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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정신분석학적으로 본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1]

by eunic 2005. 3. 14.
페미니즘 `퍼니 게임`

그녀는 가끔 레슨을 하며 창 밖의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엉클어진 머리칼에 흰 새치가 듬성듬성 나 있는 피아노 선생.

그녀는 수녀나 남자의 몸을 받아본 적이 없는 여자들이 그러하듯 몸은 날씬했지만 왠지 기름기 없이 바싹 말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피아노 레슨을 할 때면 내 옆에 있기보다 팔짱을 끼고 창가에 서 있던 그녀는 내가 음표나 박자를 틀릴 때면 한숨을 쉬고 미간을 찌푸렸는데 그건 ‘넌 안 돼’란 말없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러다 화가 더 나면 그녀는 잘못된 건반에 착지한 내 손등을 사정없이 찰싹찰싹 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내 몸을 세게 꼬집는 느낌. 톤이 높은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끼적끼적 먹던 입들. 그녀가 피아노를 잘 쳤던가 기억이 안 난다.

<엘리제를 위하여>나 체르니를 띵동거릴 때는 모차르트나 슈베르트를 연주하던 그녀가 꽤나 위대해 보였지만, 10여년 집 밖의 길거리에다 숱한 소음을 쏟아붓고 나서 나 역시 바흐니 베토벤이니 하는 사람의 악보를 상대하게 되자, 그녀는 다시 푸석거리는 늙은 여자로 돌아가 있었다.

프로이트처럼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원작 이름인 <피아노 치는 여자>가 의미하듯, 주인공 에리카는 피아노와 함께 있는 동안은 피아노를 치는 여자, 즉 피아노를 치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

피아노와 함께 있을 때, 그녀는 고아하고 아름다운 슈베르트와 슈만의 전문가가 된다. 문제는 그뒤다.

에리카가 다시 삶의 영역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새로 산 드레스를 어머니에게 빼앗기고 모녀의 옥신각신은 거의 끝간 데 없는 머리채 싸움으로 번지고 만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그렇게 천박하고 유행이 지나면 금방 못 쓰게 될 그것을 또 사왔냐며 에리카에게 대들고, 에리카는 그 드레스라면 유행도 안 타고 족히 몇년은 입을 수 있다고 맞선다.

번뜩이며 지나가는 시들어버리는 유행 혹은 여성의 육체를 감싸는 겉껍질로서의 옷은 어쩌면 에리카가 이제는 내놓아야 하는 청춘 혹은 욕망을 의미하는 기표로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이 짧은 대목은 프로이트가 보았다면 매우 좋아했을 만한 에리카의 가족적인 문제를 압축한 채 영화의 시작을 이끌어나간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아주 전형적인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어머니’로 에리카의 초자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사실 이런 유의 어머니는 <싸이코>를 비롯해 이미 할리우드영화에 무수히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이기는 하다.

아마도 여성의 육체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을 농축한 것 같은 에리카의 어머니는 에리카의 연애가 집안을 매춘굴로 만든다는 식으로 주장함으로써 그녀의 삶을 갉아먹는다. 에리카의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죽어갈 동안 에리카에게 화장을 금하고 남자를 금하는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에리카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장래를 위해 모든 가사일에서 그녀를 면제시켜준다.

그러나 기실 커다란 부부침대에서 나란히 잠을 자는 두 모녀에게 있어서 에리카는 일종의 남근(팔루스), 상징적 남성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극도의 억압 속에서 초자아의 감시 속에서 에리카의 모든 욕망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그녀의 감정은 영도 이하의 냉동고에 고이 저장되어 있는 상태인데, 얼어붙어 있는 자궁, 에리카의 몸 전체가 음악이라는 상하기 쉬운 예술을 위해 사방이 막힌 냉장고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그녀 안에 있는 모든 여성성 자체를 동결시켜버린다.

그러므로 그녀가 목욕탕에서 스스로의 질에 상처를 내는 행동이야말로 스스로의 얼어붙은 여성성에 칼자국을 내서라도 감행하는 ‘강제적인 생리’처럼 보이지 않는가.

