수병에 걸린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대상이지, 향수의 주체가 아니다.1) 어머니는 과거를 욕망하기보다 과거 그 자체로 여겨진다.
원시림이 ‘처녀림’, ‘처녀지’ 등으로 불리는 것은, 정복과 개발의 대상이 되는 공간은 여성화된 명칭을 갖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역사에서 여성은, 남성 주체의 개척 대상인 자연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 왔다. 남성은 공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 남성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 ~ 1512)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America) 대륙은, 아메리고의 여성형 명칭이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버지니아(Virginia), 캐롤라이나(Carolina), 조지아(Georgia) 등 콜럼버스의 ‘지리상의 발견’ 대상이 된 아메리카 대륙의 주(州)명칭은 ‘... ia’로 끝나는 여성형 명사들이다.2)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해 온, 개척자-정복자-서구-남성 젠더, 발견 대상-식민지-‘비서구’-여성 젠더...로 연결되는 ‘오리엔탈리즘의 젠더화’와도 관련이 있다. 한국사회에도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 1983년에 설립된 한국여성‘개발’원이나 1995년의 여성‘발전’기본법 등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한국여성개발원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양성평등’이 명칭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양성평등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느낀 남성 국회의원들에게 거절되어 현재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남성 주체의 시각에서 여성은 개발(develope, exploit, enlighten, open up...)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거식증, 폭식증 같은 섭식 장애와 광장공포증, 밀실공포증은 남성은 거의 걸리지 않는 명백하게 성별화된 고통으로, 공간과 젠더가 맺는 정치적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일상적으로 강간의 위협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밤거리는 광장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광장공포(agoraphobia)는 성폭력에 대한 공포(agrophobia)이기도 하다. 여성과 음식(food), 경계(boundaries)는 내사(內射, introjection), 침입, 배제의 개념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여성의 거식증과 폭식증, 광장공포증과 밀실공포증은 모두 근대 이후 공사 영역의 탄생과 함께 대중화된 현상이다. 미국 사회에서 광장공포증이 여성들 사이에서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인데, 이 시기는 여성들이 전쟁이 끝난 후 되돌아온 남성들에게 다시 일자리를 양보하고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받은 때이다. 여성들은 공적 영역에서 사라져야 했다. 이전의 가정생활(domesticity)과 의존성, 자기주장을 하지 않으며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여성이 여성의 이상(理想)으로 주장되기 시작했다. 광장공포증에 걸린 사람들의 95%가 여성, 특히, 가정주부들이다. 이들의 광장공포는 집 밖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공격(panic attack)이나 갑작스런 마비가 올 것이라는 공포의 형태로 나타난다. 여성이 남성보다 본래 그러한 충동이 있는 것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의 가정과 일터의 분리와 연관된 역사적 현상이다.
거식이나 광장공포 환자들은 자신이 자기 몸 밖에 있다고 느낀다. 대개 거식증 환자들은 깨끗함과 질서에 대한 강박적 집착하는데, 이들에게 음식은 강간 같은 외부 침입의 위협으로 간주된다.3) 여성의 거식증은 세계로부터 퇴각이자 자기 몸의 공간을 축소하려는 열망이다. 거식증의 공간 축소가 강간이나 침입자에 대한 스스로의 방어로서 구심성의 집중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폭식은 거식증의 구심성에 반대로서 원심적 대응이다. 그러나 이는 반대가 아니며, 거식과 폭식은 서구 문화가 규정한 여성 몸의 경계화된 공간을 돌파하려는 욕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성이 자기 몸이 공간을 덜 차지하려고 거식증이 걸렸다면, 극단적인 경우 자기 몸의 소멸, 죽음으로 연결될 것이다.
이 글은 “시간과 공간”, “정신(mind)과 몸(body)”, “문화와 자연”의 이분법이라는 서구 남성 중심적 사유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정의하는 방식이 될 때, 이러한 성별화가 여성의 몸을 공간으로 간주, 성폭력의 발생 원인이 되고 있음을 논하고자 한다. 여성이 남성 주체에 의해 타자화(他者化)되거나 대상화될 때, 여성의 몸은 공간화 된다. 이때의 공간 개념은 사회적 공간이 아니라 본질주의적인(disembodiment)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 인식이 젠더 논리와 결합하게 되면, 여성의 몸은 남성 문화를 담는 그릇으로 간주된다. 특히 최근 국제사회에서 심각한 인권 이슈로 등장하고 있는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 청소’) 상황에서의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mass rape)은, 여성의 몸이 인종화되고 성애화된 공간으로 영토화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4) 제노사이드도 성별화된 형태로 진행된다.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이 제노사이드의 주요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을 공간 문제와 연결하여 살펴보면, 공간과 젠더는 상호 연관, 교직(交織, interweave)되어 생산됨을 알 수 있다. 젠더에 개입된 ‘공간의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일터’/‘집’의 분리 등 공간의 성별 분업 논리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성폭력 근절을 위해서는 젠더 질서의 변화뿐 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사유의 변화가 동시에 요구됨을 알 수 있다.
