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비평, 2003, 여름호
어느 비이성애자, 이성애를 묻다
한채윤(한국 성적 소수자 문화 인권 센터 부대표)
대형서점에 가봐도 ‘이성애 전문지’란 타이틀을 단 책은 한 권도 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뜬금없이 ‘동성애 전문지’라는 새로운 장르를 주창하면서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까지 버젓하게 단 잡지가 있으니 바로 <버디Buddy>이다. 그리고 내가 그 잡지의 편집장 노릇을 한 지 어느 새 다섯 해를 넘어가고 있다. 서두부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다소 엉뚱맞을 ‘몸글’이 만들어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동성애자 억압과 차별’이란 주제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진땀을 혼자 꽤나 흘려야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동성애자들이 처한 부당한 현실을 설명하고 이렇듯 무고한 동성애자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성애주의heterosexism의 굴레를 다함께 치워버리자는 제안으로 마무리하면 될 글을 쓰면 될 것인데, 그만 글쓰기에 앞서 ‘심통’이 발동해 버렸던 탓이다.
사실 그간 나의 주요 일상 업무 중 하나는 이성애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대해 알아듣기 쉽도록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일이었다. 비록 비슷한 질문들이 끝없이 반복되는 지겨운 일과이긴 하지만, 여타의 계몽운동이 그러하듯이 나름대로의 재미와 즐거움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나는 비로소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낌새를 감지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성애자들로 하여금 ‘저기 … 이성애자라서 동성애에 대해선 잘 몰라요.’라는 말을 무슨 수줍은 고백이라도 하는 양 털어놓게 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동성애자가 ‘호모’로 불렸던 7-8년 전과, 소위 <동성애 코드>가 뜬다는 요즘을 비교할 때 달라진 점을 들자면 예전에는 다짜고짜 ‘대체 동성애가 뭐야?’라고 물었다면, 지금은 ‘제가 주변에 아는 동성애자가 없어서…’라고 미안해하며 묻는다는 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미안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어차피 이성애에 대해서도 잘 모르긴 마찬가지 일 텐데. 동성애자에게 자주 그러했듯이, ‘당신은 언제 이성애자인 것을 알았나요?’라고 묻는다면 바로 대답할 이성애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수줍고 겸손한 그 고백 뒤에 은근히 깔려 있는 오만함을 발견할 때면, 요즘 tv에서 자주 보이는 한 개그맨의 유행어를 빌어 ‘자신도 모르는 게 잘난 척 하기는…’이라는 심통이 가득 차오르는 것이다.
이렇게 잔뜩 꼬인 심통의 불똥은 여기 저기로 튀어올라 새삼스러운 의문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글들, 심지어 동성애자의 주체성에 대한 글조차도 ‘이성애=다수’라는 절대적 전제하에 글을 전개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말 이성애자가 다수일까? 막말로 계급장 떼고 한 판 붙는다고, 이성애주의 사회가 아니라고 가정한다 할 때도 이성애자의 수가 더 많을까? 그런데 이성애에 대한 정의가 뭐지? 근데 이성애가 정상인 게 확실한 거야? 연구 성과로 따져보면 이성애가 정상이라는 증거는 동성애가 비정상이라는 증거보다 훨씬 더 빈약하지 않나? 어쩌면 올바른 논의는 이성애자가 다수라는 전제를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다수 이성애자용’으로 맞추어진 글이 거듭 쌓여서 마침내 그 ‘다수’의 마음을 움직여 이성애와 동성애 따위의 구별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인종차별에 대항한답시고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차별한다고 격분하지만, 유색인종이라는 말 안에 이미 ‘흰색은 색이 아닌’ 백인 중심적 시각을 반영해버리고 말 듯이,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려 해도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나누어버린 동/서양의 기준을 피할 수 없듯이 말이다.
먼저 이성애자에게 묻다.
