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무슨 일이세요? 당신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군요"
--아니예요, 전 행복해요, 하지만 슬퍼요.
--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중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채 십분이 되기도 전에 우린 '사랑'을 운운하는 수많은 노랫말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담론의 양적인 결과에 비해 그 실질과 내용은 왜소해 보인다. 사랑의 담론이 이렇게 부실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그것들이 삶과 사물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과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의 자기 증식 원리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마아케팅 차원에서의 사랑의 담론은 시장의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채 가지기 힘들다.
통속적인 사랑의 담론들이 범람하고 있다. 통속적이라는 것은 무반성적이라는 것이다. 대중들은 사랑의 담론들을 기계적으로 수용한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뉘앙스가 결여되어 있다. 연인들이란 지극히 섬세한 어떤 것들을 쉴 사이 없이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랴. 하나하나의 느낌들이 극도로 민감해지는, 그래서 쉽게 깨어지기 쉬운 영혼들, 바로 그들이 우리가 연인들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 아니랴.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다'라고 작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의 문체는 롤랑 바르트를 마르크스주의자, 구조주의자 라는 기존의 인식틀에서 제외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대단히 아름다운 산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미리 이데올로기화, 정치화 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저 깊이 느낄 자세만 갖추면 된다. 약간의 심호흡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역자 김희영은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 사랑의 담론을, 상상적인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의 자리를 제공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라고. 이 책은 그러므로 기특한 책이다.
# 표시는 본문의 내용 그 아래는 감상적 주석
#장미빛과 신비로운 푸른빛이 어우러진 어느날 저녁, 우리는 하나의 유일한 섬광을 교환하겠지. 모든 것은 긴 오열처럼 작별 인사로 가득한 채 ---보들레르
그와 내가 나누는 섬광은 무엇일까? 입맞춤, 아니면 어떤 느낌의 홍수, 아니면 부딪히는 눈빛들, 눈물에 반짝이는 불빛들....
#죽음을 사랑하는 것일까? 키츠의 말처럼 반쯤은 그런 마음도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편안한 죽음을 반쯤은 사랑했거니 half in love with easeful death) 죽는 것으로부터 해방된죽음. 나는 이런 환상을 해본다. 내 육체의 어느곳에서도 피가 흐르지 않는 부드러운 출혈, 채 사라지기 저에 고통을 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계산된 거의 즉각적인 소모. 나는 잠시나마 죽음의 뒤틀린 상념 속에 머무른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의 천직은 그 반대로 칩거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않고 미결 상태로 앉아 있는, 마치 역 한 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마냥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그 사람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과연 나를 위해 행복한 처분을 내려줄 수 있을까. 스스로 손을 뻗지 못하는 그런 기다림의 수동성이 존재를 달뜨게 한다. 다가설 수 없음이 부재를 향하여 맹렬하게 손을 뻗친다. 그의 부재가 확실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기다림의 자리는 뜨겁다.
#하나의 단어가 육체로부터 우러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준다. 즉, 갈망하다란 단어가...입김을 불 때마다 그 불완전한 입김이 서로 상대방의 입김에 섞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두 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녹이는 것으로서의 포옹의 이미지. 그러나 사랑의 부재에서의 나는 서글프게 누렇게 메마르고 오그라든, 떨어진 이미지이다.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존재의 감옥에서 나는 행복한 유폐자다. 그러나 '행복한'이란 말은 한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아픈 행복이기에. 사랑의 찰과상이 주는 아픈 행복들.
#일생을 통하여 나는 수백만의 육체와 만나며 그 중에서 수백개의 육체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백개의 육체 중에서 오로지 나는 하나만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말해준다...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필요했던가.
#나는 내 광기의 유일한 증인이다. 사랑이 내게서 노출시키는 것은 에너지이다.
나는 타오르는 나를 본다. 그 불이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길마저 태운다. 롤랑바르트는 말한다. "왜 지속되는 것이 타오르는 것보다 더 낫다는 말인가?" 이성은 정열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그런 우열이 정당한가?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그 앞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과 욕망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연인들은 현명해질 수 있을까?