2. 시간과 공간, 몸과 정신, 남성과 여성
공간의 정치경제학자,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시간 개념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인류 지성사를 비판하고, 공간 생산을 사회 변화의 주된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회주의 정권의 실패도 사회적 공간을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소련의 사회주의는 대도시 중심주의, 지역 차별 등 미국 같은 자본주의 제국의 공간 원리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다.5) 시간의 진보에 따른 목적론적, 일직선적(一直線的) 세계관은 맑스주의를 포함하여 서구 철학사를 지배해온 대표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맑스는 제 3세계 사람들은 스스로를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서구인이 대신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6) 영국의 인도 침략을 지지했던 맑스의 오리엔탈리즘 역시, 봉건-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도식에 맞추어 서구를 앞선 시간으로 제 3세계를 뒤쳐진 시간으로 사고했던, 시간 중심적 세계관의 한 예이다.
페미니즘은 기존 세계관이 서구 남성의 경험에 기반 한 담론임을 드러내고, 이를 해체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공간의 문제에 천착해왔다. 공간 개념에 기반 한 페미니즘 이론들은, 사물과 현상의 ‘본질’과 ‘기원’을 추구하는 서구의 남근(phallus) 이성 중심주의가 기본적으로 시간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고 비판해왔다.7) 본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되므로, 기원을 소급해 가면 진리에 도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일직선적 사고방식은, 수평적(horizontal) 공간적 사유와 달리, (남성의 입장에서 구성된) 객관과 보편의 존재를 전제한다. 시간 중심적 세계관, 수직적(vertical) 세계관에서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진보와 발전의 정도가 정해지게 된다. 남성이나 서구가 발달의 기준, 모델이라는 가정 아래 여성, 장애인, ‘유색’ 인종의 시간은, 남성, 비장애인, 서구의 ‘앞서간’ 시간을 따라간다고 인식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서구의 30년 전과 같다”, “지방은 아직도 60년대다”등의 언설도, 시간 중심적 세계관이 드러나는 예들이다.
그렇다면, 시간 중심의 사유는 어떻게 정신과 몸의 이분법과 연결될까. 또한, 몸과 정신의 이분법은 왜 성별화 될 수밖에 없을까? 2004년 여름,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 살인 사건은, 여성을 ‘몸’으로 간주하는 몸 vs 정신 이분법의 성별화를 잘 보여준다. 이 사건의 용의자인 30대 남성은,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라며, 주로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20여 차례 이상 살인을 저질렀다. 사실, 이러한 논리대로 라면, ‘몸이 아니라 정신’ 노동으로 살아가는 지식인들 역시, 이 남성이 말하는 살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정신’ 노동자들도, 입이나 두뇌를 ‘함부로 놀리는’ 사람들이다. 입이나 두뇌 역시, 몸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몸 vs 정신이라는 이분법 사유가 몸에 대한 혐오와 남성을 이성(理性)으로 여성을 몸으로 환원하는 사유를 전제하며, 몸에 대한 혐오가 여성 혐오로 연결되는 가부장제 사회의 일상을 드러냈다.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은 공간 지각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8) 고통(trauma)의 생존자들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는 것을 경험한다. 남성의 폭력을 기억하고 있는 여성의 몸은 주체의 의지대로 이동하지 못한다. 공간 지각 능력은 개인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의 능동성과 관련이 있다. 수학자들에 의하면 수학에서 성별 능력 차이가 가장 현격히 발견되는 분야는 기하 즉, 공간 지각력인데, 이는 여성이 대체로 수동적으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하이힐이나 전족(foot binding) 같은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도 여성의 움직임에 대한 제재 전략과 관련이 있다. 인간이 존재 한다 혹은 살아있다는 근거는, 곧 인간의 몸이 공간의 어느 구체적인 장소에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이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로부터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공간이 인식 주체의 몸을 기준으로 삼아서만 특정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없다면 공간도 인식되지 않는다. 폭력으로 인해 몸의 주체성을 빼앗긴 여성들은 자신의 육체가 머물고 있는 공간과 자기와의 관계성, 즉 공간에서 자기 몸의 위치성을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9)
이처럼, 몸은 근본적으로 공간의 재현과 연결되어 있다. 몸이 공간과 맺는 관계는, 대상과 주체가 맺는 관계의 전제 조건이다. 사람의 몸은 사물과 같은 공간에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몸은 공간에 거주하거나 공간을 넘나든다. 우리는 이리저리 움직이고 싶어 할 때, 대상을 이동시키듯이 우리의 몸을 이동‘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도구 없이도 몸을 이동시킨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우리의 몸이고, 몸을 통해 공간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몸은 공간감과 장소감을 형성하는 토대이다. 인간은 공간을 점유한다. 깨어있고 직립해있을 때, 인간은 다시 세계를 획득하며 공간은 인간의 신체적 도식에 따라 표현된다. 논리실증주의 지리학을 비판하고 현상학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 지리학을 주장한 이-푸 투안(Yi-fu Tuan)은, 공간적 구분과 가치들이 존재하고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인간의 신체로부터 기인한다고 본다.10) 그는 중국 전통 건물의 예를 드는데, 통치자는 남쪽을 바라보고 서서 정오의 가득 찬 태양 광선을 받는다. 이 때 남성은 빛나는 양(陽)의 원리를 흡수한다. 신체의 앞은 양이다. 반면, 통치자의 등과 후방 지역은 음(陰), 여성, 어둠 그리고 속(俗)이다. 중국인들은 대개 오른 손잡이지만, 좌측이 영광스러운 쪽으로 간주된다. 음(陰)과 양(陽)이라는 이원론 분류에서 좌측은 양이고 남성에 속하며, 우측은 음이며 여성에 속한다. 좌측은 해가 뜨는 동쪽이고, 우측은 태양이 지는 서쪽이며 음이고, 여성이다.
