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창/ 원통 폐분교 수도원 가족들
- 우린 매일 기적을 만나요
매체명 한겨레
작성일 2005-01-06
산으로 둘러쳐진 인제군 원통 산간지역의 하늘은 솥뚜껑처럼 동그랗다. 그 하늘을 오가는 해는 평지보다 한두시간 늦게 떴다가 한두시간 더 빨리 진다. 그래서 원통 산골에 배치받은 신병들은 이런 신세 한탄을 하곤 했다. ‘인제 가?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그 원통의 산골마을 폐분교(월학1리 옛 효자분교)를 빌려 수도원과 재가복지센터를 꾸민 게 2000년이었다. 1995년 폐쇄됐으니 관사나 교실은 흉가처럼 변해 있었다. 교실 세칸과 교무실을 경당, 사무실, 도서실, 피정의집으로 개조했다. 관사 세채는 숙소로 개조했다. 그리고 강원도 교육청에 1년치 임대료 800만원을 내니 근 1년 동안 모금한 후원금이 동났다. 그 상태에서 지금까지 외부에 손을 벌리지 않고 지금까지 5년을 버텼다면 그것만으로도 용하다는 소리를 들을 법하다. 그러나 웬걸, 글라렛수도회 원통 수도원은 이제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인제에서 유명해졌다.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러나 수도원 형제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겐 결코 놀랍지 않다. 지금까지 그런 경험을 수도 없이 해온 탓이다.
폐교를 수리한 뒤 동네 어른들에게 물었더니, 학교 안의 망가진 샤워장을 고쳐 마을 사람이 함께 쓸 수 있게 해달라는 의견이 많았다.
자재비만 600만원이 드는 공사였다. 김병진(가브리엘) 원장 신부는 덥석 그러마고 답했다.
지역에 필요한 일을 하기로 작정하고 온 터인데 주저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돈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윳돈 600만원이 있는데, 꼭 필요한 곳에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신기했다.
이 형제의 도움으로 월학1리 주민들은 현대식 샤워시설을 갖게 됐다.
원통에서 우리 모르면 간첩
수도회의 재가복지센터가 하는 가장 큰 일은 홀로 사는 노인들을 돌보는 일이다. 인제는 넓이에서 전국 두번째이고,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곳 산간계곡 여기저기엔 160세대의 홀몸노인과 결손가정 아이들이 살고 있다. 수도원 형제들과 봉사자들은 이 홀몸노인 가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말벗이 되어주거나 도시락과 밑반찬을 제공한다. 폭우에 물이 불면 몸에 동아줄을 묶고 개울을 건너고 눈으로 차가 막히면 눈길을 뚫고 찾아간다. 우체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혼자 사는 노인들의 외로움을 달래고 필요한 것들을 챙기는 것이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직접 방문을 원칙으로 삼는다. 보통 하루에 150㎞를 차로 달리고 발로 걷는다.
이 일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은 자원봉사자들이다. 가정 방문 때 차량봉사 및 말벗 봉사자로 일하는 등록자만 25명이다. 정기적으로 방문해 건강을 점검하고 아픈 노인을 치료하는 간호사도 7명이다. 노인들과 결손가정에 보낼 각종 밑반찬을 만드는 일은 15명의 주방봉사자들이 번갈아 맡는다. 천도리 충성마트나, 경기도 의정부의 부대찌개집 등에서 일부 밑반찬을 제공한다. 인근의 을지부대에서는 의료지원은 물론 수도원의 화목 마련, 경로잔치 지원 등을 해준다. 서울의 한 치과병원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진료봉사를 한다. 읍내 한 사진관의 도움으로 홀몸노인 160여 명의 영정사진도 마련했다.
김장철엔 이런 작은 기적의 손들이 한데 모인다. 올해는 배추김치 1800포기를 했다. 무는 한 트럭 분량이다. 모두 고랭지 채소 농가에서 제공했다. 고춧가루 값만 200만~300만원이 넘을 양념은 용대리 백담순두부집에서 매년 제공한다. 배추와 무를 씻고 절이고 양념하는 일은 5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맡았다. 을지부대 군인가족과 지역주민들이다. 담근 김치는 해안면 봉사자의 저온창고에 보관돼 7월까지 싱싱함을 유지한다. 그리고 다른 봉사단체에서 제공한 김치가 떨어져가는 3월부터 7월까지 홀몸노인들에게 전달된다.
작은 기적을 일구는 이들은 이 밖에도 많다.
