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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조국 교수의 ‘외모’와 진보의 가치

by eunic 2010. 12. 15.

조국 교수의 ‘외모’와 진보의 가치

BY : 조광희 | 2010.12.09

'법무법인 원'의 변호사입니다. 비평가들은 좋아했으나, 관객들은 좋아하지 않은 영화들을 제작했고, 지금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일을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술을 마십니다. 휴일에는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한강에서 자전거를 탑니다. '모모'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키웁니다.

경향신문에서 조국 교수의 인터뷰를 보았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대학선배의 인터뷰이기에 유심히 읽었다. 그에 대한 인터뷰의 상당수가 그의 출중한 외모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데, 이 인터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미 나온 이야기 외에 새로운 정보의 제공이 필요했기 때문인지 소설가 공지영씨가 트위터에서 ‘잘생긴 남자에게 떨어야 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올린 글을 비롯하여 몇 가지 정보가 추가되었다. 나는 그 인터뷰를 보면서 외모는 그가 가진 매력의 일부에 불과한데, 진보적 언론조차 그 부분을 지나치게 조명하는 것은 어색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외모에 대해, 특히 이성의 외모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익숙한 현상이지만,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고운 피부, 초롱한 눈빛, 건강한 신체는 좋은 유전자의 표현이고, 좋은 유전자를 가진 이성을 부지불식 간에 선호하는 것은 진화론의 관점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그런데 뇌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눈, 코, 입 등의 기관이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배열되었는지가 다른 인간에게 그토록 강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취향의 차이는 있지만, 매우 많은 사람들의 외모에 대한 선호도가 일치한다는 것도 깊이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진화론은 물론 정신분석학, 인류학, 미학 등이 총 동원되어야 한다.

그 매커니즘을 정밀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여기에 ‘어떤 사람의 외모가 다른 사람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진다’라는 현상이 있다. 그것을 두고 외모란 쓸모없는 것이고, 내면이 훨씬 중요하다고 아무리 설득해봐야 공자님 말씀일 뿐이고, 많은 사람들의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게다가 개개인이 그러한 성향을 가지는 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그런 선호를 가졌다 하여도 그것만으로는 타인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로 인해 결혼이나 사업 파트너의 결정 등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그르치면 스스로 그 재앙을 감수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외모의 경쟁력’이라는 현상이 사회적 차원에서는 또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 또는 ‘나라를 기울어지게 할 만큼의 미인’이라는 말에서 보다시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모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는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회적 의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시대에 더 증폭되었다. 그리고 각자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상품처럼 제시할 것을 강요받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민주주의가 미디어에 의하여 매개되는 미디어민주주의 시대에, 외모의 사회적 의미는 한층 복잡하다. ‘외모’는 개인적 특질을 넘어 그 또는 그녀가 갖추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자본 또는 정치적 재능의 한 형태가 된 것이다. ‘외모’는 자기가 직접 대면하는 사람에 대하여 남보다 큰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자기의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에게서 재화를 획득하거나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수단이다. 번창하는 대중문화산업의 표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은밀한 성적 향유와 욕망의 경제학은 우리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며, 무르익은 민주주의의 외피 너머에서 작동하는 교활한 정치공학과 사이비 정치는 우리 사회의 실제적인 모습이다. 아무리 비이성적이라고 폄하한들 그것이 실제로 작동하는 원리라면,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 성공을 위해서든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든 우리의 셈법에서 제거할 수 없는 얼룩인 것이다.

한나라당의 유력 정치인들의 상당수가 지성과 통찰력 그리고 리더싶과 같은 본래적인 정치적 재능이 아니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감각기관의 형태와 배열을 지녔다’라는 사실, 즉 ‘외모’라는 기이한 정치적 자본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한나라당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보수’란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힘이라면 성찰없이 무조건적으로 승인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의 경우에는 다르다. 진보는 ‘존재하는 현상’의 정당성을 성찰하면서 ‘그래야만 하는 당위’를 향하여 나아가자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모가 현실에서 발휘하는 힘’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은 진보의 가치에 배치된다.

나도 외모의 가치를 이 세계에서 완전히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복지를 증진시켜 준다. 꽃미남의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언니’들이 이 더러운 세상에서 위로받는가. 그러나, 우리를 혼미하게 하지만 도무지 그 정체를 규명하기는 어려운 ‘외모경쟁력’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엇이나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요술램프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정당한 기회조차 박탈하는 핸디캡이 된다면, 우리의 고민은 응당 깊어져야 한다. 나아가서 본래 불안정한 민주주의를 ‘외모경쟁력’이라는 현상이 더욱 혼미하게 하고 있다면 그 문제는 어떻게든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빠스칼의 말마따나, 심각한 풍랑을 헤치고 나아가야 할 배의 선장을 지위로 뽑을 수도 없지만, 미모로 뽑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지리멸렬한 개혁진보 세력이 답답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하여 약간의 농담과 약간의 진담을 섞어 조국 교수의 수려한 외모에서 다소간의 희망이라도 발견하려 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보수세력에 지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뼈아픈 방법이어야 하지, 그것으로 서로 승부를 해보자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진보의 자가당착일 뿐이다.

나는 십 년에 한 번쯤 ‘잘 생겼다’ 는 말을 들으면, 겉으로는 ‘에이..’하면서도 맘 속으로는 좋아서 정신줄을 놓는다. 내가 아는 예전의 조국 교수는 사석에서 ‘미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런 비본질적인 것을 거론한다고 다소 히스테리컬하다고 할 정도로 불편해 했다. 그것이 그가 본래 타고난 단아한 품성이다. 지금의 그는 짜증스런 현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그의 미모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고 싶어하는 진보적인 매체의 의도와 결합되면 자칫 염증을 일으킬 수 있다. 사람들은 쉽게 사랑하고 쉽게 지루해 한다.

조국 교수는 내가 후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단순히 미남자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그 아름다움, 그 명석함, 그 친화력, 그 사회적 상징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에 눈감지 않고 그런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대단히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진보의 아름다운 무기로 활용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한낱 정치적 상품으로 소비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아깝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자유는, 평등은, 민주주의는, 평화는, 연대는, 정의는, 그리고 이 모든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진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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