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말 이곳 저곳에 대하여
<조은 산문집 중에서 >
성공한 모습을 말하기가 실패한 모습을 말하기보다 어려운 것이 있다. 사랑이 그렇다. 우리가 수없이 읽은 문학 작품도 완전한 사랑을 말하기보다 실패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에 대한 갈구를 유도하며, 머릿속에서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그것에 맞는 삶을 추구하며 살도록 조언한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심성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용감하게 단언하지 못한다. 또한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아들딸 낳고 잘 살았다'라는 해피 엔딩으로 완결되는 삶의 텍스트를 앞에 놓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태를 느낀다. 결국 완전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자손을 얻기 위한 생물학적 사랑이든, 인간의 가장 고상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흔히 말하는 정신적 교류가 가능한 사랑이든 모든 사랑이 아슬아슬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불행히 지금까지도 우리가 사랑의 완결된 모습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한 사랑의 상징(종교인들에게는 상징이 아니라 실체이다)인 신은 또 어떠한가. 신들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을 상대로 분노하고, 자신들의 존립 이유인 큰 사랑을 무너뜨리지 않는가. 오늘날까지도 인간 사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신전은 나약한 인간이 신을 향해 바치는 상형문자로 된 변함없는 사랑의 기도문 같다. 이곳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이룰수 있는 완전한 사랑의 사례를 찾을 수는 있을까?
문득 테레사 수녀가 떠오른다.
신들의 나라 인도. 카스트 제도에 얽혀 누더기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리마다 넘치는 곳. 적십자에서 파견한 의료단 앞에는 결핵 환자들과 나환자들이 긴 줄을 늘어뜨리고 있고, 그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미 한쪽 뿐인 나병 환자의 나머지 한쪽 팔이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그 팔이 땅에 닿을 겨를도 없이 거리의 굶주린 개가 그것을 낚아채 쏜살같이 달아나버린다. (도미니끄 라삐에르의 자전적 소설 {목마른 사람들}에서 차용)
기쁨의 도시라고 불리는 인도의 대도시 캘커타. 삶도 죽음도 아닌 경계에서 고통스럽게 연명하다가 결국은 눈앞의 죽음을 바라보게 된 사람의 이마에 얹히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손. 그 따뜻한 손 같은 존재가 마더 테레사였다. 애덕 선교회를 창설해 평생을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그의 삶이 사랑이 아닌 무엇으로 요약될 수 있을까.
테레사 수녀의 큰 사랑도 평범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으리라고 나는 감히 장담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자신의 전세계인 하느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바친 후 공손하게 모았던 두 손의 힘을 풀 때에도, 막 아침잠에서 깨어나 자는 동안 눌렸던 몸의 가벼운 통증을 느낄 때에도,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육신이 늘어뜨리는 어둡고 긴 그림자를 내려다볼 때에도,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것이 다름아닌 생생하게 살아있는 육신임을 새삼 깨달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존재 의미에서부터 시작되는 무한한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대한 사랑의 발원지이다.
테레사 수녀의 성스러운 삶을 떠올리자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단상은 모든 사랑은 자기자신을 '담보'로 한다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의 삶은 분명 완전한 사랑의 표본이 되기에 충분하지만, 완전한 사랑이 이렇듯 큰 희생의 대가로만 온다면 개인의 삶을 공동체 속으로 확장하지 못하고 애면글면하는 평범한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허전하고 암담할 것인가.
사람이 달라지는 데는 반드시, 고통이 동반된다. 그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평화로운 물처럼 흘러가지 않고 격랑을 몰고 오는 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 최소한 인간의 고통이 진정한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확신만 있다면 이 세상은 진화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과 사랑 사이에는 만만찮은 물살이 흐르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그 거친 흙탕물 속에서 타오르고 싶어하는 수많은 생명의 이미지를 간과하지 않는다.
바로 이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눈앞의 삶만을 제 몫으로 받아들여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급류에 휘감기면서도 사랑이라는 강 저편으로 올라서려고 발버둥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존재를 믿지도 않는다. 그러나 강의 이편에 있는 저편에 있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하고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분명 사랑이다.
사랑에는 지적다산성이 있다 지적 편력이 다채로웠던 로만 야콥슨의 시학을 조금만 변주하면, 많은 사랑의 말들이 시적 기능을 하며 우리의 의식과 일상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정체되어 있는 정신들을 움직여왔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 교류가 가능한 사제 간의 사랑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랑처럼, 또는 헬렌 켈러와 설리번의 사랑처럼.