이성애자들이 자신을 정의 내리는 일에 골몰하지 않는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탓에 우리는 아주 진지하게 ‘이성애의 정확한 의미는 뭐지?’라고 질문을 던져도 쉽게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어쩌면 근래 자주 언급이 되는 ‘성적 경향’ 혹은 ‘성정체성’이라는 혼란은 동성애자의 몫이 아니라 사실 이성애자들의 몫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제는 이성애자들이 자신을 ‘이성애자’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다수자’로 명명하는 일에만 익숙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비주류자의 몫이며 지배자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때문이라는 명쾌한 분석도 이미 있지만, 나는 좀 더 꼬투리를 잡고 늘어져 볼 참이다. 왜냐면 설사 그렇다 해도 모든 일에 민감한 지식인들이, 이성애자 지식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음에 좀 더 불안감을 드러내지 않는지, 그리고 또한 당연히 경험한 일이 아니기에 동성애에 관한 구체적 고민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이성애자 동지(?)들에게 이해하라고 강조하기만 하는 것인지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외에 밝혀야 할 나의 걱정거리 중 하나는, 개념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는 문제이다. 이성애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한다고 뛰어다니면 다닐수록 나는 점점 동성애자가 누군지 애매하고 곤혹스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동성애자가 뭐냐는 질문에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너무나 취약한 정의이다. 특히 ‘그건 사랑이 아냐. 우정을 착각하는 거지’라는 반론이라도 들어오면 금세 철학자들의 이름까지 들먹거리며 우정과 사랑 사이의 딜레마, ‘성욕의 개입 여부’ 등 동서고금의 변천사를 읊어대는 복잡한 논쟁에 빠져버린다.
한때는 이성애자들이 가장 헷갈려하는 트랜스 젠더와 동성애자의 구별을 위해 ‘자신의 육체적 성별을 인정하고 그 육체적 성별과 동일한 성의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구차한 설명도 써보았고, ‘동성에게 성적, 애정적, 색정적으로 끌리는 사람’이란 심리학적 정의도 이용해보았다. 그러나 이론에 사람을 끼워 맞출 일도 아니고 사람을 관찰해서 이론화를 시킬 요량이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하건대 ‘나는 모르겠소’이다. 연령, 성별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나 상담을 해보면 그 중에는 동성과 성행위만을 즐기는 이가 있고, 동성을 사랑하지만 한 번도 성행위를 해본 적은 없는 이도 있고, 동성에게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끌림은 느끼지만 성적 끌림은 이성에게만 느끼는 이도 있다. 이성과의 성경험이 있는 동성애자도 있고, 양성애자라고 하지만 데이트 경험은 이성뿐인 이도 있다. 또한 자신을 양성애자라고 말하는 십대나, 줄곧 이성과 지내다 어느 날 동성과 사랑에 빠진 사십 대 중년의 경우 둘 다 양성애자일까? 아니면 이성애자에서 동성애자로 바뀐 것일까? 혹은 이성애자에서 동성애자로 바뀐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이쯤 되면 머리가 아파서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따위의 쓸데없는 구분이 없어져야 한다고 이를 갈게 되지만 세상이 꿈쩍할 리는 아직 없을 듯 하다. 자기가 누군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음은 이미 밝혀놓지 않았는가.
그래도 나는 묻고 싶었다. 왜 이성애자가 되었는지, 언제 이성애자임을 알게 되었는지, 이성애자로 사는 것이 그럭저럭 괜찮은 지도 물어보고, ‘동성애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발언에 정치적 올바름을 유지하려는 환상이 숨어있지는 않은 지도, 또 이성애의 원인을 밝혀보라는 오만도 부리고 싶었다.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를 억압하고 차별한다고 스스로 밝히면서도 왜 그 억압 기제와 차별 현황에 대한 성찰은 늘 동성애자들의 몫인지, 가해자보다 피해자들이 더 섬세하고 더 예리하게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구조의 모순을 타파할 수 있다는 지적조차 가해자들의 태만에 대한 합리화처럼 보이노라고 타박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易地思之의 정신으로 순화가 될 만큼 순진할 리는 없다. 남성 우월주의, 이성애주의, 깨어지는 혈연 가족의 신화 등 이성애자들은 이미 너무 많은 문제에 봉착해 있어서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남성 우월주의, 이성애중심주의, 결혼과 가족의 신화는 이성애자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은 동성애자 내부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단순화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성애자들의 주요 관심사와 고민거리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언급이다.