이처럼 인간은 감각을 통하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공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처한 위치를 통해 공간을 파악한다. 몸은 세계 인식의 출발점이다. 몸을 통한 공간 인식, 세계 인식은 여성주의 사유와 깊은 관련성이 있다. 이러한 사유는, 그동안 몸과 정신의 이분법 구조에서 남성 중심적 세계관에 의해 여성이 몸에 연결되어 온 것, 여성의 인격과 존재성이 신체로 환원되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논리이다. 몸에 기반 하지 않은 초월적(disembodiment) 관점은, 남성 중심적 사유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담론이 ‘아르키메데스의 받침대’이다. ‘아르키메데스의 받침대’는 지구를 들어올리기 위해서, 지구 바깥에 있는 어떤 지점에서 서있다고 가정한다11). 그러나 이는 토대 없는 토대를 지향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불가능한 인식 방법이다. 기존의 전통적인 서구-남성 철학에서, 인식 주체는 자신을 몸과 확실히 분리시킴으로서, 몸(세계)에 대한 안정적 지식을 생산해왔다. 인식 주체가 자신의 정신과 몸을 분리하면, 자신의 정신은 공간 속에 없지만, 자신의 몸은 언제나 공간 속에 위치하게 된다.12)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의식이 가시적인 몸에 자기의식을 전달할 수는 없다.
근대에 이르러 가속화된 몸과 마음의 대립적 사유는 무수히 많은 다른 대립쌍들과 언제나 상호 연결되어 작동해왔다. 몸/마음의 대립은 일련의 다른 대립적인 혹은 이원화된 용어들과 연결되어, 대립항들 끼리의 상호 교환이 가능하게 된다. 마음/몸의 관계는 이성/정열, 분별력/감수성, 안/바깥, 자아/타자, 깊이/표면, 실재/현상, 메커니즘/활력론, 초월/내재, 시간성/공간성, 심리학/생리학, 형식/질료 사이의 구분과 쉽게 연관된다. 이분법 사유의 문제점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라는 점이다. 즉, 이분법 사유에서는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타자(他者)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타자성(他者性)은 동일성의 틀 안에서 만들어지고, 우월한 것만이 자율적으로 기능한다. 2, 3, 4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13)
이러한 이항 대립 논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성별적으로 작동한다. 몸과 정신의 이항 대립은 몸-여성, 정신-남성으로 연결되어 왔다. 몸과 정신의 이분법은 ‘정신-남성’의 시각에서 ‘몸-여성’이 규정된다는 것이고, 이러한 논리 안에서는 몸과 마음을 이분법적으로 사유를 할 수 있는 권리는 남성에게만 있다. 여성은 몸 그 자체이기에, 여성은 이성이나 사유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몸과 마음의 이분법적 사고가 허용되지 않는다.14) 남성 사회에서 여성이 몸으로 간주된다는 의미는, 여성의 존재성과 인격이 남성의 섹스를 위해 환원됨을 뜻한다. 남성은 ‘여성의 본성(nature)’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그 과정에서 남성은 자신과 외부적 ‘자연(Nature)’이 맺는 관계를 여성의 몸에 투사(投射)한다. 남성은 황야, 대지, 초원을 길들이고 통제할 수 있는 문명의 주체이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남성은 여성을 문명화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정복하는 자연의 한 형태로 간주해왔다.15) 남성은 자신의 몸이 세계와 직접적이고 정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몸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공간을 자연으로 확장하면, 여성의 자연화와 자연의 여성화가 동시에 관찰된다. 흑인은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 존재라는 믿음처럼, 여성은 (남성과 전혀 다른)자연과 (남성과 일치하는)인간 사이의 중간자적 존재로 간주된다.16) 공간화된 여성은 사회의 모순을 투사하는 쓰레기장이자, 동물원이나 자연 보호 지역 같은 이중의 기능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남성 문화는 그들이 배제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인식 대상은 공간화 된다. 몸은 오랜 세월동안 성별에 관련 없이 그 자체가 공간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어떤 의학 교과서에 표현된 몸의 사례를 보자. “ ... 거대한 도시의 안전과 위생 장치 대도시 거리에서 독성 물질을 수거하기 위해 어디에나 백색 천사를 배치하듯이, 몸의 큰 거리들인 동맥과 혈관에는 백혈구들이 존재한다. 간, 췌장, 신장, 방광, 담즙, 위 등은 거대한 지역 공장으로서... "17) . 이는 몸이 대상화될 때, 쉽게 공간화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을 인식 주체로, 여성을 인식 대상으로 전제하는 전통적인 남성 철학에서, 여성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신비하고 불가해한 존재로 간주되어왔다. 여성의 ‘본질’에 대한 의문으로 고통스러워하던 프로이드가 “여성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여성을 ‘검은 대륙’이라고 한 것은, 여성을 대륙으로 공간화 하는 성차별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백인 남성의 의식을 드러내는 언어의 대표적인 예이다.