반면 에리카는 자신의 욕망이 치솟아 오를 때마다 요의를 느낀다. 아마도 그것은 원작의 표현을 빌리자면 ‘음악과는 거리가 먼 느낌, 오직 몸 속에 꽉 차 있는 걸 뜨겁게 오래도록 쏟아내고자’ 하는 방뇨로, 에리카에게는 일종의 사정과도 같은 행동일 것이다.

프로이트를 만족시키는 콩가루 가족 관계의 소극, 이미 자체적으로 무수한 계보를 지니고 있는 스릴러의 관문을 지나, 그러나 <피아니스트>는 좀더 논쟁적인 섹슈얼리티의 정치학이란 변주를 시도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무엇보다도 에리카는 문학 혹은 소위 말하는 예술영화 역사상 전격적으로 등장한 ‘보는 여자’로 군림한다.

보이는 여자 대신 보는 여자가 된 그녀, 그녀가 시선을 가진 권력자라는 사실은 피아노를 치는 학생들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시선, 그녀의 시선 자체가 카메라의 시선과 포개지는 영역에서 나온다.

그러나 한 걸음만 메타적으로 더 나아가면, <피아니스트>는 포르노를 보는 여자의 이야기인 동시에 ‘포르노를 보는 여자를 보아야만 하는 관객’의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청중은 관음(觀音)하고 관객은 관음(觀淫)한다.

포르노숍에서의 에리카, 자신의 머리채와 몸과 손 모두를 머플러와 장갑으로 감싼 에리카는 자신의 여성적 판타지를 감추고 사는 한 안전한 방식으로 관음할 수 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사이코가 전하고자 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악몽의 교훈이 아닌 것이다.

에리카의 침묵과 자해가 너무나 생경하게 느껴질 때 그리곤 ‘저 망할 여자는 도대체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갖게 하는 지점에서 <피아니스트>는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질문과 도발이라는 연쇄 파문을 던진다.

에리카와 클레메의 화장실에서의 첫 키스와 오럴섹스로 이어지는 정사는 에리카가 봐왔던 포르노의 재현에 다름 아니다.

배설과 배출이 혼동되는 이 무채색의 공간은 늙은 여자와 젊은 남자 사이의 사랑의 감정으로 이어질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관성이나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에로라는 외설을 완벽하게 거부한다.

더구나 이때의 에리카와 클레메의 관계는 철저히 에리카가 주도하는 쾌락의 도구로 남성의 성기를 화면에 위치시킨다.

에리카는 클레메에게 “니 꺼를 보지 말고 내 얼굴을 보라”고 요구한다. 그녀는 삽입하지 않고도 쾌락을 느끼고, 클레메는 이에 마지못해 응하면서도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것은 기실 포르노에 내재한 기존의 장르영화에 대한 섹슈얼리티의 전복성을 웅변적으로 입증하는 동시에, 관객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에 기댄 섹스와 그냥 섹스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도박을 벌인다.

오 에리카와 클레메, 이들이 <감각의 제국>의 사다와 아베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으련만. 클레메는 아베가 아니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응시는 시각의 영역에 침투한 주이상스이고, 해골을 남근처럼 보이게 만든다(한마디로 우리 눈에 콩꺼풀이 씌우면 거지도 왕자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저널 글이지만 여기서부터는 좀 어려운 소리를 하겠으니 양해해 주시라).

늙은 여자, 볼품없는 에리카를 사랑하는 클레메는 말하자면 판타지의 상연이라는 마술에 빠져 있다.

그에게 그녀는, 피아노 치는 여자로서의 에리카는, 일종의 남근으로 대타자로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클레메가 에리카에게서 자신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이상을 투사하는 한, 에리카는 클레메에게 일종의 이상적 타자, 대타자 (큰 타자)로 머무르게 된다.

넘쳐나는 주이상스. 심지어 낡은 엘리베이터를 탄 에리카를 따라잡아 가는 클레메의 대타자에 대한 향연을 보라.

이 판타지의 향연 아래에서는 설사 에리카가 클레메에게 사디즘적인 행동을 원하더라도 클레메는 마지못해 마조히즘적인 위치에 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