수도원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7~8명의 노인들에게 관광을 겸한 목욕 봉사를 한다. 봉사자가 각 가정을 방문해 어른들을 한자리에 모시면 낮 12시쯤 된다. 봉사자는 이들을 약정된 식당으로 모신다. 용대리 어른들은 백담순두부집, 원통 인근의 어른들은 새천년식당, 천도리 어른들은 효동각, 해안면 어른들은 대원식당 등으로 모신다. 이들 식당은 어르신 점심 봉사뿐 아니라 경로잔치 때는 각자 잡채 등 각종 요리 한 가지씩을 지원한다. 스키대여점도 운영하는 백담순두부집에선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스키 봉사도 한다. 부부는 모두 후천성 장애를 갖고 있다. 푸짐하게 점심을 끝낸 일행은 한계령을 넘어 오색온천으로 간다. 온천에선 1인당 1천원씩만 받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정한 가격이다.
애태우면…따르릉 전화가 왔어요
설날은 가장 기쁜 날이다. 조상까지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다. 그러나 홀몸노인과 결손가정 아이들에게는 가장 서러운 날이다. 수도회 형제들도 마음이 무겁다. 지난해 설날, 이들은 노인들이 떡국이라도 끓여먹으며 쓸쓸함을 달래도록 가래떡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그러자면 쌀 한 가마 분량의 가래떡이 필요했다. 그러나 수도원엔 땡전 한푼 없었다. 애만 태우고 있을 때 양평의 한 신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자의 집에 가서 보니 한 가마 분량의 떡이 있었다. 다시 설날이 다가온다. 수도회 형제들은 여전히 빈털터리다. 그러나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준비해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설을 앞두고 만나게 되면 뛸 듯이 기뻐할 소양호 부평리 나환자 부부, 신풍리 장상수 할아버지, 진동계곡의 장은봉 할아버지, 방동 약수터 김현태 할아버지, 현리의 손금옥 할머니와 정신장애아 은범이 은하 가족, 천도리의 상철이와 상권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행복에 젖는다.
원통/ 글·사진 곽병찬 기자
■ 김병진 원장신부 / “자유롭게 사는 노인들이 건강해요”
강원도 인제에는 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양로원이 있다. 정원 150명 규모의 현대식 시설로, 산골 구석구석 흩어져 사는 홀몸노인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지었다. 그러나 이 양로원에서 사는 노인은 정원의 20% 정도밖에 안 된다. 홀몸노인들은 양로원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들은 움직일 힘만 있으면 텃밭을 가꾸며 자유롭게 살려고 해요. 끼니를 거르더라도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지, 종 치면 식당으로 몰려가서 주는 밥 얻어먹으며 갇혀 사는 걸 원치 않아요. 게다가 보호 대상자들이 받는 20만~30만원의 기초생활 보장비는 노인들에게 매우 큰 돈입니다. 일단 양로원에 들어가면 이 돈을 양로원에서 수령합니다. 비록 떠돌이 약장사에게 바치기 일쑤지만, 노인들은 이 돈을 포기할 수 없어요.”
자유롭게 살려는 노인들의 이런 성향을 고려해 나온 것이 재가복지다. 수용당한 노인보다 자유롭게 사는 노인들이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산다고 한다. 노인들에게 가장 큰 걱정은 치매나 중풍 등에 걸리는 일이다. 양로원의 노인들중에는 이런 환자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까지 혼자 사는 분들 가운데서 이런 환자는 거의 보지 못했다고 김병진 신부는 말했다. ‘아마 삶에 대한 의지력 때문인 것 같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굳이 수용시설을 짓는다면 양로원이 아니라 진료 및 치료 기능까지 갖춘 요양시설로 바꿔야 한다고 김 신부는 말한다.
물론, 홀몸노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그래서 김 신부는 최선의 대안으로 노인마을 조성을 추천한다. 흩어져 있는 홀몸노인들이 한마을을 이뤄 살 수 있도록 자치단체에서 집과 밭과 공동시설을 제공하는 경우다.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하면서 복지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요즘 지자체가 신경쓰는 문학인 혹은 예술인 마을처럼 하면 될 일이다.
김 신부는 서울대 산업공학과와 카이스트 석사과정을 졸업한 뒤 성직자의 길로 돌아섰다. 대학 시절부터 신림동의 미감아(나환자의 자녀로 병에 감염되지 않은 이) 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것이 인연이 됐다. 1992년 사제품을 받고 인천 가톨릭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본당신부로 잠깐 근무하다가 2000년 원통수도원을 개척했다. 그는 요즘 반쯤은 서울에서 근무한다. 서울 성북동의 글라렛 선교센터 센터장 구실이 맡겨져서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지만 내심 이 시간도 아깝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만나서 노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남들은 우리가 그분들을 위해 고생하는 줄 아는데, 실은 우리가 그분들에게서 받는 게 더 많아요.”
곽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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