3. ‘그릇 對 내용물’의 공간 개념과 여성의 몸
공간은 시간 개념과 더불어 인간이 다루어온 기본적인 인식 범주 중의 하나였지만, 오랜 세월 동안 서구 철학에서 공간은 공기처럼 보편적이고 중립적이며 불변의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공간에 대한 절대적, 선험적 개념에서는 공간이 인간의 인식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 모든 사물은 공간 안에 있으며, 공간 자체는 사물이 아니다. 이러한 그릇으로서의 공간은, 공간 안의 사물이 없어져도 사물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에 대한 몰사회적인(asocial) 입장은, 공간은 사물과 분리되어 인식할 수 없고 모든 물리적 사물은 공간의 특정한 적용이라는 라이프니쯔의 비판을 받게 된다. ‘중력의 상대성 이론(the relativistic theory of gravitation)’을 주장했던 라이프니쯔는, 공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공간은 모든 사건과 사물 관계의 네트워크로서 공존 가능한 것들의 질서라고 주장했다.18)
르페브르는 ‘그릇으로서의 공간’ 개념을 공간에 대한 본질화(disembodiment)의 오류라고 비판한다. 르페브르는 기하학상의 빈 공간(empty area), 공간 인식에서 대상과 주체를 배타적으로 설정하는 데카르트적 공간, 공간을 지식의 도구로, 현상을 분류하는 수단으로 상대화하는 칸트 모두, 여전히 선험적인, 본질적인, 초월적인 공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공간을 사회적인 것과 무관하게 파악하는 기존의 철학이나 수학에서의 공간 인식론은, 공간을 인간 경험과 관련 없는 선험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대상화하였다. 공간을 ‘그릇 대 내용물(container versus contents)’의 논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철학과 수학에서의 전통적인 공간 개념은 ‘정신적인 것’ 혹은 ‘정신적인 장소’이다. 이 때 공간의 지위(status of space)와 주체의 지위(status of the subject),19) 즉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는 대상은 대립항으로 설정된다. 공간, 몸에 대한 뛰어난 여성주의 이론가 엘리자베스 그로쯔(Elizabeth Grosz)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공간은 사회적 공간으로, 사회적 공간은 운동하고 변화하면서 다른 공간을 만드는 계속적인 다른 거주의 가능성이라고 말한다.20) 공간 구조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의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공간을 그릇으로 인식하는 공간의 대상화는 위계적 인식론을 동반하게 된다. 그릇으로서의 공간은 성별화된 언어가 된다. 공간의 대상화는, 공간은 여성적인 것으로 시간은 남성적인 것으로 범주화해왔다. 시간은 (남성)주체의 내부가 되지만, 공간은 주체의 외부가 된다. 앞서 언급한 지리학자 투안의 인본주의 지리학에서도 장소는 여성화된 것이었다. 여성은 공간(space) 혹은 장소(place)로 간주되어 왔다. 이처럼 젠더 사회에서는 여성이 장소가 되기 때문에, 여성의 장소는 없게 된다. 여성을 장소로 여겨온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분석 심리학자 칼 융은, 여성은 집, 가족, 국가, 지방의 혼이며 도시는 그 태내(胎內)에 시민을 품고 있는 어머니라고 하였다. 구약성서와 묵시록의 예루살렘과 바빌론은 역시 어머니이자 아내로 간주되었다.21)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문화와 언어를 담는 영토가 된다. 예를 들어, ‘신여성’ 담론이 대표적이다. ‘신여성’과 ‘구식 여성’이라는 구분은 있지만, 신남성과 구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이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근대와 진보를 표상하는 장소가 되었음을 뜻한다.22) 남성의 몸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 젠더 차이가 물질적으로 각인된 공간이 된다. 여성의 몸이 차이의 기호가 되는 것이다.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성차(sexual difference)가 구성되기 때문에, 언제나 여성의 몸이 ‘문제’가 된다.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 대한 남성 중심적 해석은 여성의 인격과 존재성을 출산력으로 환원(‘애 낳는 기계’)시켜 이를 성차별의 근거로 삼아왔다. 이때 여성의 몸은 아이를 담은 그릇으로, 공간적 메타포를 갖게 된다.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의 몸은 집(house)으로 비유되어 왔다.
여성의 몸이 남성에 의해 명명되어 왔기 때문에, 많은 여성의 신체 기관들이 공간 명칭을 갖고 있다. 남아가 사는 곳인 ‘자궁(子宮)’, 여성의 질을 뜻하는 버자이너, ‘vagina'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칼이 머문다는 뜻의 ‘칼집’이다.23) 질의 한자인 ‘膣’ 역시, 방(室, 실)이라는 글자를 포함하고 있다. 중세 영주가 농노의 아내에 대해 초야권을 행사했던 논리 중의 하나인, 여성의 질이 남성의 성기를 잘라버린다는(vagina dentata) 삽입 섹스의 공포도 여성의 질에 대한 공간화에서 기인한다. 성교를 의미하는 ‘삽입(intercourse)’이라는 말 자체가 여성은 영토로 전제한다. 여성 비하적 언어로 논쟁 대상이 대곤 하는, ‘아줌마’라는 말은 여성을 ‘아기 주머니’로 보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아줌마는 ‘아기 주머니’ -> ‘아주머니’ -> ‘아줌마’의 유래를 갖고 있다.24) 아내를 일컫는 ‘집’사람이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가부장제 사회의 월경 금기나 혐오도 자궁에 대한 공간적 비유로 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 다. 월경은 임신의 실패이기에 혐오의 대상이 되는데, 임신의 실패는 여성이 남성의 정자를 성숙시키는 안전하고 따뜻한 자궁을 제공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된다. 수정(受精)이 “공을 바구니에 넣는 것” 혹은 정자가 여성의 질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으로 의미화 되는 한, 월경 혐오는 지속된다.25) 흑인 여성, 나이든 여성, 장애 여성, ‘뚱뚱한’ 여성 등 여성 내부의 타자들은 규범적(백인, 중산층, 젊고 예쁜 여성...) 여성과 달리, 강간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 통념 역시, 강간이 정숙한, 절제된, 깨끗한 개인적 공간을 침범하는 것으로 의미화 되기 때문이다.26) 흑인 여성은 그러한 특성-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흑인 여성은 강간당할 리 없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공간적 비유는 매우 일상적이다. 남성 저자가 쓴『책 죽이기』라는 책은, 책의 탄생과 죽음을 여성의 수난에 비유하면서 출판계를 풍자한다. 책의 생애를 학살, 망신, 임신, 진통, 출산, 죽음 등으로 비유한다. “침대에서 대충 책을 읽다가 펼쳐 놓은 채로 바닥에 팽개치면, 책은 밤새 ‘가랑이를 벌린’ 매춘부처럼 누워있다. 이런 맥락에서 도서관은 ‘사창굴’이고, 책을 사는 대신 복사라도 할라치면 책이라는 여성은 복사기 불빛 때문에 장님이 될 수 있다. 어떤 뻔뻔한 사람은 몰래 면도날로 책을 오려냄으로써 여성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다”27) 는 식이다.