하는 수 없이 한 발짝은 양보해야 할까. 다시 초점을 동성애자 쪽으로 돌려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말을 다 하지 못하는 이성애자들을 위한 代言이라고 위로해주자.
나는 비이성애자로소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해도 불만은 남는다. 그 동안 주로 이야기되던 방식이 ‘이성애 정말 정상일까’가 아니라 ‘동성애 과연 비정상인가’라는 식이었고, 이성애자와 트랜스젠더의 차이보다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의 구별에 대해서 더 많이 논하고, ‘나는 동성애자야’라고 했을 때 상대방 역시 ‘아, 그래? 나는 이성애자야.’라고 함께 밝혀주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등. 너무 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이성애(자)가 모든 논의의 기준이 되는 이 ‘전제’부터 깨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만은 남는다. 어쩌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아닌 다른 표현부터 찾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새로운 의심이 눈을 떴다. 아무리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말하려 해도 현재의 사회에서 ‘동성애’는 어디에서든 먼저 눈에 띄는, 의도하지 않으려 해도 어딘가 선정적이고, 단순해지려도 수많은 담론의 고리들이 치렁거릴 수밖에 없을 터인데, 이에 비해 흐트러지려 애를 써도 너무 멀쩡해있는 ‘이성애’와 가지런히 병치해 둔다는 것이 침묵은 아닐까?
모든 동성애자는 처음엔 이성애자였다. 알다시피 한국은 이성애주의 사회이다. 사람은 이성애자 남성 혹은 여성으로 태어난다고 간주되고 특별히 일탈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그대로 이성애자라는 믿음이 적용된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들이 ‘나는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어느 날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성애적이지 못함’을 조금씩 반복해서 느끼는 과정이 바로 정체성 형성의 과정이며, 더 이상 거부하거나 어찌할 수 없이 확실하게 자신이 이성애자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면서 바로 ‘이성애적이지 못한’ 상태를 합리화해주는 단어로 ‘동성애자’를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이성애가 흔히 쓰이지 않고 낯설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서는 ‘난 이성애적이지 못해’가 아니라 ‘어, 이상해. 나는 남들과 좀 다른 것 같아.’라고 인식하는 것뿐이다. 결국 동성애자는 비이성애자(non-heterosexual)인 셈이다.
이미 주어진 ‘성 정체성’이란 책을 이성애자는 간단히 무사통과로 읽어나가는 ‘긍정’의 과정을 거치지만, 동성애자는 이미 새겨진 활자 위로 줄을 쫙 그어 지워가며 다시 쓰는 고통스런 ‘부정’의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 이것이 근본적 차이이며 또한 억압이 발생하고 차별을 느끼게 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있는 것을 지워야하는 지난함, 여백을 찾아 자필로 써 나가야하는 고단함, 허용되지 않는 글쓰기를 들키지 않으려는 불안과 조바심, 들키면 모욕과 처벌을 받을까하는 두려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역시 잔뜩 낙서(이성애자가 보기에)가 된 책이 공개되었을 때 그 후에 발생할 일을 예측하거나 조절할 수도 없다. 동성애에 대한 개개인의 무지뿐만 아니라 이미 제도화된 편견까지, 동성애자의 삶을 피곤하고 주눅 들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동성애자를 비이성애자로 파악하길 권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이성애자’라는 용어가 동성애자를 대체하여 널리 쓰이길 바란다는 것은 아니다.