#자신의 불행을 재현함으로써 그를 감동시키려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징계하는 어떤 고행의 행위를 시도한다.(생활방식이나 옷차림 등에서)
그는 격렬한 동작으로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는 세상을 버린 듯 멀리 있는 것들, 천문학과 해양학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는 은둔자처럼 허름하게 옷을 입기도 하고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평소에 입지도 않던 스커트를 입기도 한다. 도발적으로, 그녀는 태우지도 않던 담배를 입에 문다. 그들은 변화하고 싶은 것이다. 표면의 변화가 내적이고도 화학적 변화를 가져오기를 갈망하고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세계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그들의 행위엔 하염없는 융합에의 욕구가 스며 있다. 세계가 변화하여 그와 내가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는, 그 터무니없는, 불가능을 꿈꾸는, 슬프고도 미묘한, 달콤쌉싸름한 초콜렛 같은.
# 대부분의 상처는 상투적인 것에서 온다.
모든 사람들처럼 사랑해야 하고, 버림받아야 하고, 또 욕구불만만을 느껴야 하는 등등. 그러나 독창적인 관계일 때에는 상투적인 것은 모두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복 또한 상투적인 것에서 온다. 나는 지나친 불행과 지나친 행복을 경계한다. 날것 그대로의 삶은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니다. 고통뿐인 사랑은 없다. 사랑은 언제나 여러 감정의 질료들이 섞여 있다. 혼재되어 있다. 푸른 하늘, 푸른 바람을 느끼면서도 때론 격렬한 어둠의 한가운데에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일관되게 행복하거나 불행하지 않다.
#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기다림이란 시간 속에서 풍화되고 마모된다는 것, 시간 속에서 자신을 해체하는 것. 그런 아주 느린 소멸!
# 내 정념의 서정적 진술에, 문자 그대로의 표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나를 정당화하는 일이 아닐까? 지나침, 광기, 그것이 내 진실이며 힘이 아닐까? 그리고 이 진실, 이 힘이 결국에 가서는 그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정념의 기호들이 그를 질식시킬지도 몰라라고 나는 중얼거린다.바로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감춰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바로 거기에 진짜 영웅적인 가치가 있다 "고매한 영혼들은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주변에 퍼뜨려선 안 된다"(클로틸드 드 보)...그렇지만 정념을 (다만 그 지나침을)완전히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추는 것이 보여져야 한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걸 좀 아세요, 이것이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능동적인 패러독스이다.
# 내가 언어로 감추는 것을 육체는 말해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육체는 조종할 수 없다...내 육체는 고집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바른 어른이다.
육체를 육체로놓아 둬선 안된다. 말(혹은 이성)을 말로만 내버려 둬선 안된다. 그 둘을 통합한다는 것은 대단한 현명함을 요구한다. 우린 언제나 그 어떤 하나에 쏠릴 위험을 안고 산다. 누가 중용의 대가인가. 우린 스스로 그 대가의 길을 포기함으로써 대중의 일원이 된다. 고고함을 꿈꾼다는 것, 불가능한 것을 소망한다는 것, 그것은 단지 동화적 망상이어야 할까. 소시민임을 자처하면서 그 소시민의 울타리 안에 있음을 오히려 감사하면서 우린 신화적 힘과 권능을 탕진한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어디에 있을까. 내 힘으로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것,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 신이 우리에게 줄수 있는 축복이란 그런 것들이 아닐까. 닿을 듯 닿을 듯 손 닿지 않는 곳에서 그리움은 폭발한다. 널 그리고 그대를 내 그리움의 끝에 둔다.
# 안착한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안착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어떤 계약상의 관계의 실질적이고도 감정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자신만이 거기서 제외되었다고 여겨져, 부러움과 비웃음의 모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밤의 등성이에 하나둘 불이 켜지면 어떤 이들은 그 불빛 속의 휴식을 그리워 한다. 그들은 방이 그리운 것이다. 티끌처럼 점처럼 떠돌며 그들은 방이 그리운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오래 전에 읽은 이하석의 한 구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절들은 나의 마음에 살러 왔다. 차가운 얼음들이 나의 이빨로 달겨들던 시절. 우리들의 자취방에 가득했던 스산한 공기들. "...우린 늘 방이 그리웠지요. 그러나 우리의 방은/ 어디에도 없고, 티끌처럼 점처럼 우린 떠돌지요./ 때론 눈물의 집 속에 들어 내가 바깥을 내다볼 때,/ 내가 깃든 눈물의 투명한 물방울의 집은/ 세상의 시선에 맞아 자주 터뜨려져버려요/ 세상 밖 어디에서 땅을 얻어 세상 밖/ 어디에다 우리 집을 지을까요? 도꼬마리 청석 위/ 우리가 가구는 세상은 도시의 빈터만큼/ 눈물겨워요. 이 도시의 버려진 빈터에서/ 당신을 읽어요..."