4. ‘공간으로서 여성의 몸’과 성폭력
구한말 청일 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간의 싸움이었지만, 청일 전쟁은 전쟁 당사자들의 영토가 아닌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약자의 몸/공간이 강자의 경합 대상과 전쟁터가 되어온 역사적 사례들은, 권력이 공간을 매개하여 실현됨을 보여준다. 공간은 권력을 매개함과 동시에 권력을 생산한다. 공간을 권력의 획득물로 보는 관점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몸과 공간을 배타적인 범주로 설정하는 공간에 대한 타자화의 가장 극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빈 그릇으로서의 공간 개념에서는 누가 획득하는가, 누가 그 공간을 채우는가에 따라 공간의 성격이 달라지게 된다. 이때 공간은 사물로 간주되고, 이 사물은 소유의 논리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차이’와 타자성이 공간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단히 젠더적이다. 앞서 언급한, 정자가 모든 유전 물질을 나른다고 보는 “남자는 씨, 여자는 밭”이라는 여성의 몸을 공간화 하는 인식은, 성폭력의 발생, 은폐 논리가 된다. ‘여성은 밭이기 때문에’, 전쟁 시기의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과 강제 임신은 ‘인종 정화(淨化)’로 합리화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 공동체의 재생산을 위한 최후의 재산으로 간주된다. 여성의 몸이 여성의 것이 아니라 남성 공동체의 소유물이 될 때, 집단 강간은 남성들간의 소유권 분쟁, 재산 탈취 행위로 간주된다. 어떤 남성과 섹스 하느냐(“어떤 씨가 뿌려졌느냐”)에 따라 여성의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에, 여성의 몸은 전쟁시 ‘전리품’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탈사회화, 탈육체화(disembodied)된 공간 개념은, 국가간, 인종간, 성별간 전쟁의 인식론적 토대를 제공해왔다. 탈취 대상으로서의 공간이 성별화 될 때, 집단 간 전쟁은 전시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인종적, 계급적, 성적 타자화 등 특정 집단에 대한 타자화가 공간의 개념으로 설정되는 경우, 특히 여성의 몸은 여성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으로 대상화된다.
‘일상’에서의 성폭력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폭력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가해 남성과 피해 여성이 속한 혹은 피해 여성을 소유한 남성 집단 간의 갈등으로 환원되는 것도 여성 몸을 남성의 공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폭력의 발생 원인이자 성폭력 해결되지 않는 이유 그리고 성폭력의 가시화 과정에서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이 문제가 남성과 남성 사이의 정치로 환원된다는 점이다. 이는 남성은 정치적 주체로 여성은 정치적 희생자로 전제하여, 남성과 남성간의 갈등은 정치적 문제로, 남성과 여성의 갈등은 개인적인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폭력 해결 과정에서, 피해 사실 자체 보다는 가해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이슈가 된다. 가해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성폭력은 처벌되기도 하고, 극히 개인적 문제로 간주되기도 한다. 성폭력 가해자가 미군이나 경찰이라면 이는 정치적인 문제지만, 아는 사람이나 가족일 경우는 사적인 문제가 된다. 한국사회에서 일제시대 ‘군 위안부’ 문제의 가시화와 역사화는 바람직한 일이지만, 한편, 이는 여성이 당하는 성폭력이 민족주의의 이해와 일치할 때에만 문제시된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가해 남성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성폭력 사건은 남성들간의 정쟁의 도구가 된다. 피해 여성의 인권과 관계없이 남성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폭력 사건은 신속히 해결되기도 하고 은폐되기도 한다. 명백한 여성에 대한 폭력인, 소위 ‘박근혜 패러디’ 사건이나 제주도 도지사의 성추행 사건이, 한나라당과 열린 우리당,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싸움으로 여겨진 경우가 대표적이다. 성폭력이 여성 인권 침해가 아니라 순결의 문제가 되거나 피해 여성이 속한 가족, 학교, 노동조합, 국가 등 남성 공동체의 불명예나 도덕적 훼손으로 인식되는 한, 성폭력은 해결은 커녕 가시화되기조차 어렵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여성에 대한 폭력 중의 하나인 황산 테러(acid terror)의 가해자들은,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여성이나 지역간/집안간 갈등 시 상대방 집단의 여성의 얼굴에 황산을 끼얹는다.28) 이러한 현상은 여성의 몸이 남성들간 권력 투쟁의 표식지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전시에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강간이 상대 남성 공동체를 파괴하는 제노사이드 전략으로 실행되는 것은, 여성의 몸이 전통, 국가, 민족을 표상하거나 남성 공동체 유지 여부를 증명하는 척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29)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재생산 능력과 성 활동은 여성 자신을 위해 기능하지 않는다. 여성을 성폭행 하는 것은 여성 인권 침해가 아니라, 그 여성을 소유한 남성에 대한 모멸과 위협으로 의미화 되기 때문에, 전쟁시 집단 강간은 상대 집단의 재생산 기능, 문화, 정체성을 파괴하는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한다.