이해하기 그토록 어렵고 낯설기만 할 동성애자라는 말 대신 그보다는 익숙할 비이성애자로라도 넣어 생각해 보라는 제안이다. 그럼으로써 전보다는 더 ‘이성애’에 주목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것이 그리 매끄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원래 이성애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헤테로 섹슈얼은 동성애자를 뜻하는 호모 섹슈얼보다 뒤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1892년 James Kieman이 시카고의 한 의학 논문지에 논문을 기고하는 과정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이성애의 정의는 ‘이성을 향한 비정상적 성도착적 취향’이었고, 여기서 ‘비정상’의 꼬리표를 떼고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이와 달리 호모 섹슈얼은 1869년, 헝가리의 한 의사가 남성간의 성행위를 범죄로 간주해 처벌하는 러시아의 형법의 부당함을 청원하기 위해 ‘동성끼리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통칭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단어 탄생의 의도와는 달리 성장과정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셈이다.
이성애자가 이성애자로서의 분명한 문제의식 없이 단지 이성애자로서 동성애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그럴수록 이성애주의와 차별 또한 더 강화될 수 있다. 시선의 변화 없이 힘의 변화가 오겠는가.
변형되어 가는 이성애주의 전제들
다행히도 시선에 변화를 두려는 이성애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해와 배려, 존중으로 무장했고 동성애 담론에 기꺼이 참여하고 또한 동성애자 인권 보호의 당위성을 설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성애주의는 훨씬 더 교묘하다. 쉽게 털어 내어지지도 않고 또 자꾸만 익숙한 쪽으로 안주하게 만든다. 여기서 이성애주의가 노골적으로 혹은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네 가지 정도의 사례를 살펴보려 한다.
작년 말, 모 대학에서 성적 소수자 인권에 관한 토론회가 있었다. 서울 고등법원 판사라는 분이 트랜스 젠더의 호적상 성별 정정에 관한 법원의 입장을 근엄하고 차분하게 밝히셨는데 그 논지를 요약하자면 1남 1녀가 혼인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제도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본 질서이므로, 단지 성전환증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성전환 수술을 받은 자의 성별을 변경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과연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일반인들이 용인을 할 수 있는가에 따라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성전환증의 원인, 치료의 가능성, 육체의 맞는 정신의 치료는 안 되는지, 멀쩡한 신체를 변경하는 것이 과연 인권 존중인지, 성전환 수술 범위를 어느 범위까지 허용할 건지 등 11가지 정도의 의문이 먼저 규명되고, 그래서 사회 일반인들의 인식이 성전환자를 이해하게 되면 그 때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최 2002 학술 세미나 <성적 소수자: 차이, 차별, 인권> 중 조대현 서울 고등법원 판사 발표 녹취록, 2002년 10월 7일.
주장의 전개는 법조인답게 매우 논리적이었고, 법원은 공명정대해야 하므로 성별 정정의 문제를 트랜스 젠더가 불쌍하니 혹은 원하니까 해주자는 식으로 갈 수 없다는 점도 충분히 수긍을 한다. 하지만 왜 그토록 냉정한 이성적 논리와 공명정대에 트랜스 젠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의지는 전혀 없는가. 1남 1녀의 혼인이 사회의 중요 질서라는 것과 트랜스 젠더의 성별 정정이 무슨 관련이 있으며, 성전환자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관심이 왜 일반인의 건전한 상식보다 우선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발표회장에서 무서움을 느꼈다. 그는 건전 사회 구현을 위해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을 두고 근엄했지만 나는 그 근엄한 사고 체계 앞에 멱살을 잡힌 듯 무서웠다.
