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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사랑의 단상 中, 기다림.

by eunic 2005. 2. 24.

롤랑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 기다림.



기다림 :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별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

(약속 시간, 전화, 편지, 귀가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이.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呪文)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렇듯 하찮은,

무한히 고백하기조차도 어려운 금지 사항들로 짜여있다.

나는 방에서 나갈수도, 화장실에 갈수도, 전화를 걸수도

(통화중이 되어서는 안되므로)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전화를

해오면 괴로워하고 (똑같은 이유로 해서), 외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그 자비로운 부름을, 어머니

의 귀가를 놓칠까봐. 기다림 편에서 볼 때 이런 모든 여흥에의

초대는 시간의 낭비요, 고뇌의 불순물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상태에서의 기다림의 고뇌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전화가 손에 닿는 의자에 앉아 있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다.

젖먹이 아이에게서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나는 내 필요와 능력에 따라 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 낸다"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내가 이미 그를 만들어낸 바로 거기에서 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환각한다.

기다림은 정신착란이다.


전화가 또 울린다. 나는 전화가 울릴 때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내게 전화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둘러 수화기를

든다. 조금만 노력을 해도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듯 하고 그래서 대화를 시작하나 이내 나를 정신착란에서 깨어나게

한 그 훼방꾼에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는다. 이렇듯 찻집을 들어서는

사람들도 그 윤곽이 조금이라도 비슷하기만 하면, 처음 순간에는

모두 그 사람으로 인지된다.


그리하여 사랑의 관계가 진정된 오랜 후에도,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환각하는 습관을 못 버린다. 때로 전화가 늦어지면

여전히 괴로워하고, 또 누가 전화를 하든 간에 그 훼방꾼에게서

나는 내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나는 절단된 다리에서 계속 아픔을 느끼는 불구자이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 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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