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나룻배에 윤리 싣는다면…
정혜윤의 새벽 3시 책읽기 / <시비에스> 피디
한낮의 어둠, 아서 쾨슬러 지음·문광훈 옮김/후마니타스·1만2000원
지난번에 추천한 책 중 올해가 가기 전에 한번 더 읽고 싶은 책을 꼽으라면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을 일순위로 꼽을 것 같다. 독재국가의 혁명 일세대인 루바쇼프가 어느날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는 걸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런데 그 심문의 와중에 역사와 정치, 목적과 수단, 한 인간과 인류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나온다.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짓지 않으려 애쓴 죄 때문에 반역죄로 죽게 된 루바쇼프를 마지막 순간에 사로잡은 주제는 ‘대양적 감정’과 ‘경제적 숙명성’인데 이 주제는 나 역시 끝없이 사로잡혀 왔다고도 할 수 있다.
경제적 숙명성은 이런 것이다. 당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선과 악을 분간하는 능력을 부정하는 동시에 자발적 자기 희생을 강요한다. 이런 상태에서 개인은 시계 장치 속 톱니바퀴일 뿐이다. 루바쇼프는 40년 동안 이런 경제적 숙명성에 대항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동시에 대양적 감정에도 저항하며 살아왔다.
대양적 감정은 이런 것이다. 한 인간의 존재는 바닷가의 소금 한 알갱이처럼 녹아버린다. 그러나 동시에 무한한 존재는 소금 한 알갱이에 모두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알갱이는 모든 사상과 감정 속에, 고통과 기쁨 속에서 자기의 한 조각을 또 본다.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세상은 인간의 무한을 인정하지 않는다. 루바쇼프는 한 인간이 ‘너는 무엇을 해선 안 된다’ 혹은 ‘너는 무엇을 할 수 없다’ 같은 끝없는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형 집행인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루바쇼프가 꿈꾼 세상은 이런 것이다. 오로지 순수한 수단만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세상, 한 인간이란 단지 일백만명을 일백만명으로 나눈 결과가 아닌 세상. 일백만 개인이 합쳐져 새로운 실체를 만들고 저마다 일백만 배로 확대된 대양적 감정으로 자신의 개인성을 펼쳐나가는 세상. 저마다 자신의 나룻배에 윤리라는 바닥짐을 갖고 항해하는 세상. 그런데 이 일백만 개인이 합쳐져 새로운 실체를 만들어나가며 대양적 감정을 확대시킨다는 것 때문에 나는 토마스 만 <마의 산>의 한 부분을 꼭 소개하고 싶다.
“자신의 영혼으로만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이긴 하지만 다 함께 익명으로 꿈을 꾸기도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어.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영혼의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며 그 영혼은 자신이 몰래 늘 꿈꾸어 오던 대상에 관해 우리를 통해 각기 나름대로 꿈꾸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상태는 토마스 만 식으로 표현하자면 미덥지 못한 개별 존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는 신비스러운 공동체 사이 어딘가에 있다. 한 해를 보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일백만 개인이 합쳐져 어떻게 새로운 실체가 만들어질까? 어떻게 신비로운 공동체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현실적인 우리 말고, 우리 안에 있는 잠재적인 것으로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말을 나는 희망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낮의 어둠>에 나오는 것처럼 유일한 소원이 그저 조용히 사라져 버리는 것인 순간에조차 이야기하고 납득시키고 논쟁하려 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마치 맨 끝의 진리에 봉사하려는 듯.
기사등록 : 2010-12-24 오후 08: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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