# 충족된 연인은 글을 쓸 필요도, 전달하거나 재생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쓴다는 것은 공허를 채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의 허기를 스스로 달래는 그런 노동. 새벽 쓰린 속을 달래려 곤로에 찬물을 얹으면 유리창에 달라붙는 새벽의 입자들. 부유하는 불빛들. 그러나 허기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허기는 보여준다. 그가 무엇을 욕망했는지를. 허기는 큰 구멍이다.
# 그러니 조금 떨어져 있자. 거리감을 쌓는 훈련을 하자...그러므로 나는 그를 압박하지도 내 정신을 잃지도 않으면서 그와 더불어 괴로워 하리라. 아주 다정하면서도 잘 감시된, 애정에 넘쳐 흐르면서 예의를 잃지 않는 이 처신에, 우리는 부드러움이란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연민의 "건전한"(개화된, 예술적인) 형태이다.
그를 본다. 그녀를 본다 냉정해지자고 다짐하는 그와 현명해지자고 다짐하는 그녀. 잘 감시된, 잘 관리된 애정 속에 자신을 세워 두자고 그들은 다짐한다. 품위를 잃지 않기를~~하며 그들은 다짐한다. 그런 다짐과 품위가 한낱 조롱거리가 되어 버린 시대. 니이체는 말한다. "그대들이 대중의 일원이기를 멈추고자 한다면 단지 그대들의 안일을 멈추기만 하면 된다"고. 우린 더 큰 세계의 싹이 아닌가.
# 손을 꽉 잡는다는 것--수많은 소설의 얘깃거리가 되어온--손바닥 안에서의 그 미세한 움직임, 비키지 않는 무릎, 아무 일도 아니란 듯 소파의 등받이를 따라 늘어뜨려진 팔, 그 위로 차츰차츰 다가와 기대는 그의 머리. 그것은 미묘하고도, 은밀한 기호들의 천국이다.
손가락 하나에도 수많은 기호를 담을 수 있는 그들. 그들은 너무 잘 느낀다. 지나쳐야할 것들마저도 놓치지 않는 그런 섬세함으로 그들은 상처 받는다.
#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사유는 언어다. 언어 없는 사유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유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유도 사유지만, 나는 내가 아는 사유로 사유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의 작품을 창조하거나 조립하는 시는 헌정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당신을 숨막히게 하는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어한다라는.
그 충동에 사로잡혀 있을 때 새는 가장 극진한 소리로 울지 않던가.
# 나는 내게 상처를 주는 이미지들(질투, 버려짐, 수치심)을 연신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자해하려 하며, 또 하나의 상처가 내도하여 그것을 잠시 잊게 할 때까지, 다른 이미지들로 양분을 주고 부양한다.
상처를 덧내는 사람들, 그 상처속에서 아픈, 그러면서도 달착지근한 즙액을 야곰야곰 갉아 먹으려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고통을 빼앗아간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갱생을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잔인하다. 어두운 자들에게 고통은 좌절의 양식이다.
# 한 영국 귀족이 <베르테르>에 의해 야기된 자살 전염병에 대해 괴테를 비난하자 괴테는 순전히 경제 용어로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었다. "당신네의 상업 체제가 수천의 희생자를 낳게 했는데, 왜 그 중 몇 명을 <베르테르>에 허용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것이 현대의 윤리다. 터무니없는, 내가 한번도 동의한 적이 없는.
# 살갗이 벗겨진, 지극히 가벼운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는 사랑하는 사람의 특이한 감수성... 사랑에 관한 한 그것은 살갗이 벗겨진 사람이지 깃털로 감싸인 사람이 아니다.
어떤 사랑은 그렇다. 그렇지 않은 사랑도 있을 것이다. 말이란 언제나 현재에 충실하다. 그러니 그 말의 현재밖에 있는 당신은 그 말에 묶이지 마라. 당신의 현재엔 또 다른 언술이 필요한 것이다. 책에 언급된 말들은 어떤 순간에만 헌신한다. 발화자의 상황과 문맥에 헌신한다. 당신에겐 당신의 문맥이 있다.....그러나 한입으로두말을 해도 말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 사랑의 포옹은 한 순간, 사랑하는사람에게 사랑하는 이와의 완전한 꿈을 실현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처럼만 보일 뿐이다.