두 번째, 홍석천의 커밍 아웃 이후 많은 이성애자 지식인들은 소수자의 인권을 역설했다. ‘동성애자와 자신의 작은 차이가 혐오로 전화되는 그 순간 … (중략) 우리 모두가 언제 어디서 순식간에 소수자로 전환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위험을 인지함으로써 자신을 현재 우연히 우월한 범주에 속해 있을 뿐이라는 것. 자기가 서 있는 지반이 그리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지적은 매우 설득력 있다. 김종엽, <지배자들의 소수자 정치, 당신도 예외일 수 없어>, 월간 <<말>>, 2000년 11월.
하지만 소수자이기 때문에,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동성애자를 보호해야 할까? 어쩌면 이건 가끔 장애인 보호 캠페인에서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당신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말로 비장애인들을 각성시킬 수 있을까. 위의 주장은 자칫 교통사고만 조심하면 장애인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역논리를 내포하고 또한, 교통사고라는 불운 때문에 비장애인에서 장애인으로 추락한다는 인상을 준다. 결국 이래저래 장애인은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어디 비장애인과 장애인, 이성애자 동성애자 등이 되거나 한다거나 되면 안되어야 한다거나 할 성질의 문제이겠는가. 그러므로 이성애가 우월하지 않다는 자각이 동성애자를 혐오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겸손과 배려의 차원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동성애자의 인권에 관심이 쏠리면서 사회의 대표적 약자(?)로서 ‘뜨다’보니 앞 뒤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옹호한다는 분위기도 생긴 듯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반작용도 생긴다. 언젠가 모 대학 교수들과 토론회를 마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버디>를 함께 만드는 동료이기도 한 나의 파트너와 함께 간 적이 있었다. 한 시간 정도 환담을 나누는데, 한 교수가 대뜸 우리에게 성 역할이 나누어진 것 같다고 했다. 아마 나와 상반되게 말없이 식사만 하는 파트너의 얌전한 모습이 내외를 가리는 이성애자 부부처럼 보였나 보다. 내가 그건 성 역할이 아니라 각자의 성격대로, 그리고 서로가 잘 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해서 할뿐이라고 설명하자, 그 교수는 다시 “거봐, 그럼 나누어진 거네. 우리도 자기가 더 잘 하는 거 해. 똑같네, 뭐.”라고 받아쳤고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우리는 당연히 불쾌해졌다. 그 교수가 우리의 말을 이해하는 대신 그 말을 멋대로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아버리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 행동에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동성애자를 깎아 내리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성애자로서 동성애자를 배려해줄 수는 있지만 동성애자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건 싫은가 보다. 성역할의 문제는 역할을 나눈다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기 중심으로, 다시 말해 개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이미 고정화되어 있는 역할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동성애자 커플의 역할 나눔이 이성애자의 그것과 같으리라는 단정/예상/전제도 한심하거니와, 자신이 아는 언어로만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는 이성애중심주의의 발로가 아닐지.
마지막 사례는 인권의식이 너무 투철한 나머지 동성애에 대한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는 이성애자에 대한 것이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예로 들어서 살펴보겠다. <번지점프를 하다>에 관한 영화평 중에는 이 영화가 동성애 혐오를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인유와 현빈이 자살하는 설정 때문인데 어떤 이는 동성애에 대한 무지가 낳은 설정이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다수의 시선으로 동성애를 합리화시키려는 횡포를 부린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씨네 21> 287호에 실린 남동철 기자의 글을 옮겨 보자면, <영화는 이들의 사랑이 이성애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남자 대 남자로 사랑하느니 다시 태어나겠다는 식의 주장은 무지가 낳은 용기 같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런 시선들이 오히려 더 이성애적으로 느껴졌다. 이 영화를 이성애주의 사회에서 좌절한 어느 이성애자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하지 않은가. 원래 사람은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가슴을 가졌다며 ‘SOUL MATE'를 낭만적 사랑의 극대치로 포장했지만, 고작 성별의 차를 극복하지 못해 현생을 접어 버리고 다음 생에 여자로 태어날지 남자로 태어날 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승부를 걸어보자며 도박 삼아 목숨을 던지는 무모한 이성애자의 이야기. 김규항 선생은 어느 글에서 동성애자가 변태라면 그것은 <남들이 다 디스필 때 혼자 엑스포를 피는 딱 그만큼의 변태일 뿐>이라고 했는데 김규항, <변태>, <<아웃사이더를 위하여>>,1999. 이 글은 1998년에 <씨네 21>에 게재되기도 했다. 김규항씨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성애자를 변태로 보는 것은 디스냐 엑스포냐라는 아주 사소한 차이를 두고 혐오감을 가지는 것처럼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이겠지만 사족 삼아 덧붙인다면 동성애자들이 느끼는 곤혹은 디스와 엑스포 간의 취향 차이 때문이 아니라 ‘남들 다’ 할 때 ‘혼자’ 한다는 것, 즉 ‘왜 나만 다른가’하는 지점에서 비롯된다. 주로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이해할 때는 ‘취향’의 차이로 받아들이고 억압할 때는 ‘다수가 하는 일에는 이유가 있으니 따르라’는 ‘숫자’의 차이로 보는 경향이 있다.
