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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내가 여자가 된 날- 여자라서, 함께 행복하다오

by eunic 2007. 7. 3.

내가 여자가 된 날 - 여자라서, 함께 행복하다오

<다섯은 너무 많아>

2007. 04. 05. 황진미 / 영화평론가

영화를 보다가 '여자라서 괴로운' 순간들이 있다.

<거북이도 난다>나 <오사마>처럼 고통 받는 여성들의 영화를 보면 온몸이 다 쑤신다.

개명천지의 '잘 난' 여성들의 전기영화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까미유 클로델>, <프리다>, <실비아>같은 영화에서조차, 그녀들은 남편 때문에 속 썩는 여인네들로 그려질 뿐이다. 여성이란 그저 폭압의 피해자이거나, 연애와 가정의 판타지를 내면화하여 불행을 자초하는 존재들이란 말인가? 당당한 여성적 주체로서 '여자라서 행복하고, 여자로서 자랑스러울' 수는 없는 것일까?

<다섯은 너무 많아>는 아무 연고 없는 이들이 도시락 가게 점원, 시내의 단칸방에 모여 살게 된 경위를 그린다. 집에 정을 못 붙이고 가출한 소년은 돈벌이를 위해 시내의 가게를 촬영하다가 시내가 던진 돌을 맞고, 기억상실증을 가장한다. 시내의 방에서 따뜻한 밥상을 받고, 편안한 잠을 잔 소년은 그녀에게서 엄마에게조차 느껴보지 못한 온기를 느낀다. 또 시내는 라면 가게에서 임금도 못 받는 조선족 아가씨를 집에 데려와 밥을 먹이고, 라면 가게 주인을 혼내준다. 이내 라면 가게 주인의 사정도 알게 된 그녀는 그 역시 집에 들인다. TV도 없던 그녀의 방에는 세간이 늘어나고, 새 생명이 잉태된다. 시내에게는 그녀가 수년간 돈을 부쳐왔던 혈연가족이 있고, 그녀와의 결혼을 원하는 남자가 있지만, 그녀는 배타적 가정을 꾸리기 위해 이 '이상한(?) 가족'을 내치지 않는다.

그녀는 대단한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엄청난 희생정신을 지닌 성녀도 아니다. 직장에서는 성실한 일꾼이고, 자신의 행위나 관계에 책임을 지고자 하며, 곤궁한 이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윤리의식을 지녔다. 이는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대게 타자에게 경계심을 품기 마련이며, 낯모르던 타인과 진심으로 만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타인을 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더욱이 성적관계까지 염두에 두면 더욱 그러하다. 그녀는 놀라운 관계능(關係能)을 지녔을 뿐 아니라, 배타적 이성애 관계(연애)나 가부장적 가족주의(결혼)에 갇히지 않고, 독립된 주체로서 수평적 연대의 중심이 된다. 이른바 대모(代母)가 된 것이다. 과연 그녀가 남성이었어도 이 관계가 가능했을까? 성적 긴장과 친밀감 부족, 수직적 위계질서 등으로 인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자라서 너무 행복해요~󰡓 이 말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질서 안에서 발화될 때는 수동적 판타지이지만, 그 바깥을 전유할 때는 능동적 진실이 된다. 여성이 중심이 된 수평적 관계 맺기를 통해 다른 삶과 행복을 체험해보지 않겠는가?