# (사랑의 정념은 정신착란이다, 그러나 정신착란은 낯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착란에 대해 말하며, 그리하여 이제 길들여졌다. 불가사의한 것은 오히려 정신착란의 상실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돌아갈 것인가?)
미셀 푸코의 난해함을 모두 감당하긴 힘들다. 그러나 <현대>가 위에서 말한 착란을 범죄로 몰고 있다는 데엔 그가 동의해줄 것으로 믿는다. 그것이 내가 아는 미셀 푸코다. 곳곳에 처벌의 기제들이 득시글거린다. 그러니 자신만만할 수 있는 연인들이 몇이랴. 통제된 곳에서의 축제는 엄밀히 축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한부 외출에 불과하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뻔하게 들여다 보이는, 얕은 수작의 시간들. 거기에서 광기는 슬픈 속임수다. 어떤이들은 그 축제의 한복판에 슬쩍 유리구두를 벗어 놓음으로써 그 시간이 좀더 연장되기를 바란다.
# 나는 사랑의 상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러나 상상적인 것은 불이 잘 안꺼진 이탄처럼 그 밑에서 타오르고 그리하여 다시 불붙는다. 단념한 것이 다시 솟아오른다. 잘 안 닫혀진 무덤에서 갑자기 긴 외침이 폭발한다.
그 불은 잘 안 꺼진다. 그 무덤은 잘 안 닫혀진다. 왜냐면 불을 꺼야할 당사자가 그 불이 완전히 꺼질 것을 두려워해서 가슴 속 어딘가에 불씨를 자꾸 숨기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방화자다. 타인의 충고를 듣는 척은 하지만 그는 애초에 불을 끌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는 언제든지 꺼지려고 하는 불에 기름을 붓는다.
# 기진맥진 한 목소리, 희박한, 핏기없는 목소리, 세상 끝에 다다른 듯한 목소리, 그리하여 이제 차가운 물 속 깊숙이 잠겨가는 목소리. 목소리는 피곤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처럼, 이제 사라지는 중이다. 피로는 무한 그 자체이다. 끝내는 것을 끝내지 않는 것. 이 간략하고도 짤막한,너무도 드물어 퉁명스럽기조차 한 목소리, 이 멀고도 다정한 목소리의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내게는 하나의 거대한 마개가 된다. 마치 외과 의사가 내 머리 속에 커다란 솜뭉치를 처박아 놓은 것처럼.
그렇게 피곤할 땐 의미가 귀찮다. 여지껏 지탱해온 이성이 털푸덕 땅바닥에 주저 앉는다. 그들을 위로하겠다면 그가 칩거해있는 방의 열쇠를 멀리 던져 버려라. 누구도 그의 문을 열 수 없게.
# 축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와의 모든 만남을 하나의 축제로 체험한다...어떤 엄청난 즐거움의 총체요, 향연......
어떤 사람이 말한다. 제길, 축제가 뭐 이래.
# 주체가 된다는 것, 주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나를 미치게 한다. 나는 타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공포 속에 인지한다....나는 영원히, 파괴불능인 채로 나 자신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치는 것이며, 견고하기 때문에 미치는 것이다.
<내 집은 파괴의 집입니다>라고 최승자는 말한다. 그러나 <나>처럼 견고한 성은 없다.
# 옷...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만남 때에 입었던 옷이나 또는 사랑하는 이를 유혹할 목적으로 입는 옷 때문에 야기되거나 부양되는 모든 감정적 동요...나는 나를 열광케 하는 한 만남을위해 나는 정성스럽게 화장한다.
그런 치장의 시간을 헛된 소비가 아니다. 독서의 시간만큼 그런 시간은 소중하다. 몸의 단장도 영혼의 단장에 못지 않음을 인정하자. 살아서의 초라함을 죽음으로 보상 받으려는 어리석음을 맹렬히 비난해주는 동지들이 있다. 물질의 소모에 집착하는 물질적 현세주의자들이 그들이다. 필요한 때만 손을 잡아주는 그런 통일전선을 경계하자. 그들은 소비만을 생각할 뿐이다. 일부 통합을 위해서 전반적인 야합은 있을 수 없다.
# 나는 한권의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그것에 대해 자신을 투사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에 밀착하여 책의 마지막까지 그 이미지 속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이런 동일시!!