, 그렇게 보면 인우와 태희는 함께 다시 디스를 필 그 일치성을 거둘 때까지 빈 담뱃갑 구겨 버리듯 목숨을 던져 버리는 셈이다. 오, 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래서 이 무모한 사랑 앞에 ‘동성애자를 자살로 몰고 갔다’고 분노할 틈이 없다. 처음 태희를 위해 눈물까지 흘려가며 애써 담배를 배우던 인우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지고지순의 이성애를 나눈 그들이기에 더욱 더 동성애적 몸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을까. 그래서 다른 이성애자는 디스와 엑스포란 극히 작은 취향의 차이로 설명할 때 그들은 하필이면 지구상에서 가장 동성애 혐오가 적다는 뉴질랜드까지 가서 자살을 한 것일까. 이성애자의 삶을 옥죄는 이성애주의가 만든 비극을 지켜보며, 이 영화가 보기 드물게 이성애주의의 자기 고백적 반성을 담은 반성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호모 포비아가 아님을 자처하는 진보적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의 인권을 짓밟은 영화’라고 분노하는 것이 내 눈에는 ‘오버 액션’처럼 어색해 보인다.
진정한 다양성: 전제를 바꿀 수는 없을까.
지금 나의 글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동성애/이성애라는 이분법에 복무하고,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내부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거칠게 일반화시켰으며, ‘우리’나 ‘사람들’이라는 단어도 의도적으로 자제하였다. 그래서 이 글쓰기는 낯설고 힘든 작업이었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호명하는 일은 쉽지만 동성애자가 꼬박꼬박 말대꾸하듯 이성애자를 불러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역설적인 심술부리기를 하는 것은 앞서 밝힌 대로 많은 이성애자들이 친절하게 불러준 덕택에 겨우 얻어낸 목소리로, 이성애자는 알지 못하는 미처 헤아리지도 못한 또는 너무 멀거나 주위에 없어서 잘 모르는 동성애자의 아픔과 고난을 전달하는 일, 그 일 자체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기회,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한 한 한번에 극대치의 효과를 올려야 한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위치가 고정적이라면 그것은 대화가 아니다. 대화가 아니라면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동성애자에 대한 온정과 시기 1995년 대학 내 동성애자 모임이 생겨났을 때 언론은 상아탑이 동성애로 병들어간다며 우려했다. 작년부터는 중/고등학교에서 동성애가 유행한다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대체 무엇이 걱정되고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그리고 숫자가 얼마나 늘었기에 번지고 유행한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은 혹시 그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존재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이의 시기나 질투는 아닐까. 가 넘쳐나는 이 때에 나는 차라리 ‘말하기’를 멈추고 싶어졌다.
