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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책 유색 혁명가 ''프란츠 파농''

by eunic 2005. 2. 28.

유색 혁명가 '프란츠 파농'
[한겨레 2003-10-24 19:12]


[한겨레] 알리스 셰르키 3년 전쯤 6월 항쟁 이후 최대 인파가 모였다는 어느 영화제에서, 초겨울 밤 야외 상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체 게바라의 전기 영화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는 화가 나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체 게바라의 책, 티셔츠, 그를 모델로 사용한 다국적 기업 광고까지 전 세계가 체 신드롬에 휩싸였다. 소비를 최고의 가치로, 탈정치를 ‘쿨’함으로 무장한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젊은이들이 영원히 되살아나지 않을 무덤의 혁명가에게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다. 체 게바라 열풍을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완전한 실패를 확인하는 현상으로 보고, 지극히 근대적 원칙적 맑스 레닌주의자 체 게바라와 ‘현실주의자’ 카스트로의 고뇌와 지도력을 비교하면서 카스트로를 더 ‘인간적’으로 평가한 권혁범의 지적은 날카롭다.

신드롬 되지 못한 이유? 나는 낭만화된 혁명을 참을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대중은 혁명을 현실로 만들지 않는, 권력으로부터 거세된 혁명가를 원한다. 안전해 보이는 현실을 끈질기게 문제 제기하고 지속적으로 의식의 탈식민을 요구하는 혁명가, 도망 다니는 자신을 끌어다 거울 앞에 세우는 혁명가는 반갑지 않다. 두 사람 모두 30대에 삶을 마친 동시대 인물로 제3세계 출신 디아스포라 유랑 혁명가지만, 왜 체 게바라는 다국적 기업과 자본주의 대중에게도 인기가 있고 프란츠 파농은 좌파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을까 나는 그것을 피부색의 차이로 본다. ‘하얀’ 체 게바라에게 근대는 피부색과 무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인도제도의 작은 섬 프랑스령 식민지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난 흑인 파농에게 근대는 곧 피부색의 정치이며 인종의 드라마였다. 인종주의를 관념적 계급 문제로 환원한, 아니 문제제기 조차 방치한 맑스주의는 백인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파농이 27살에 쓴 식민주의 심리학과 탈식민지 이론의 고전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시인 김남주가 수배 중에 번역해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이라는 제목으로도 출판됐다. 김남주의 이 제목은 파농 사상의 정수다. 파농이 무섭도록 집착한 것은 백인의 타자가 흑인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몸부림치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흑인의 타자 역시 흑인이라는 자기 의식이었다. 흑인은 이미 백인의 눈으로 자기를 본다. 아시아인은 서구의 눈으로 자기를 본다. 그야말로 우리는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것이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몰락하는 식민주의> 등 파농의 사유를 직접 접하기 전에 그의 동료 알리스 세르키가 정확하게 소개하는 평전 <프란츠 파농>(이세욱 옮김·실천문학사)을 먼저 읽는 것은 어떨까.

이 책은 한글로 옮겨진 파농의 책들에 비해 번역이 빼어나고, 한국사회에서 파농 읽기의 두 가지 어려움-오독과 읽기 과정의 고통-을 어느 정도 덜어 준다. 한국사회에서 그만큼 비창조적으로 오해받은 사상가도 드물 것이다. 파농 읽기의 괴로움은 ‘유색’(흰색도 유색이다)인종으로서 파농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독자에게만 해당한다. 그는 파농과 함께 백인 서구 중심의 근대화, 즉 인종화된 식민주의의 유산인 자기혐오, 자기부정, 자기분열을 앓게 된다. 감정 노동과 직면의 긴장을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평전으로 파농과 마르티니크, 알제리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오히려 그의 분노가 부족하다고 느낄 지 모른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