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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어떤 기도

by eunic 2009. 10. 27.

교회에 오랜만에 나갔다.

설교 첫 머리에 누군가의 기도를 목사님이 읽어주셨다.

신앙심이 좀처럼 생기진 않지만

교회는 꾸준히 나가는 나같은 사람이

했을 법한 기도를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랬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 기도는

내가 하는 이기적이고 오만방자한 기도가 아니었다.

나 자신의 무력함,

이 세상에 대한 연민을 담은

깊은 울림을 주는 기도였다.

복된 하루다.

예수사건 (3) 삶, 뜻, 믿음

한문덕 목사


욥기 2, 1 - 10 ; 루가복음 10, 25 - 37

1983년 어느 날 연세대 신과대학에서 드려진 신학생들의 채플 시간에 한 신학생이 나와서 기도를 합니다. 이 신학생의 기도는 위엄 있게 앉아계신 교수님들과 믿음 좋고(?) 순진한 학생들을 경악시켰고, 이런 기도가 드려지고 난 후, 연세대 신과대 예배에서는 3학년 학생 가운데서 이름 순서대로 기도를 맡는 일이 사라지고, 대신에 교수들이 보기에 얌전하다고 생각된 학생들만이 선발되어 기도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기도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힘들어서 못해 먹겠습니다.

우리 보고 회개하라고요?

우리가 죄인이라고요?

정말 울며 불며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이요, 죄인 중의 죄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 보고 하라 말고 당신이 한번 이 땅에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그래요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해요. 그런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독재자의 종말이 백주 대낮에 수천 명을 학살하는 광주에서 당신은 무엇을 했냐고요?

학교를 보세요. 저 악의 무리들을 뚫고 당신을 믿지 않는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나올 때 당신이 선택했다는 우리도 아무 것 못하지만

당신은 또 무엇을 했는가요. 우리를 시키지 말고 당신이 직접 해보라니까요.

정말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의 실패작인 우리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당신, 바로 당신 야훼 하느님입니다.

~ 이하 생략 ~” <살림 제47호 1992. 10. 80-81.>


1980년대의 한국 상황을 몸으로 겪은 이들이라면

어떤 삶의 맥락에서 이런 기도가 나왔는지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만

같은 시대를 살았다 하더라도 이런 기도는 상상할 수 없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망나니 같이 돼먹지 못한 자식이

아버지께 두 눈을 치켜뜨고 대드는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절절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겪은 고통과 처절한 몸부림,

그리고 신을 향한 애절함이 묻어 있습니다.

중략...

자신이 원수로 여겼던 이가 자신의 이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은 것은 상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래서 자신을 열어 남에게 줄 때 비로소 이웃 사랑의 길이 열리고 그 이웃 사랑의 연습을 통해 하느님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을 무한히 열어서 내가 사라지고 우주 전체를 감싸 안으시는 하느님 품에 안길 때 참 행복과 참된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을 알려 주시려고 하느님이 먼저 자신을 비워 세상을 창조하시고 낮은 곳으로 오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욥기의 오늘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물음입니다. 욥은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습니다(욥기 1:1). 그의 믿음은 누구하나 험 잡을 것이 없는 거의 완전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를 넘어뜨리게 하기 위해 삼는 구실의 첫 번째는 그가 부자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탄은 하느님께 따집니다. 욥의 믿음은 욥이 가진 소유 때문에 가능하다고. 그 소유가 사라지면 욥의 믿음도 사라질 것이라고 하느님께 당당하게 말합니다. 신약성서는(마태 6:24) 하느님과 재물 중 하느님을 택하라고 권하는 반면, 사탄은 그런 갈림길에서 사람은 반드시 재물을 택할 것이라 합니다. 재물의 축복이 없다면 사람은 하느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사탄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사정없이 욥의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그러나 욥은 믿음을 지킵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그러자 이번에는 욥의 존재와 인격을 무너뜨립니다. 욥의 아내마저 떠나게 만들고 하느님께 저주받은 표식이었던 피부병을 내림으로써 욥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소유의 상실, 관계의 파탄, 인격을 손상시켜 그의 명예를 훼손시켜도 욥은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욥기는 42장이나 되는 긴 글이지만 이미 1~2장에 모든 결론이 나옵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믿음!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은 하느님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욥의 이러한 고백은 역으로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하느님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이 가진 소유 때문에 유지되는 것은 아닌지요? 욥처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그 때에도 여러분은 하느님은 살아 계시다고, 그 분 자신만으로 나에게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요? 여러분이 맺고 있는 향린의 관계들이 모두 끊어져도 자신의 신앙을 지켜낼 수 있는지요? 여러분이 가꾸고 일궈온 자신의 인격과 삶 때문에 얻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교회를 나오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에게 있는 이러한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에도 여전히 하느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은 하느님 그 자체에 의미가 있기에 하느님 아닌 것은 모두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 성립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자기의 신앙에 대한 성찰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제대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경험과 무너지는 사건 없이 진지하게 자신의 신앙을 짚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일부러 고통을 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잘살라고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것이며, 하느님의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점에서 변치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원래 인간의 불행과 고난은 하느님에게도 뜻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뜻밖의 일을 하느님은 뜻 안의 일로 만드십니다. 여기에 고난의 신비가 있고, 자신을 완전히 내어 놓을 때 채워지는 하느님의 은총의 신비가 녹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이전 생각이 완전히 무너진 이는 이제 사마리아인을 새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모든 문제가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원인 모를 고통의 문제에 직면하여 고통 속에서도 파멸하지 않는 법을 터득하게 되고, 그 가운데 참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우리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살펴봅시다. 혹시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욕망과 헛된 세상 욕심에 물들어 있지는 않은지, 모든 문제가 자신에게 있는데 도리어 타자를 욕하고 하느님 탓만 한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성찰합시다. 마지막으로 교황 집무실에 걸려 있는 한편의 시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시가 여러분이 자신의 삶과 믿음을 되돌아보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향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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