바로 '이 책 속의 그는 나다'라고그들은 동일시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그 책 속의 이미지를 온전히 자기것으로 할 수가 있다. <홍당무>를 읽으며 어떤 소년은 자기의 엄마가 의붓엄마라고 생각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추위, 그것은 어머니의 체온을 필요로 하는 어린애의 추위 타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를 안아 주어라. 그럴 때 그는 의외로 착한 소년이 된다.
# "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란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요"란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알 수 없는 대상 때문에 자신을 소모하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순수한 종교적인 행위이다.
이해가 사랑의 전초단계라면 이 세상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논리 서적들이 범람할 것이다. 미지의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경외감.
# 당신의 욕망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당신은 그것을 조금 금지하기만 하면 된다.(금지없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게 사실이라면)
'신께서 선악과에 대한 금지를 명하신 것이 곧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바로 그 자유가 우리들의 기쁨의 원천이다. 적어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통제할 수 있는 한 말이다.
# 견딜 수 없는 것. 사랑의 고통의 축적된 감정이 드디어 "이렇게 계속할 수 없어요"란 외침으로 폭발한다는 것.
잘 관리된 이성의 규율 속에서 튀어나오는 이런 단발마적인 절규......
# 자살의 상념, 결별의 상념, 은둔의 상념, 여행의 상념, 봉헌의 상념 등. 나는 사랑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해결책을 상상할 수 있으며, 또 끊임없이 상상한다...사랑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에 대한 환상적인 조작..사랑의 담론은 일종의 유폐된 출구이다...상념이란 항상 내가 상상하며 감동하는 하나의 비장한 장면, 곧 연극이다...때로는 작별의 장면, 때로는 한 통의 엄숙한 편지, 또 때로는 충만한 해후의 장면이기도 하다. 재앙의 예술이 내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
연극의 기원에 대한 이론의 하나로 위의 의견을 첨가하고 싶다. 혼자 버려둔 생각은 뭔 짓인들 못할까. 그를 죽이고, 그의 장례식에서 눈물 흘리고, 웅장한 스펙타클로 이별을 준비하고, 감동으로 격정적인 헌시를 바치고.
# 사랑의 우수 속에서는 무엇인가가 끝없이 사라진다. 마치 욕망이 이런 출혈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 사랑의 피로가 있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은 배고픔, 입을 크게 벌린 사랑, 또는 내 모든 자아가 대신 자리를 차지한 사랑의 대상에게 끌려가며 이전되는 것.
내 영토의 등기부엔 아직도 내가 소유주다. 나는 이전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전되지 않는다.
# 비틀기는 놀이가 아닌, 상투적인, 강박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의 의례적인 조작이다. 이처럼 다변에 사로잡힌 연인도 자신의 상처를 만지작거린다....이제 막 울음을 터뜨리려는 자의 역할, 그 역할을 나는 내 앞에서 연기하고 그러면 그것은 나를 울게 만든다. 나는 내 스스로의 연극 무대이다. 이렇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것은 더욱더 나를 울게 만들고, 그러다 울음이 멈추려 하면, 다시 울음을 솟구치게 할 가혹한 말을 자신에게 내뱉는다.....마지막 난장판에 이르는 그런 말의 즐김.
자신의 연기를 자신이 지켜 보아야 하는 그런 쓸쓸함. 타인들이 나처럼 나를 지켜봐 줄 순 없다. 그렇다 난 내광기의 유일한 증인이다.
# 침묵 중의 어머니는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어머니, 침묵만 하는 어머니, 그 침묵이 편하면서도 두려운 것은 왜일까요.
# 나는 아무것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소득의 밤, 정교하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소비의 밤이다. 나는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 사랑의 내부 안에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런 방임의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히 오랜 시간 긴장해 있지 않았던가.
# 말, 그것은 무엇인가? 한방울의 눈물도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하리라--슈베르트 <눈물의 찬가>..눈물, 액체의 확산 속에 적셔진 육체..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장 진실한 메시지, 혀의 메시지가 아닌 육체의 메시지를 거두어 들이는 한 과장된 대화 상대자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눈물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 하지 못한다 해서 여지껏 나의 사유의 도구였던 말을 헌신짝 버리 듯 할 수 있는가. 나는 그 말로 사유하고 그리워 하지 않았던가. 언어에 대한 불신도 하나의 상투적인 태도가 되어 버림으로써, 제대로된 논리마저 불신 받는 웃지 못할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잘 사고된 말은 성숙하지 못한 직관보다 더 절실 하다.