여성의 몸이 남성 집단 간의 전장(戰場)이 되면, 여성은 기존의 좌/우, 진보/보수라는 정치적 구분에 상관없이 양쪽 모두에게서 성폭력을 당하게 된다. 6년간 지속된 4. 3 사건에서 제주 여성들은 우익 테러 조직인 서북청년단과 좌파인 ‘산사람’에게 모두 성폭력을 당했고,30) 12년간의 페루 내전에서 여성들은 정부군과 ‘영광의 길(the Shining Path)’이라는 페루 공산당 모두로부터 강간, 살해되었다.31) 여성의 몸이 공동체 ‘문화의 그릇’으로 간주되면, 종족의 단일성과 종족 지배 그리고 종족 간 합병과 팽창, 한 민족에 의한 다른 민족의 획득은, 모두 여성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영토뿐만 아니라 남성이 상징하고 구현하는 문화를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 은 모두 젠더적 행위로, 여성의 몸을 매개하여 진행된다. 그리하여,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occupation of the womb)32)을 의미한다.
1992년 前유고슬라비아에서 진행된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강간과 성적인 고문의 희생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92년 9월말에 보스니아 정부에 의해 공개된 수치에 따르면, 150만 명의 인구 중에서 대략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 구금되었다. 남녀 모두 이 캠프에서 고문을 당했으며, 이 고문에는 강간과 성적인 불구자로 만드는 고문이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남성들은 그들의 여자 친척들이 강간당하는 장면을 강제로 목격해야 했다. 같은 보고서는 최소한 14,000명의 여성들이 강간당했다고 보고한다. 이중 2,000명은 6-18세의 소녀들이며, 18-35세가 8,000명, 35-50세가 3,000명, 50세 이상이 1,000명이다. 6세 소녀에서부터 80세 여성까지 피해자가 된 것이다. 1992년 유럽공동체(EC)의 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세르비아 병사들은 20,000명의 여성들(주로 회교도들)을 강간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내무부는 강간 피해 여성을 50,000명으로 보고 있다.33)
당시 세르비아 병사들은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 “우리는 너희의 여자들을 강간할 것이다. 그러면 여자들은 우리 세르비아 아이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집단 강간을 통한 강제 임신은 상대 공동체를 물리적으로, 문화적으로 파괴시키는 공식적인 전쟁 정책의 일부이다. 전쟁 시 집단 강간은 통제력을 상실한 병사들의 돌발적 개별 활동이 아니라 명령에 의해 조직적으로 행해진다. 유고 내전에서 강간에 참여한 남성은 “나는 할 수 없이 했어요. 내가 여자들을 강간하지 않았다면, 상관들은 나를 죽였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또한, 가해 남성은 피해 여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그 짓을 해야만 해. 왜냐면 우리 상관이 명령했고, 네가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이야. 너희들 이슬람교도들은 너무 많아. 너희들을 파괴하고 몰살해야 해. 그래야 영웅적인 세르비아 사람들이 이 지역을 다시 지배할 테니까”.34) 근대 전쟁의 특징인 절멸(絶滅),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는 타민족 여성을 강간하여 자신의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35) 이 전쟁에서, 크로아티아와 이슬람 여성들은 세르비아인의 ‘국가 건설을 위해서’ 강간당했다. (남성) 국가는 여성의 몸 위에 건설되는 것이다.
1971년 9개월간 진행된 당시 東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시)과 西파키스탄(현재 파키스탄)간의 분리주의 전쟁에서, 서파키스탄 병사들은 5-6백만의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공격했고, 이중 무려 3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약 20만 명에서 40만 명의 방글라데시 여성과 소녀들이 강간당했는데, 이 전쟁에서 가장 최소치로 추정하는 강간 피해 여성의 수는, 90년대 유고 내전에서 가장 최고 수치로 추정하는 피해 여성의 수의 세 배가 넘는다. 당시 집단 강간을 자행했던 파키스탄의 한 병사는, 인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랑스러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진격했죠. 그리고 진격하는 곳마다, 우리의 씨를 뿌렸죠”.36)
전시에 개인의 몸은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회적 몸으로 재현된다. 개인의 몸을 살인하고 불구로 만드는 것은, 그의 국가를 살인하고 불구로 만드는 것이다. 여성의 몸은 특히 그러하다. 깨끗함이나 더러움이라는 문화적 관념이 개입되는 전쟁 강간은, 여성 섹슈얼리티가 민족성과 연관되기 때문이다(남성의 섹슈얼리티는 민족성과 연결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 명예의 상징적 저장소, 용기(容器)이며, 남성들간 경쟁의 상징적 영역이 된다. 남성들은 ‘자기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다른 남성 집단의 여성들 몸을 침범(강간, 납치)함으로서 남성성을 경쟁한다. 여성의 몸은 가계(家系) 혈통의 축소판, 혈통의 상징, 즉, 남성이 지배하고 있는 영토로 간주된다.37) 인종 청소는 남성이 상대방 국가 영토를 ‘처녀지’로 만드는 과정이다.
