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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의 산문

여자, 정혜

by eunic 2005. 3. 21.

종로영화제 개막작인 "여자, 정혜"를 봤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많은 사람들은 혼란에 휩싸인다.
어머니가 현재 받고있는 병마의 고통보다도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두려움에 말이다.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폭행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다.
(이 상처로 인해 남들과 친해지지도 않는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말벗은 어머니다.)
유일한 안식처인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그녀,매일밤 홈쇼핑 방송을 틀어놓은채 잠이 든다.
아침마다 깨워주는 시끄러운 자명종도 어머니의 존재를 대신할 수 없다.
엄마와 단둘이 살다가 집에 혼자남겨진 그녀, 누군가의 존재가 너무 그립다.
그러다 우연히 아파트 풀숲에서 발견한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온다. 이 여자, 집에 있는 고양이 때문에 일찍 들어가봐야 한다고 할 정도로 누군가를 그리워 하고 있다.

무척 고독하기도 한 그녀.... 고독한 이유가 있다.
많은 부분에서 다른 사람과 생각하는게 다르다.

예를 들면 그녀, 새 신발을 사러 간 구두매장에서 사원이 자꾸만 팔과 발을 만지는 손길이 불쾌해 "여자구두 파는 곳에 남자사원은 좀 그렇네요"라며 가게를 나오기도 한다.
치킨집에서친구와 주먹다짐을 벌인 남자와 여관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그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나오는 정말 특이한 여자다.
옆사람이 피우는담배냄새가 좋고, 정기적으로 빠른등기를 부치러 오는 남자에게 불쑥 저녁식사 초대를 하는 정말 이상한 여자다.

아버지가 한 성폭행의 악몽은 그녀에게는 정말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다.
신혼 첫날밤 그녀와 섹스를 한 남편은 그녀에게 남자와 처음 잤을때 어땠냐고 묻는다.
그녀 "그걸 꼭 말해야 하냐"며 답을 피했다.
남자, "이제 남도 아닌데 말해달라"고 집요하게 묻는다.
그녀 할 수 없이 "그냥 아팠어"라고 말했지만 마음이 불편해 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한마디 말도 없이 그녀는 호텔방을 빠져나왔고, 그것이 결혼생활의 끝이었다.

어머니의 존재가 누구보다도 큰 그녀에게 어머니가 없는 세상은 너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죽을 용기도없었을 것이다.

오히려마음 한 구석에는혼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없다는고통을 이겨내고자 고양이를 길러 상실감을 채워보기도 하고,누군가를 만날 용기를 조심스레 내어보는 그녀.
영화를 보고 있으려니 나와 비슷한 구석도 없건만 그녀의 마음이 전염돼 우울해졌다.


<키노>에서 가져온 <여자, 정혜>를 만든 이윤기 감독의 해설을 보자면,

열쪽 짜리 단편소설 ‘정혜’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감독은 “감정 표현이 극도로 부족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영화를 설명한다.
또 <여자, 정혜>의 내러티브 상황을 “정혜? 친구 중에 생각해봐?”라는 친구들 간의 대화. 분명 존재하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은, 또는 “내 옆에 있으면 싫을 것 같은” 사람에 대한 것으로 예를 들며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 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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