말하고 듣고, 듣고 말하는 행위가 진정한 효과를 거두려면 그 대화에 사용될 언어의 공유, 기준의 균형, 미리 상정한 전제의 공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말하는 자의 노력에 비해 듣는 자의 노력이 적다면, 사회의 제도적/법률적/사고체계의 변화는 그럴싸한 높이뛰기는 가능할 망정 진정한 멀리 뛰기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가령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의식이 제법 퍼졌지만 각 주체들이 ‘다르다’를 느끼는 기준의 차이는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다르다는 것은 무엇이 무엇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볼 때 ‘나는 저 사람과 다르네. 왜일까?’하고 느낀다면 비자애인이 장애인을 볼 때는 ‘저들은 (나랑) 다르네. 왜 저렇지.’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누가>에 해당하는 주어는 서로 다르다. 설령 이 간극이 폭력적인 혐오와 차별을 불러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정상’이나 ‘다수’, ‘자연스러움’ 등의 망령의 잣대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다양성의 인정은 이것도 있을 수 있고 저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이성애자의 시각에서 동성애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다양성은 장애인이 ‘그래, 세상에는 장애가 없는 사람도 있어.’라고 배려하고, 동성애자가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도 이해해주자.’고 할 때 코미디가 된다. 일반적으로 장애인 인권을 이야기할 때면 꼭 비자애인들의 배려와 사랑이 절실하다는 식으로 강조된다. 한 술 더 떠서 ‘장애우’라고 부르자는 주장도 나오는데, 과연 이것이 발전일까? <당대비평>15호에 실린 홍성희 씨의 <다름에 대하여>에 언급된 장애우에 대한 분석에 동감한다.
유치한 비유라고 할 지도 모르지만 노동자 인권이 자본가의 배려와 이해에서 구현되지 않듯이 장애인의 어려움이 비장애인의 존중이 필요하다는 시각으로 구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제의 전환이며, 인간이 인간을 제대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인간의 보행이 두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라는 편협한 정의가 아닌, 두 다리 혹은 지팡이나 휠체어 등을 이용하는 것이라는 여러 가지 보행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었다면 많은 건물에 처음부터 계단 외의 다른 것들이 개발되어 설치되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굳이 장애인 우대 정책이니 하는 호들갑을 떨 것 도 없다. 남성과 여성, 동성애와 이성애도 부연 설명할 것 없이 마찬가지다.
인류의 역사가 그렇게 발전해오지 못했음을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건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서구의 역사일 뿐이다. 북미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남성과 여성의 영혼을 함께 지닌 ‘two sprite person' <<버디>> 16호, <아프리카, 뉴기니아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동성애 전통>
을 인정한다. 또한 인도의 hijra, 타이티 섬의 mahu, 오만의 xanith 등 성별에 있어 보다 열린 <전제>들을 찾아볼 수도 있다. 우리는 적어도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우리의 의식을 조종하는 모든 ‘전제조건’에 대해 의심을 품는 시도를 해야 한다. 특히 그 일에는 이성애자들의 자각(타자화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글은 그런 이성애자들을 염두에 쓴 글임을 다시 밝혀둔다. 이런 시도가 서구에서 정형화된 이성애와 동성애 개념과 단절을 부르는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성찰없음이라고 해도, 그런 오류를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나는 동성애자가 <탈특권화된 혹은 퇴출화된 하위주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당대비평>>이 특집호 <<‘탈영자들’의 기념비>>에서 시도한 이러한 범주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미 그런 범주화자체가 이성애중심주의적인 발상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느꼈다. 그리고 가야트리 스피박이 “퇴출화된 하위 주체는 단순히 억압되어, 자신의 떡을 찾아먹지 못하는, ‘타자’ 집단을 위한 계급적인 단어가 아니다.”며 수박 겉핥기 식의 ‘퇴출화된 하위 주체에 대한 지식인의 대언’의 이용을 경고했던 사실도 떠올렸다.
궁서체 부분은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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