한국의 대다수 남성들이 일제시대 ‘군 위안부’ 경험을, “우리 겨레의 여성들을 육체적으로 파괴함으로서, 여성은 물론 우리 겨레 전체를 정신적으로 파괴한 민족의 수치”라고 보는 것은, 민족이라는 범주 자체가 여성의 몸에 기반하여 형성됨을 의미한다. 전시 성폭력을 여성 인권 침해가 아니라, 여성의 생식 능력 훼손이라 보고 이를 민족 말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때 여성의 몸은 남성 집단 간 갈등을 의미하는 ‘정치’에서, 가장 확실한 동원의 토대로 기능하게 된다. 강간은 피해 여성뿐 아니라, 피해 여성의 남편, 오빠, 아버지, 아들 등 남성에게 굴욕을 준다. 왜냐하면, 남성 문화에서 강간은 자신의 여자를 보호하지 못한 남자들의 무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자기 재산’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치스러워 한다. 강간당한 여성은 남성 공동체를 수치심과 굴욕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피해를 숨기고 침묵해야 한다. 성폭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영혼, 혈통, 명예를 상실한 남성들의 패배가 공식화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모든 공격과 폭력을 숨기는 것은 남성 공동체의 재산에 대한 통제 방식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여성의 명예가 남성의 명예이며, 곧 국가의 명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95년 비엔나에서 열린 유엔 인권위원회 NGO포럼에서는, 제네바 헌장이 강간을 ‘명예에 반하는 범죄(a crime against honor)'로 규정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는 강간을 인간에 가하는 폭력과 고문 방식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남성과 공동체의 명예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38)
제주 4.3 사건에서 여성의 고통도, 여성의 몸이 남성 집단의 기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친미 반공 국가 탄생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 4.3 사건에서 제주도 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과 집단 성폭행은, ‘빨갱이’에 대한 증오의 산물이었고, 그러한 증오가 여성의 몸에 실현된 것이다. 4.3 당시 우익 테러 세력은 ‘빨갱이 소탕’, ‘공비 토벌’이라는 이름하에 마을을 불태우고 집단적으로 주민을 살해하였는데, 여성은 반공폭력과 성폭력의 이중적 희생자가 되어 그 피해의 참혹성이 두드러진다. 당시 여성들은 아이를 출산하는 도중에 학살당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여성의 몸이 ‘빨갱이’를 재생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간통하다 들킨 여성을 용공 혐의자들이 집결한 공공장소에 데려와 성행위를 강요하고 나서 국부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폭파시킨 사례라든지, 외딴 집에서 공포에 떨며 혼자 조용히 갓을 만들고 있던 입산자의 처를 집중 사격하여 사체의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사례는, ‘좌익 소탕’ 이상의 의미를 시사한다. ‘빨갱이’에 대한 증오와 남성의 성적 판타지가 교차하는 국가폭력의 정치 기술은, 여성의 몸을 ‘빨갱이의 몸’으로 재현하였다.39)
5. ‘성적 자기 결정권’의 공간 논리를 넘어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섹슈얼리티는 성별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다르다. 남성은 섹슈얼리티 실천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지 않지만,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정치적인 모순이다. 남성의 계급과 정체성은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지만, 여성의 성이나 몸은 여성의 지위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정숙한 여성’과 ‘문란한 여성’은 여성의 지위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곤 하지만, 남성은 ‘정숙한 남성’과 ‘문란한 남성’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자원이자 억압이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에게 성은 자아와 인격, 자신의 가치를 좌우하는 주요 요소의 하나이기 때문에, 남성의 성폭력은 여성을 통제하는 권력이 된다.
성폭력이 인권 침해가 아니라 남성 재산권 침해로 의미화 될 경우에는, 남성 중심 사회도 성폭력 피해의 심각성을 인정한다. 남성이 (다른 남성의 재산인)여성을 성폭력 하는 것은, 남성 연대를 깨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폭력이 남성의 시각에서 정의될 때, 성폭력은 ‘정조를 침해한 죄’가 된다. 정조는 남성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일종의 가치이고, 여성들은 그러한 가치 체계에 따라 분류된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트랜스 젠더 여성, 군대나 교도소 등에서의 남성에 대한 성폭력이 제대로 처벌되지 않는 관행은, 피해자가 남성이 보호해야 할 가치인 ‘정조를 지닌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 강간도 마찬가지인데, 아내가 남편에게 강간당할 경우와 다른 남성에게 성폭력 당하는 경우, 완전히 다른 문제로 인식된다. 성폭력이 정조, 순결 침해의 문제로 인식될 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성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가족, 국가 등 여성이 속한 남성 공동체의 소유가 된다.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 개인이 가진 것이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성의 몸 밖에 존재한다. 때문에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혹은 소위 ‘꽃뱀’ 여성과 성폭력 피해 여성은 연속선에 존재하게 된다. 여성의 성을 여성이 갖지 못하고 매매와 폭력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성의 성이 남성의 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남성의 성을 위한 제도인 성매매와 성폭력은 동일한 성격을 갖는다.