그 때문인지 고대에는 사제 간의 동성애가 많았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정리한 대화편을 꼼꼼히 읽어보면 스승인 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반반이 느껴지지만, 좀더 생각해 보면 서로에 대한 존경(또는 존중)이 없으면 이들의 관계 역시 완전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때 존경은, 인격에 대한 존경이 지식에 대한 존경보다 우선한다고 나는 단언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출근길에 종종 한 쌍의 연인을 만난다. 그들이 처음 내 눈에 띈 것은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육체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대학교 1학년쯤 되었거나 성인의 언저리에 있어 보이는 그들은 한 번 눈에 띄자 끊임없이 내 시선을 잡아맸는데, 그들의 행동은 또래들과 많이 달라 보였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 내가 타고 있던 버스에 탔다. 그들은 몸을 맞대고 오랫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거나 상대의 몸을 어루만지다 자리에 앉으면 금세 곯아떨어지곤 했다. 그들의 행동은 절제되지 않았고, 함께 밤을 보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여학생은 눈이 갸름하고, 코가 오똑하고, 말이 거의 없는 예쁜 얼굴에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데 비해 남학생이 풍기는 이미지는 평범함이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여학생으로 인해 자신의 평범한 한계를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남학생은 여학생의 어깨도 주물러주고 얼굴도 어루만지면서 유독 여학생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한마디로 그는 대상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받을 가가운 앞날의 상처를 헤아리고 있었다.
대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결코 소통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단단한 매듭이다. 또한 사랑이 끝났을 때 자신의 성장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 과거의 공간만을 배회하거나 거칠었지만 힘이 느껴졌던 자신의 정신이 퇴보해가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랑의 대상에게 지나치게 집착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 중 하나가 자신의 사랑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명심하자. 자신의 사랑만큼은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 미래에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을.
사랑의 불완전함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인지 사랑에는 문득 문득, 또는 막연하게, 최악의 사태를 각오하는 심리가 내재해 있다. 사랑의 감정으로 숨이 막힐 정도의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 "네가 나를 떠나면 난 죽어버릴거야"하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랑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는 사랑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심리에서도 느껴진다. 사랑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하는 심리를 뒤집으면 그 곳에는 인간의 나약함이 웅크리고 있지만, "그사람 대신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하고 말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앞에 세우는 잔인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종종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난다. 물론 지나가는 말과 생각에 불과하겠지만, 그는 자신의 사랑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 회의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가정한다. 상상의 공간 속에서 자신이 그 사람을 대신해 죽어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이 깊고 완전하다고 믿고 안도한다. 사랑을 입증해야 할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았음에 감사할 줄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무한한 우주 공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무의 존재는 탄생하는 순간 관속에 갇혀 버린다. 그것은 숙명적으로 짜여져 있는 관이다. 관에는 사랑이라고 불리는 벽과 뚜껑이 있다. 진정한 사랑에는 우주의 모든 질서를 꿰뚫고 인간들의 열정과 열정이 뒤엉킨 미로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지혜가 있겠지만, 그 사랑을 향해 비틀거리며 가는 인간의 심리나 관계는 복잡하기만 하다. 다행스럽게도, 절망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벽을 치며 울부짖는 체험을 해보기 전까지 관속은 넓고 푸근하다. 그러나 한번 의심을 품으면 모든 벽은 대리석처럼 견고하고 차며, 때론 거미줄처럼 엉성할 뿐이다. 때로는 숨막히고 때로는 기댈 수도 없을 만큼 푸석푸석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지식을 열거하고 촌철살인의 글과 언표를 끌어다 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은 가고 남는 것은 사랑의 흔적뿐이다.
사랑에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푸근해지는 우정과 모정이 있는가 하면 무한한 삶의 에네르기를 하루아침에 부패시키는 애증도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인간의 행위는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다른 동물들처럼 '짝짓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사랑에는 생각하는 마음思이 내포하는 '둥근' 이미지가 있다. 모난 돌은 비와 바람에 깍이고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상처를 낼 수 있는 인간의 모난 의식들은 수없이 반복되는 생각을 통해 깊고 둥글어진다. 둥근 것은 도한 우주순환의 질서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눈 속에는 우주가 담겨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의 눈에는 사랑의 대상만이 있다. 많은 눈들이 나를 보고 있지만 ,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눈은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을 걸러내며 마치 사금처럼 사랑의 이미지만을 갈구한다. 대상에 깊이 빠져들수록 그 눈은 점점 더 반짝이고, 점점 더 열린다(열려야 한다!).
어느 순간 사랑으로 반짝이던 눈 속에도 순식간에 검은 발자국들이 가득찬다. 사랑에 대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때 그 눈은 사랑의 종말을 보고 있다. 그 순간은 사랑이 충만할 때 온다. 놀랍게도! 검은 발자국에 실린 공포의 무게는 사랑의 무게를 초과하며, 너무도 명료했던 사랑의 형체는 자신의 존재를 깡그리 뒤흔드는 불안에 의해 뭉개진다. 그러나 몇몇 축복받은 사람들은 사랑으로 충만한 눈빛을 임종의 순간까지 잃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사랑의 이미지들은 우리의 유전자를 통해 후손들의 삶 속으로 옮겨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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