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삐딱이>감독의 학대에 `뻑간` 관객
(::‘올드보이’의 파시즘적 쾌감::)
스타일 대중성 연출력이라는 측면에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의 탁월한 성취는 부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는 새삼 성취를 논하지 말 것 ‘올드보이’의 마력에도 불구하고 ,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했던, 수상쩍고 미진한 부 분에 대한 이야기.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최근 ‘씨네21’에 기고한 글에서 “‘올드보이’는 스타일 만빵의 미학적 쾌감을 선사하는 동시에 진정 괴로운 심정을 안겨준다. 폭력과 근친상간을 소재로 삼거나 그것 을 미화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보여주는 권력과 욕망의 기제가 지극히 파시즘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황씨의 해석은 이렇다. “유지태는 근친상간이라는 자신의 죄를 소문의 첫 발설자인 최민식에게 전가하고, 최민식도 같은 죄를 모르고 짓게 함으로써 처단한다. 유지태는 최민식에게 “우리는 알고도 사랑했지만 너희도 그럴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내가 한 것은 사랑이지만 네가 한 것은 죄’라는 유지태의 태도는 자신에게 신적 권능을 부여하는, 실로 파시즘적인 것이다. 최민식의 대응 또한 파시스트적이다. 모르고 지은 죄값을 위해 스스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와 달리 최민식은 파시즘이 심어준 죄를 계속 자행하고자, 죄를 아는 자신의 기억을 지워버리려 한다.”
황씨의 분석은 대단히 흥미로운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파시즘적 쾌감은 황씨의 지적처럼 영화내부에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영화와 관객이 관계맺고 있는 영화 외부에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올드보이’는 감독이 관객을 장악하고, 관객은 ‘기꺼이 자기를 잊고 투항’하는데서 모든 영화적 쾌감이 발생하는 영화다. 감독의 영화는 엄청난 뇌관을 감추고 서서히 자극의 강도를 높이며 관객을 죄어간다. 과잉의 이미지와 스타일, 감정과 정서는 객석을 먹어치울 기세로 스크린밖으로 흘러넘친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근친상간’이라는 뇌관이 찬이든 반이든, 예상외로 사회적 파장이 적었다는 점이다. 제작사가 애초 우려했던 도덕주의적 논란도 별로 없었다. 금기파괴에 대한 우리사회의 심리적 저항수위가 낮아진 탓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미흡해 보인다.
복수담으로 포장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혹은 가족관계의 부정 같은 영화의 핵심적 주제에 정작 관객이 진지하게 주목하지 않는 것은, 이 영화가 관객에게 오직 몰입을 허락할 뿐 대화와 성찰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닫힌 텍스트, 파시즘적 텍스트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과 관객이 맺고 있는 관계는 군림하고 지배하는 자와 숭배하는 자이다. 모든 영화적 에너지는 오직 관객을 통제 하는 데 모아진다. 관객은, 관객을 탁월하게 장악하는 감독의 재능에 한껏 취해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영화적 쾌감에 ‘뻑간’ 뒤 극장에서 빠져나오지만, 순간 영화의 메시지는 증발해버린다.
관객에게 남는 것은 재능있는 감독에게 한없이 휘둘리고 난타당한 가학의 쾌감이다. 텍스트와 관객 위에 제왕처럼 군림하며 관객 을 학대하듯 쥐어짜는 영화는, 관객에게 말걸고, 관객으로 인해 완성될 여지를 남겨놓는 겸손하고 진정성을 가진 영화는 아니다.
‘올드보이’의 쾌감은 분명히 파시즘적인 것이다.
양성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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