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정치인은 여성을 대표한다? | |
[한겨레 2004-03-31 18:32] | |
현실 정치 무대, 노동 시장 등 공적 영역에 진출한 여성 개인을 마치 전체 여성의 대표자인 양 간주하여 지나친 기대를 하거나 감시, 비난하는 것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남자의 적은 남자’인 경우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회사에서 여성 과장과 여성 부장이 싸우면 과장, 부장이라는 사회적 위치는 없어지고 성별만 남아 여자끼리의 싸움이 된다. 이와는 반대로 남성 과장과 남성 부장이 싸울 때, 이는 과장과 부장의 갈등일 뿐 남자끼리의 싸움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자본가와 노동자, 부시와 후세인, 한국과 일본의 갈등 역시 결국은 남자와 남자가 싸우는 형국이지만, “남자들은 단결이 안돼”, “남자들은 어쩔 수 없어”라는 식의 조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남성은 남성이기보다 사람이고, 남성에게는 사회적 위치가 성별보다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의 정체성이나 사회적 지위는 언제나 성역할로 환원된다. 여성은 노동자나 지식인이기 이전에 여자인 것이다. 남성, 서구인, 이성애자 등 ‘주류’는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대개의 피억압자들은 개인으로 간주되지 않고, 그(그녀)가 속한 집단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져 그 집단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오명을 뒤집어쓴다. 대개의 서구인들은 한국, 일본, 중국이 서로 다른 민족이며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한국인들 역시 이주노동자들이 각기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미국에 가면 단지 유색 인종인 것처럼,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모두 ‘동남아인’으로 여겨진다. 주체의 입장에서는 타자들 내부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내가 여성학을 공부한다고 말하면, 나를 마치 ‘국가대표 페미니스트’로 ‘대접’하는 시선과 질문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여성 정치인이 전체 여성을 대표할 필요도 없고, 대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남성 정치인 한명이 모든 남성 집단을 대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여성 정치인 한명이 여성을 대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여성 정치인 개인에게나 전체 여성에게나 불행한 일이다. 여성 정치인은 여성을 대표한다는 논리 때문에 여성 정치인은 ‘국민’의 입장과 여성의 입장을 모두 대변해야 하는 이중 노동에 시달리고, 여성의 정계 진출은 여성 몇 명이면 족하다는 ‘구색 맞추기’에서 그치게 된다. 여성 정치인이 단지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 계급 문제에 대해서도 진보적이고 모든 면에서 깨끗하고 도덕적이며 ‘게다가’ 여성주의 시각까지 갖춘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남성 정치인에 대해서는 이 모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기대’는 차별의 또 다른 얼굴일 수 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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