전통적인 페미니즘 이론 특히,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상과 그간 한국의 反성폭력 여성운동은, 성폭력이 정조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self-determination)’을 침해하는 문제라고 주장해왔다. 성적 자기 결정권 담론은 순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여성의 성이 여성에게 속해있음을 주장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반이었다. 하지만, 성적 자기 결정권 개념은, 몸/정신 이분법과 개인(individuals)의 개념을 전제하는 자유주의 철학에 기반 한 논리이다. 이 개념은 여성도 남성처럼 몸이 아니라 정신의 담지자라고 보며, 여성도 남성처럼 개인의 위치로 승격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성폭력이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별 제도, 젠더라는 사회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범죄라는 여성주의의 주장과 모순된다. 여성이 성적인 권리를 스스로 결정,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에서는, 성폭력 피해의 책임 역시 여성이 지게 된다. 이 때 성폭력은 (본래부터)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진 남성과 (투쟁으로 획득한)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진 여성,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 개인적인 문제가 된다. 그래서 그간 反성폭력 여성운동은 지향으로서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면서도, 여성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는 주장을 동시에 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성적 자기 결정권은 비장애 성인 여성을 기준으로 한 논리로서, 장애 여성이나 여자 어린이, 여성 노인에게는 적용하기 어렵다. 비장애 성인 여성 중심의 시각에서 보면, 장애 여성, 여자 어린이, 여성 노인 등 여성 내부의 타자들은 성적 자기 결정을 하기 힘든 존재로 간주된다. 또한 장애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의 의미와 내용이 비장애 여성의 그것과 같다고도 할 수 없다. 특히,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자유주의적으로 해석될 때, ‘10대 원조 교제(청소녀 성매수)’, ‘자발적 매춘’, 낙태 등의 문제는 여성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행사한 결과로 여겨진다. 개인이 원하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행위의 내용은 개인의 고유한 의지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성적 자기 결정론은, 개인의 자기 몸에 대한 결정 내용이 사회 혹은 상대방과의 상호 작용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추상적, 현실 초월적인(disembodiment) 논리이다. 개인의 몸은 그 몸을 ‘소유한’ 개인의 판단(mind)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이, 여성의 정신(mind)에 의해 투명하게 구성되거나 약자인 여성의 결정이기에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은 아니다. 이처럼 성적 자기 결정권은 순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서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이지, 여성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간 한국사회에서 성적 자기 결정권의 정치학은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로 대변되어왔다. 이 때 내 몸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 나의 정신의 결정에 따른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다. 내 몸이 나의 것일 때, 나의 몸은 나(의식)의 소유나 판단 대상에 불과하게 된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남성의 여성 몸에 대한 공간화를 비판하는 논리이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의 이항 대립에 근거하여 여성의 몸을 여성 자신(의식)의 공간으로 삼는 논리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폭력이 사적인 피해라는 자유주의 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지만, 몸을 주체의 소유물, 주체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40) 몸을 주체의 소유물로 보는 관점에서는, 몸은 마음이 아닌 어떤 것이며, 몸은 영혼, 이성, 마음의 배반이자 감옥으로 간주된다. 몸은 존재를 담아두는 보관 장소에 불과하게 된다. 페미니즘 역시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걸쳐 남성이 가정한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다고 볼 수 있다41)
정신의 작용으로 몸을 환원하면, 몸과 정신의 상호 작용을 설명할 수 없다. 몸은 언제나 개인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각인된 공간에 불과하게 된다. 몸은 정신의 작동을 기다리는 예측 가능하고 투명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몸과 정신의 이분법 그리고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사고방식 속에는, 감정, 정서, 정신적인 것을 형성하는데 몸의 역할과 몸과 정신의 상호 작용을 무시하게 된다. 실제로 몸은 정신의 명령으로만 작동하는 수동적거나 비생산적인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 의식이 투철한 여성이 성폭력 피해 현장에서 옴짝 달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여성주의 세계관에 노출된 적이 없는 여성이 성폭력 현장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가해 남성이 당황하게 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몸이 정신의 종속이라고만 본다면,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의지의 행위와 몸의 운동은 같은 사건이다. 정신도 결국은 유기체의 한 표현이다. 몸은 고정된 의식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생성 중인 과정에 있다. 몸은 정신과 상호 작용하며, 그 자체로 생산적으로 기능한다. 몸은 반응하고 행동한다.
가부장제를 여성의 몸을 전유, 통제하려는 남성의 권리 체계로 이해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전쟁터이며, 여성이 탈환해야 할 어떤 공간이라는 것이다. 남성의 재산인 여성의 몸을 여성이 다시 소유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몸이 남성에 의해서든(순결 이데올로기) 여성 자신에 의해서든(성적 자기 결정권), 여성의 몸이 주체의 대상으로서 공간이 되면, 몸은 언제나 이성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논리에서 여전히 몸은 이성, 의식 중심주의에 종속되고, 몸들인 여성들 개인의 저항은 의미화 되기 어렵다.42) 성적 자기 결정권을 넘어, 몸을 식민화하지 않는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저항 개념 모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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