# 잡담. 사랑하는 이가 잡담에 휘말리거나, 또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그에 관한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아픔...공동의 담론이 나의 그 사람을 빼앗아, 저기 존재하지않는 모든 사물들에도 적용되는 그런 보편적인 대체물의 핏기없는 형체로 되돌려 줄 때, 나는 마치 그 사람이 죽어, 축소되어, 언어의 거대한 능벽 안 유골단지에 안치된 것처럼 보인다. 내게서 그 사람은 결코 지시물이 될 수는 없다
오직 그만이 유일하게 내밀하고 고독한 세계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심정, 이것은 소유의 감정이 아니다. 그의 내부가 고요히 그리고 무한히 확장되기를 바라는 기원이다.
#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육체의 중심부, 심장까지), 주체는 더욱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주체란 내면성 그 자체이기에(상처란 무시무시한 내면성이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상처이다 닫혀지지 않는 근본적인 열림(존재의 뿌리까지)거기서 주체가 흘러나오며, 바로 그 유출 속에서 그는 자신을 주체로 설정한다.
상처는 어떤 중심점을 향해 타오른다. 거기에서 주체는 맹렬해진다. 격렬하게 흘러 나온다. 나무의 심장은 수액으로 가득차 있어 뜨겁다.
# 하나의 대담한 출현이 내 마음 속에상처를 열게 한다....나를 명중하는 일시적인 자태...나는 내게 말해진 한 문장을 사랑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 문장이 내 욕망을 건드리는 그 어떤 것을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추억처럼 내 마음 속에 살러 올 그 통사론적인 형태(그 틀) 때문이다.
어떤 문장은 내 마음에 살러 온다. 나에게 살러 오는 문장들을 위해 책을 연다.나는 행복한 벌집이 되겠다.
# 작업 중의 자세란, 어떻게 보면 이미지의 순진성을 보장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 혹은 그의 무관심의(내 부재에 대해) 기호를 보내면 보낼수록, 나는 마치 사랑하기위해서는 기습과도 같은 고대의 유괴양식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누구를 의식하지 않는 저 방임된 몸짓,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자의 유연함, 오후의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미루나무 한 그루 같은 그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바라보고 싶은 이런 충동.
# 사랑의 담론은 방안을 돌아 다니는 파리만큼이나 예측할 수 없는 순서에 따라 동요하는 문형들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Dust in the wind?
# 나는 메시지의 본질(이를테면 소문의 내용) 속으로 고통스럽게 파고 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메시지의 근거를 이루는 힘을 의혹의 시선으로 신랄하게 따져보는 것이다....울림이란 완벽한 말듣기의 열성적인 실천을 의미한다...울림의 공간은 육체이다.
울림에 귀기울인다는 것은 바슐라르식으로 말해서 <말의 공기적 진실>에 참여하는 일. 나를 좀더 잘 울리는 공명통으로 만드는 일. 메시지의 주파수에 내 수신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
# 하이네는 말한다. "당신의 품 속에 웅크리기위해 나는 무덤 속으로 내려 갈 것입니다" 또 베르테르는 말한다 "사람들은 귀한 종류의 말(馬)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은 너무 열심히 달려 흥분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혈관을 물어뜯어 보다 자유롭게 호흡한다는 걸세. 나도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네. 영원한 자유를 얻기 위해 내 혈관을 열어 젖히고 싶은 생각이"...자살!
이제 끝이 온 것이다.
베르테르여
다른 세상에서 그대의 피가 잘 돌거라
자유로와지거라
#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꿈꾼다...그리하여 나는 형용사가없는 한 언어에 도달한다. 나는
그 사람을 그의 자질에 의해서가 아닌, 그의 실존에 의해 사랑한다.
아무도 그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만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신뢰감이 상처 받기를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 어떤 형용사도 덧붙임이 없이, 그것을 해독할 필요도 없이 그저 내가 즐기는 텍스트.
그런 단순성 속에 우리의 하루가 깃들기를!
# 다정한 몸짓은 이렇게 말한다. 내육체를 잠들게 하는 너의 무엇도 즉시 소유하려 함이 없이, 너를 가볍게 조금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다오.
부디 그래 다오
# 내 힘은 내 약함에 있다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이런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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